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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허무한 인생
(본문: 시 39:1-13)
1). 서론: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소설 속에서, 바다에서 물고기 한 마리를 잡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는 노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바다에서 여러 날을 기다리다가 천신만고 끝에 커다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노인은 그 물고기를 배에 매달고 항구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돌아와서 건져보니 오직 앙상한 뼈만 남아 있었습니다. 상어 떼들이 엄습하여 물고기를 다 뜯어먹어 버렸던 것입니다. 노인은 심한 허탈감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들의 허무한 인생살이를 상징해 주는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의 시인은 사람에게는 병고와 그 죽음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허무함이 있지만, 알아야 할 것은 “내 목숨의 끝”이 있고 이 생명이 영구함이 될 수가 없다는 한계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인생을 부정하고 그 의미를 무시하는 허무주의 생각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쳐다 볼 수 있는 영원한 것이 무엇이며, 누구에게서 그것을 찾을 수 있느냐를 가르치려고 함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허무한 인생살이 속에서 참된 교훈이 무엇인가를 묵상해 보도록 합시다.
2). 본문의 이해(Text): 내용 면에서 38편과 공통된 점들이 있으며, 다윗이 범죄 후에 낳은 아들이 병들었을 때(삼하 12장), 또는 압살롬의 반란 때의 작품으로 보입니다. 본문 내용은 1. 악인 앞에서의 침묵(1~3), 2. 허무한 인생살이(4~6), 3. 용서와 회복의 기도 (7~13)의 내용입니다.
3). 본론(Context):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 그의 말이 헛소리로 말할 수도 있고 또는 참으로 진짜 알찬 소리를 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 생명의 종말을 두려워하는 사람과, 그 종말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 그리고 그 육체의 생명이 끝난 다음 또 하나의 세계가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그 임종 때에 하는 말이 그의 일생 중 가장 추한 말이 되고 가장 무가치한 말이 되기도 합니다.
그가 비록 일생을 아무리 성공적으로 호화스럽게 자랑할 만큼 잘 살았다고 해도 그 죽는 임종 순간의 말과 태도 여하에 따라 그 사람의 살아온 인생이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Calvin의 전기를 쓴 ‘두멜그’는 Calvin의 임종 순간의 아름다움을 보고 “사람은 그 임종을 보아서 그가 어떻게 일생을 살았는가를 알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시인은 그의 임종을 보는 듯한 생명의 위기를 바라보며 인생의 허무를 뼈저리게 느끼는 동시에 하루를 살든 이틀을 살든 하나님 긍휼의 손길에 붙잡혀, 건강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 애원은 다만 자기 목숨을 연장하려는 육체의 생명 위주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자기의 병고는 다만 자기의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당신의 채찍을 내게서 거두어가소서. 당신이 나를 치시면 나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11절)
본문의 시인 다윗은 38편의 시와 같이 자기의 육체적인 병은 누구 때문이 아니라, 자기 죄 때문이라는 참회의 심정에 젖어 있습니다. 가령 2절과 9절에 나타난 침묵의 결심은 38편 13~14절과 유사하고, 7절에 “하나님밖에 소망이 없다는 고백”은 38편 15절, 그리고 악인들 앞에서 죄를 지을까 조심한다는 생각(1절)은 38편 16절과 유사하고,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병고에 시달린다고 함은(10~11절) 38편 1~3절, 그리고 11절 말씀과 서로 공통됩니다.
