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숨으신 하나님
(본문: 시편 88:1~18)
1). 서론: 본문의 시편은 우리에게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를 가르칩니다. 따라서 우리는 비록 이 길이 험난하고 전망이 어두워도 계속해서 이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어려움이 넘쳐날 때 본문의 글은 우리 매일의 표어로 삼을만합니다. 고난의 원인을 알지 못해도 이를 수록 우리는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운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신앙자의 삶은 건강하고 걱정이 없고 실패가 없는 삶은 아니지요. 성경은 의인의 삶은 고난과 죄와의 싸움의 삶이라고 말씀하고 있지요. 기독자는 인생에서 가장 암담한 날, 깊은 웅덩이와 황막한 광야 같은 곳을 지나지만,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기억하면서 삶을 영위하는 인생길이지요. 이것이 신앙자의 믿음인 것을 우리는 배우게 됩니다.
2). 본론(Text): 본문 시는 시편 중에도 가장 비참한 시로 지적되며, 욥기나 예레미야 애가와 비견이 됩니다. 중세대 교회에서는 수난일 저녁예배 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저작의 시기는 바벨론 포로기, 히스기야 시대, 욥기 시대, 등으로 추측되나 분명치는 않습니다. 일단 바벨론 포로기 시대라고 취해 둡니다. 또한 본문 시에 나타나는 "고통"에 대해서도 1.중병, 2. 문등병, 3. 또는 투옥 등으로 추측되고, 역시 분명치는 않으나, 중병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 내용은 1. 고통 중의 기도(1~9), 2. 실망의 기도(10~18)로 나늘 수 있습니다.
3). 본론(Context): 본문 시는 시편의 "탄식시"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고통을 알려주는 시의 하나입니다. 많은 주석가들이 지적하듯이 본문 시는 욥기에 나타난 욥의 고통에 견줄 수 있는 격심한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의 부르짖음입니다. 다른 "탄식시"에는 그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병고 때문인지, 원수들의 조롱과 핍박 때문인지, 또는 권력자의 횡포 때문인지를 밝혀주는 귀절들이 있지만, 본문 시에서는 시인의 고통의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귀절은 별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고통의 부르짖음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또 따른 "탄식시"에는 하나님의 구원을 의지하고 기다리는 표현도 있고 시인을 괴롭히는 자를 하나님이 벌하시기를 애원하는 말도 있고 또 그 고통의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이 있을 것을 기대하는 표현, 또한 그 고통을 감사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표현도 보이지만, 이 시에서는 이러한 귀절들을 거의 볼 수 없고, 다만 그의 심각한 고통에 대한 호소만이 전체 시에 흐르고 있습니다.
철저한 탄식, 철저한 고난의 호소입니다. 귀절마다 위기요, 귀절마다 숨이 넘어가는 위기의 표현입니다. 그는 "밤과 낮" 하루 종일 고통 속에서 부르짖고 있습니다.(1절) 재난은 그의 영혼에 가득하고 그의 생명은 무덤에 가까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3잘) 그는 스스로 무덤에 내려가는 자로 간주하고 있습니다.(4절) 아니, 내려가는 자가 아니라 "이미 살해를 당한 자와 같다."고 고백하며 "이미 무덤에 누워있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합니다.(5절) 전쟁터에 누인 시체같다고 합니다.
이 죽음의 상태는 인간 사회에서만 절연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과 그 관심에서도 이미 끊어진 자라고 생각합니다(5절). 그는 완전히 하나님과의 교제가 귾어진 이중의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를 어둡고 깊은 웅덩이에 던져버렸고 하나님의 진노의 물결에 휩쓸려 나올 수 없는 깊은 바다 속에 빠지고 말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다시 기억되지 않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5절). 하나님의 기억 밖에 나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모든 교제(交際)의 길이 단절된 것을 말합니다.(시 6: 5 ; 30: 9)
하나님과의 교제만이 아니라 인간 사회와의 접촉도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친구, 그의 아는 자, 그의 사랑하는 자 등 그의 주변에서 가장 동정하고 이 고난의 순간에 같이 해야 하고 위로의 말을 주고 그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어야 할 가까운 사람은 다 그를 떠나고 말았다고 합니다.(18절) 그들이 모두 이 수난자를 "역스런 물건과 같이 생각한다."라고 합니다. 이 '역스런 물건'은 "가증한 물건"으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극히 꺼리며 심히 미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신 7:26)
문둥병자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증한 물건"과 같이 취급을 받습니다.(민 12:12). 욥은 이 시인과 같이 친구들에게 가증한 것으로 취급받음에 대하여 호소하고 있습니다(욥 19:19~22). 문둥병자는 예배도 함께 드릴 수 없는 가증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과의 교제를 떠나 혼자 외롭게 버려진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레 13: 46 ; 대하 26:21), 이런 상태는 실제로 감옥에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본문의 시인이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다."(8절 하반)고 함은 이런 상태를 말합니다. 욥은 실제로 이런 경험을 했다고 말합니다(욥 31: 34). 