무엇보다도 시의 Theme(주제)이 “질병과 죽음의 위기”를 다루고 있음에 공통되지만, 38편에는 그의 임종의 사실을 39편보다 더 강하게 느끼면서도 하나님의 징계에 더 큰 관심을 두어 “죄와 벌”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려고 하나, 39편은 비록 죽음의 위기를 논하면서도 죄와 벌의 문제보다도 인생의 허무함에 관하여 더 큰 관심을 가진 것 같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없는 사람처럼 허무한 인생을 노래하고 절망하고 자포자기하는 소극적인 인생관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바라리오. 나의 소망은 주께 있다.”(7절) 라고 할 만큼 병과 죽음, 허무한 인생에서 절망을 넘어선 희망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희망의 교훈은 본문의 시인과 같이 참으로 인생의 허무한 것을 느낄 줄 알아야만 그 소망이 확실한 사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 그것이 이 땅 위에서 영구하다고 생각하는 일 그 자체가 본문 시인의 견지에서는 비신앙적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병고와 그 죽음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허무함이 있지만, 이렇게 인생의 허무함을 솔직히 시인해야만 참으로 하나님께만 희망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알게 하소서”란 말을 4절 처음에 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이 마땅히 알아야 할 일을 고백한 것입니다. 알아야 할 것은 “내 목숨의 끝”이 있고, 이 생명은 영구함이 될 수 없다는 한계성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인위적으로 자기 생명을 연장하려고 해도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염려함으로 그 목숨을 더 연장할 수 없다.”(마 6:27)라고 교훈하신 것처럼, 사람은 날 때부터 이 한계성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모세가 쓴 시에는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시 90:10)라고 했습니다. 여기 연수라는 것은 지나 가버리는 입김 같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주의 목전에서는 인생 일생이란 밤의 한순간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 90:4) 다윗 시인은“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시 103:15) 라고 했지요. 또한 본문에서도 “나의 날의 길이가 손 넓이 한 뼘만 하다.”(5절) 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다.”(시 144:4)라고 한 말과 본문 5절의 말은 상통합니다. 이 땅에 살아 있는 인생이란 영원하신 주 앞에서는 천년도 지나간 하루 같다고 한 말대로(시 90:4)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인생이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주의 앞에서는 우스꽝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 위의 사람들이 하는 일이란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아 두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6절) 라는 인생 허무함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어리석은 부자를 두고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눅 12:20~21) 사람이 치부하여 그 집의 영광이 더한다고 해도 조금도 부러워할 것도 없다고 합니다. 그가 한번 죽으면, 아무것도 가지고 지하로 내려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시 49:16~17)
이렇게 시편 시인들은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을 심각히 깨달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인생을 부정하고 그 의의를 무시하는 허무주의 생각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쳐다 볼 수 있는 영원한 것이 무엇이며, 누구에게서 그것을 찾을 수 있느냐를 가르치려고 함입니다. 전도서에 그렇게 “세상만사가 헛되다.”라고 반복하고 있으면서도,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무엇 때문에 이 허무한 세상에 살아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어느 때에나 하나님은 아름다움을 창조하시는 것은 인간이 처한 비극적인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은 美를 창조하시며, 또한 사람들 마음속에 영원을 사모케 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전 3:11) 본문의 시인이 인생의 허무를 말함도 인생이 절망 중에서도 소망을 둘 수 있는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영적인 사귐을 알게 함을 가르친 것입니다. 인생이 허무하다고 해도 그것을 자연의 현상이라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본문의 시인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다.”(9절) 라는 것은 주님이 행하시는 일이니, 이 세상에서 어떤 억울하고 비통한 일을 당해도 또 죽음에 직면해서도 인간은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호소할 것밖에 없습니다. “주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내 부르짖음에 잠잠하지 마소서. 나는 주님의 세계의 나그네요, 나를 불쌍히 여겨 내가 죽어 없어지기 전에 내 건강을 회복시켜 주소서!”(12절) 라고 간절히 빌 것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허무한 인생 속에서 보람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손 한 뼘만큼의 생명! 허무한 인생살이를 지금도 우리는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허무한 인생의 종착역에 당도하는 것을, 그때는 왜 필자가 그렇게 철없는 짓만 했는지를 고백해 봅니다. 필자가 고3 졸업기가 다가오던 때, 머리칼이 길어도 학교에서 꾸중치 않아서 고3 친구들끼리 머리 긴 것을 뽐내며, 얼른 어른이 되고 싶어서, 누나가 신고 버린 ‘살 양말’을 모자로 만들어서 쓰고 자면, 아침엔 머리칼이 짝 붙어서 빗질도 해 보고 그러고는 학교에 가서 “내 머리칼이 Form 좋게 잘 넘어가서 어른처럼 되어 간다.”라고 하면서 으쓱대던 그 시절이 아련히 悔悟에 차게 떠오릅니다.
25세 때 군에서 제대 후에 대구제일교회 남전도회 전도사로 봉직하게 되어서, 오전에는 철학전공으로 대학 강좌에 나가서 공부하고, 오후엔 회원들 심방을 하면서 목회 초년병의 훈련을 받으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새벽기도회 때나 수요 기도회 때, 대표로 기도하는 분이 교역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중에, “젊은 양 전도사”라는 호칭 중 “젊은”이라는 형용사가 저 마음엔 좋게 들리지 않아서, 저 마음속에서는 “언제 저 소리 안 듣겠는가?”라는 생각이 자꾸 났었습니다.