본문의 시인은 자기의 고난상을 이렇게 표현하면서 하나님과 사람에게서 완전히 버림받고 모든 교제가 교제가 단절되어 감옥에 갇힌 자 같고 죽음에 누워있는 사람으로 되어버려 수난자 자신으로서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길은 단절되었지만, 혹시 하나님은 자기와 같은 죽은 자에게도 가까이 올 수 있지 않는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날마다 두 손을 들고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을 향하여 그의 두 손을 들었다."고 합니다.(9절). 그러나 그가 보려고 하는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는 고통으로 "눈마저 흐려졌다."고 합니다(9절).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에게로 오신다는 상상도 곧 단념하고 맙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산 사람의 하나님이지 죽어서 무덤에 누은 자의 하나님이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에게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시지도 않거니와 하신들 죽은 자가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겠느냐?"고 스스로 절망하고 맙니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죽은 혼백(魂魄)이 일어나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10절). 하나님이 아무리 사랑을 베푼다고 해도 무덤에 있는 자가 느낄 수도 없고 또 그 사랑을 받는다 해도 그것을 선포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이 아무리 그 성실한 마음을 보여주신다고 해도 무덤과 파멸에 처해 있는 자신이 깨달을 수도 없고 또한 그 성실을 깨달아 안들 어떻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릴 수 있을 것이냐고 의심스럽습니다.
무덤과 같은 흑암 중에는 하나님의 이적(異蹟)과 기사가 통하지 아니하며 사랑의 골짜기에 버림을 받고 있는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의 공의를 알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의 공정한 판단-악인을 악하다 하시고 의인을 의롭다 하시는-그 공의로운 선언도 죽음에 처한 사람에게는 있을 수도 없고, 있다고 해도 그 죽음에 처한 자가 자기의 의를 밝힐 수도 없다고 하겠습니다. 본문의 시인은 자기 수난의 고통과 외로움과 어두움과 절멍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 얼굴을 숨겨버린 것"이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 어디나 계시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숨어버리신다는 것은 시인에게는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표현입니다. 시편 22편 기자도 "왜 멀리 하시느냐?고 호소합니다(시22:1). 이렇게 하나님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이 수난자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이 소망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 빌고 있습니다. 주야로 빌고 (1절) 날마다 빌고(9절) 아침마다 빌고 있습니다(13절).
이 간구만이 고난 중에 있는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주의 진노와 주가 주시는 공포가 종일" 이 시인을 에워싸고 있으나(17절), 그러나 이 시인은 아침마다 날마다 주야로 하나님이 자기 애원을 들어주시기를 구합니다(2절). 그는 고난이 물러가게 해달라든가 그를 괴롭히는 원수를 물리쳐 달라는 기도를 하지 아니하고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 죽음에 처한 자기에게 나타나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 자기에게 나타나 하나님의 손이 자기에게 닿고 그의 기적이 일어나고, 그의 인자와 성실이 나타나서 그를 찬송할 수 있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간구의 심정도 "구원의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함"입니다. 이 시 전체에 흐르고 있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부르짖음은 그것이 "탄식"의 소리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는 신뢰의 고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이 시에서도 인간이 당하는 수난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의지심을 가지느냐 못가지느냐가 문제라는 것을 알려 줍니다.
이상과 같이 좀더 쉽게 풀이 해 보았습니다. 본문 시편 88편은 150편의 시편 중에서 가장 슬픈 시라고 여겨집니다. 혹자들은 부제를 붙여서, ‘단 한 줄기의 위로도 희망도 없는 시’, ‘고독과 고통에 둘러쌓여 있는 시’, ‘가장 절망적인 시’, ‘가장 어둠침침한 시’라고도 부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18절에 걸쳐 단 한 절도, 단 한 단어도 희망이라고는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 2절은 ‘부르짖음’이라는 단어를 반복하므로 기도라기보다는 마치 짐승의 울부짖음을 연상시키며, 갓 태어난 비틀거리는 새끼가 어미를 찾고 부르짖는 간절함이 느껴집니다. 이 시편에서 하나님의 응답은 전혀 없습니다. 도리어 시편 기자는 하나님과의 거리만 생기게 됩니다.
그의 영혼은 재난이 가득하며 스올에 가까이 가며(3절),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으로 주님이 빠뜨렸으며(6절), 주께서 친히 시인을 심히 누르고 괴롭히시며(7절) 심지어 친하게 지내며 마음을 나누는 자까지 멀리 떠나게 하시고 도리어 그들이 가증하게 여기게끔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8절). 이런 곤난으로 인하여 시인은 영적인 눈이 멀었고 완전한 항복을 표하는 마음으로 두 손을 듭니다.(9절). 이 고난의 시작은 아주 어릴 적부터였고(15절) 이로 인하여 그의 감정은 두렵고 당황하며(15절) 자신의 인생이 흑암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18절).