그래서 어서 30세가 되면 “젊은 전도사” 소리를 듣지 않겠지 하면서 孔子 論語의 爲政篇에 三十而立(서른 살에 학문이나 견식이 일가를 이루어, 도덕상으로 움직이지 않음을 이르는 말)이라고 해서 30세의 ‘立年’을 그렇게 고대했었습니다. 30세가 넘어서 필자 자신의 ‘자아실현’을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여 38세에 미국 유학을 떠날 때, ‘선택된 사람’이라고 하면서 우쭐 한 기분도 느꼈습니다. 그러나 39세가 되니까 길을 걸어가다가도 문득 생각나는 것이“내년이면 40세”가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철석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잠을 자다가 잠시 깨어서 문득 생각 키우는 것이 내년이면 40세가 된다고 생각하니 몸에 전율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미국 할머니들에게 연세가 얼마냐고 물으면 “39살”이라고 하였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60, 70세가 되어 보이는데, 원색적인 붉은 옷을 입고 입술에 진한 색깔로 치장을 하고 다니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그런데 60, 70세가 되어도 영원한 “39세”가 되었으면 해서, 늘 누가 나이를 물으면 “39살”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참 인생은 묘한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 것은 “젊은 전도사”라고 부르는 것이 싫어서 어서 30세가 넘으면 그 소리 듣지 않겠지 했는데, 그 젊은 전도사가 이제 88세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젊은이들을 보면 “저런 때가 좋은 때”라는 생각과 더불어 부러움과 시기심(?)까지 날 지경입니다. 그러고 보면 본문의 시인 다윗은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면서, 알아야 할 것은 “내 목숨의 끝”이 있고 이 생명이 영구함이 될 수 없다는 한계성을 피력했습니다. 오늘날 한 시인의 허무한 인생을 묘사한 시도 가슴을 더 시리게 합니다.
<허무한 인생/이채>-“불러도 불러도/청춘은 돌아오지 않고/그립다고 보고 싶다고/가슴을 쳐봐도/사랑은 아는 척을 않고/어쩌자고 가슴엔/차가운 비만 내리는가!/어쩌자고 옆구리 시린/통 바람만 부는가!/웃어도 외로움은 떠나지 않고/달래도 쓸쓸함만 더하는 가슴/날 두고 저 홀로 가버린 세월/낙엽이 쌓여가듯/널 향한 그리움만 쌓여가고/원하는 것은 얻기 힘들고/원치 않는 것은 부르지 않아도/잘도 찾아오는데/인생이 어디/내 맘대로 되는 일이던가/흐르는 물처럼/세월 따라 살아야 하는/인생 덧없음이여!” 현대 시인이 그린 허무한 인생의 묘사도 저 홀로 가버린 세월에 그리움만 쌓여 덧없음을 슬퍼합니다.
또한 필자가 고등학교 다닐 때의 국어 교과서에 정비석 작가의 <山情無限>이란 수필이 수록되어 애독했던 글이었는데, 수필 마지막 부분의 묘사가 독자들의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과 ‘허무한 인생’을 잘 표현해 주는 글귀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천 년 사직이 남가일몽(南柯一夢)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다시 천 년이 지났으니, 유구(悠久)한 영겁(永劫)으로 보면 천년도 수유(須臾)던가! 고작 칠십 생애(七十生涯)에 희로애락을 싣고 각축(角逐)하다가 한 움큼 부토(腐土)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 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히 수수(愁愁)롭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수필 결론 부분 글 내용의 역사적 배경은 신라 56대 경순왕이 고려조에 항복하지 않을 수 없음을 한탄한 왕자 ‘마의태자’[개골산(금강산의 별칭)에 들어가 베옷(麻衣)을 입고 풀뿌리·나무껍질을 먹으며 여생을 마침.]의 부귀영화의 상징인 왕위를 계승 받지 못한 <마의태자의 무덤>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그 감상을 서술함인데, 독자의 가슴에 瞳孔이 뚫리게 했습니다.
또한 남가일몽(南柯一夢)이란 말은 남쪽으로 뻗은 나뭇가지 아래의 꿈이라는 뜻으로, 덧없는 꿈이나 부귀영화를 이르는 말인데, 출전(出典)은 중국 당나라 때의 전기 소설(傳奇小說)인 이공좌(李公左)의 <남가태수전(南柯太守傳)>으로, 주인공 순우분(淳于棼)이 남쪽으로 뻗은 느티나무 가지 아래에서 잠이 들었다가, 괴안국(槐安國)에 초청을 받아 20년 동안 부귀영화를 누리는 꿈을 꾸다가 한순간에 깨었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필자의 젊을 때의 이야기, 허무한 인생을 그린 시, 마의태자와 남가일몽 속에 담긴 허무한 인생의 묘사는 일직이 <에덴>을 추방 받은 모든 인간이 겪어야 하는 실존 중의 한 단면을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이렇게 허무한 인생을 아옹다옹하면서 살아 온 것이 후회스럽고 촌음을 아껴서 살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그러니 젊다고 자랑치도 말고, 아직 살날이 멀었다고 방심치도 말아야 하겠습니다. 허무한 인생을 허무치 않게 여한이 없이 이 일회적인 인생을 잘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허무한 인생을 허무치 않게 살아야 할까요? 그 해답은 본문에서 시사하는 것처럼, <인생의 허무를 절실히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영원을 사모하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허무한 인생이기에 보람찬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보람찬 삶이란 결국 의미를 추구하는 삶을 뜻합니다. 의미 있는 삶이란 어떤 삶을 두고 하는 말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의미 있는 삶이란 인간의 삶에서 근본적으로 힘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을 사노라면 종종 실존적 좌절(Existential Frustration) 속에 빠져서 생의 의미 상실(마음의 병)을 할 때가 있습니다. 철학자 니체는 “살아갈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도 참고 견디어 나갈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려면 마음의 <평정! 즉, 무긴장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긴장 상태가 되는 실존적 공허함을 느끼게 되면, 권태로 인한 우울증, Alcohol 중독, 돈에 대한 욕심(특히 고령자들)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하기에 인간 자신에 대한 삶과 궁극성과 함께 유한성에 맞도록 책임성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살기 위한 권리를 주장하기 전에 살아야 할 책임이 수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거기엔 반드시 인생의 의미가 내포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실존은 본질적으로 자아실현을 추구하게 되는데, 自我實現에만 급급하다 보면 자꾸만 빗나가는 삶을 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자기 초월(Self-Transcendence)이 요청>됩니다.
자기 초월의 삶을 우리는 쉬운 말로 <신앙>이라고 말해 봅니다. 인간 자신의 의로움이나 지혜를 초월해서 하나님을 경외 함이 허무한 인생을 근원적으로 극복하는 길이라고 사료 됩니다. 동시에 세상에는 이해하기 힘든 부조리함이 있지만, 그로 인해 탄식하지만 말고, 하나님께서 허락 범위 안에서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절대 의존하는 신앙생활을 뜻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철저하게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삶을 누리고 즐기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삶, 하나님만이 절대자이신 것을 기억하는 삶,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그것을 기뻐하며 누리는 삶, 이러한 삶이 바로 인생의 허무함을 극복해 나가는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같은 삶을 살아서, 허무한 인생을 잊고 삽시다.
4). 결론: 본문 시의 主題는 “질병과 죽음의 위기”인 죽음의 위기를 논하면서 인생의 허무함에 관하여 보다도 더 큰 관심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없는 사람처럼 허무한 인생을 노래하고 절망하고 자포자기하는 소극적인 인생관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바라리오. 나의 소망은 주께 있다.”(7절) 라고 할 만큼 병과 죽음, 허무한 인생에서 절망을 넘어선 희망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희망의 교훈에 대해서, 본문의 시인은 참으로 인생의 허무한 것을 느낄 줄 알아야만 그 소망이 확실한 사실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인생 그것이 이 땅 위에서 영구하다고 생각하는 일 그 자체가 본문 시인의 견지에서는 비신앙적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허무함을 솔직히 시인해야만 참으로 하나님께만 희망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허무한 인생을 극복하는 첫 단계는 <처절하게 인생의 허무함을 느껴야 합니다.>그래야 영원을 사모하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허무한 인생이기에 “내 목숨의 끝”의 한계성을 인식해야 보람찬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보람찬 삶이란 결국 의미를 추구하는 삶이 요청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람된 인생을 사노라면 종종 실존적 좌절(Existential Frustration) 속에 빠져서 생의 의미 상실(마음의 병), 즉 실존적 공허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실존적 삶의 공허 함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선으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삶이 요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의 평정과 유한성에 맞는 책임성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거기에는 삶의 보람찬 의미가 내포되어서, 인간의 실존은 본질적으로 自我實現을 추구하게 되는데, 하지만 自我 實現에만 급급하다 보면, 자꾸만 빗나가는 삶을 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자기 초월(Self-Transcendence)의 삶이 요청하게 됩니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자기를 초월하는 신앙의 단계로 승화>되어야 하겠습니다. 인간 자신의 의로움이나 지혜를 초월해서 하나님을 경외 함이 허무한 인생을 근원적으로 극복하는 길이라고 사료 됩니다. 동시에 세상에는 이해하기 힘든 부조리함이 있지만, 그로 인해 탄식하지만 말고, 고통을 통한 신앙의 환희를 하나님께서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기쁨을 맛보며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절대 의존하는 믿음과 사랑으로, 삶을 통해서 향긋하게 바치며 살도록 합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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