신앙의 과정과 믿음의 결과가 모두 좋게 진행되고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어려움과 연단을 주시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모른척 하시며 침묵하시는 때도 있습니다. 아무리 간절히 기도하고 구해도 숨으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끈을 끝까지 붙들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입니까? 기도이지요. 시인은 하나님께만 부르짖습니다. 응답하시지 않아도 환경을 변화시켜 주시지 않아도 하나님과의 관계의 끈인 기도만은 놓치 않습니다. 또한 그는 아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칠흙같은 흑암 가운데와 같은 인생의 길을 걷고 있지만 어둠이 짙을수록 날이 밝아올 것을 기다리는 파수꾼처럼 시인은 아침을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 흑암의 배경을 두셨지만, 흑암으로 끝내시지 않을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침을 기다립니다.
이런 가장 슬픈 시를 애절하게 찬양한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 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며 절규하신 분이 예수님이었지요. 완전한 버림을 받은 자, 그 분이 십자가를 지신 우리 예수님이셨지요! 구약에는 고라자손이 이 시편을 불렀다면,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이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그 다음 차례는 누구일까요? 바로 우리 자신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철저한 버림과 외면을 당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가신 예수님처럼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인내와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4). 결론: 시편 중에서 탄원시는 자신의 힘든 상황을 호소하다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반전하여, “하나님! 하나님만이 나의 소망입니다. 이제 든든하신 하나님만 바라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찬양과 간구로 끝을 맺지만, 본문 시편 88편은 고통의 상황을 탄원으로 시작해 계속되는 고통을 탄원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날 저녁 예배 때에 읽었을 정도로 처절한 상황을 노래한 88편이지만, 먼저 "하나님이여" 하고 외쳤던 시인을 통해 깊은 깨달음을 갖게 되니 감사한 마음 그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가장 침울한 시편을 마주 대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편을 요약해주는 세 단어는 아마도 우울함, 절망, 죽음일 것입니다. 하지만 울적한 분위기 속에서도 우리는 이 시편에서 나타난 생명의 체험이 커다란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문제들은 양탄자 아래에 깔려 있지는 않습니다. 즉 우리는 인생의 밝고 유쾌한 면만을 보면서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인생의 어려움들에 대해서 시편 본문 기자는 하나님을 신뢰함이 보험증서가 된다고 말해주는데, 우리는 그와 같은 은혜에 감사치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시대의 불확실성과 문제들 속에서 도움과 위로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편은 우리에게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를 가르칩니다. 따라서 우리는 비록 이 길이 험난하고 전망이 어두워도 계속해서 이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어려움이 넘쳐날 때 본문의 글은 우리의 매일의 표어로 삼을만합니다. 고난의 원인을 알지 못해도 이를수록 우리는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운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겠습니다. 본문 시의 배경은 병으로 큰 어려움을 당하고, 거의 임종에 가까운 시인이 치명적인 질병 가운데 부르는 외로운 사람의 슬픈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역사에서 보면 시편 88편은 고난 주간의 금요일에 읽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88편이 묘사하는 고통의 상황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완전한 버림을 경험하셨고,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하는 단절의 경험을 십자가 위에서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이들은 이 시편의 기도가 예수님의 기도라고 하기도 하고, 또는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다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성경 원래 문맥에서는 예수님의 기도도 아니고, 예수님에 대한 예언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모든 구약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촛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 시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시입니다. 슬픔의 노래입니다. 전혀 소망이 보이지 않는 그런 시 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버리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마스길'(교훈)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는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다는 기독 신자의 믿음에 관한 교훈이라고 하겠습니다.
*(본문을 마무리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 " 하나님은 전능자이시게 처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아푸지 않게 해 달라고 하는 데, 왜 그 고난의 하소연을 외면하고 <숨어버린 하나님>이신지 알 수가 없습니다. 본문의 시인이 극악 무도한 죄를 지어도, "사랑의 하나님이시요, 능력의 하나님이시요, 그처럼 처절히 잘못을 뉘우치는는 자를 이렇게 될대로 되라!"고 던져 버리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구태여 하나님께서 "숨으신" 그 이유를 살펴 본다면, 초대교회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날 저녁 예배 시(고난 주간의 금요일)에 읽었을 정도로 처절한 고통의 상황을 묘사한 88편 시 내용이기에, 신약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의 절규와 아픔을 연상해 볼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이해가 갑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하실 때, 등을 돌려 얹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힉자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The Crucified God)이란 저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울 수도 없고, 고통 할 수도 없는 무감정한 하나님이라면, 이는 하나님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절규할때, '아들'과 같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시란 것입니다. 그러니 '숨으신 하나님'은 신약의 그리스도를 예시해 주면서, 시인(인생의 대표)의 고뇌와 고통을 같이 아파하시는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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