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구약설교마당

3. 하나님의 침묵

solomong 2024. 11. 4. 10:41
 

3. 하나님의 침묵

(본문: 시 28:1-9)

 

1). 서론 : “침묵은 금이요 웅변은 은이다.”라는 말을 처음으로 그리스의 정치가이며 웅변가였던 데모스테네스(Demostthenes)가 말했다고 합니다만, 본문의 시인은 하나님을 향해서 “침묵은 은이요, 웅변은 금이다.”라고 생각하오니 하나님께서는 엄숙한 말씀을 하셔야만 세상의 질서가 바로 세워진다고 호소했던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보기에는 침묵하시지만, 하나님께서는 고난 속에 헤매는 우리들의 아픔을 마음으로 아파하시면서 어떤 처리를 해야 할 것인지를 장고(長考) 중에 계시는 분입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말씀’이시며,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끝까지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므로, 참고 인종 중에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게 도와주는 은혜로운 시간이며, 영적으로 자립심을 키워주는 시공이니 낙심치 말고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묵중한 입을 여시고 예리한 판단으로 엄숙한 웅변을 토하시는 분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침묵 중에는 기도 외에는 우리의 이목구비(耳目口鼻)가 조용히 침묵해야 하는 때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2). 본문의 이해 (Text) : 본문 시는 내용상 27편의 연속이며, 압살롬 반란 때의 작품으로, 환란 중에서의 하나님께 간절한 호소(1-5)와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응답 되었다는 감사(6-9)로 양분되어 있습니다.

 

3). 본론 (Context) : 만약에 “하나님께서 침묵을 지키신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께서 시시비비를 가려주지 않으신다.”라는 종류의 가정이 용납된다면, 세상에는 억울한 일이 너무 많아 울고 괴로워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묵묵히 침묵하신다는 것은 세상의 위법한 질서를 묵과하신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선악 간에 아무런 반응이 없이 잠잠히 계신다면 그 횡포와 불법을 그대로 내버려 둔다는 뜻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다고 함은 인간의 의사에 세상을 내맡겨 온갖 인간의 모순과 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두신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침묵을 지키신다는 말은 심판하는 기능을 정지시키며, 공의의 선언을 보류하시고 하나님의 역사 간섭을 단념하신다는 뜻이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세상이 되면 세상에서 양심대로 사는 자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성실하고 진실한 사람처럼 바보가 없을 것이며, 세상에서 악의 권력과 그 질서를 용인하고 마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많은 억울한 사람이 매를 맞고 옥에 감금되고 손해를 보고, 핍박을 받아도 보호받을 데가 없고 약탈을 당해도 호소할 데가 없게 될 것입니다. 이리하여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문자 그대로 암흑세계가 될 것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적중하고 말 것입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가 있으리로다.”(사 5:20)

 

본문 시 28편의 시인은 이러한 화 받을 일이 자기가 사는 세상에는 있을 수 없다고 하여 하나님께 호소한 것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습니다. (1절) 본문의 시인은 하나님의 침묵은 곧 자기에게는 죽음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기를 죽음의 장소로 내려보내지 말기를 애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태는 하나님이 침묵을 지키면 자기는 죽을 수밖에 없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남을 해치기를 즐기는 사람과 거짓과 음모를 꾸며 자신의 이익만 도모하는 이런 악한 자들과 자기를 같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미 자기를 그렇게 취급했다고 해도 하나님만은 자기를 그렇게 악인과 같은 놈으로 돌리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있습니다. 이 악인들의 사악한 면은 그들의 말과 행동이 다른 이중인격을 가진 것이라고 합니다. 입으로는 평화를 말하지만, 그 마음에는 상대방을 넘어뜨리는 계교를 꾸미는 자라고 했습니다. (3절)

 

이런 이중인격의 소유자들을 상대해 보았자 선한 사람은 항상 실패를 보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더 험악한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이런 악한 자를 상대하는 길은 하나님 자신이 이 악인들에게 그들의 악에 따라서 갚아주는 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저희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 대로 갚으시며 저희 손이 지은 대로 갚아 그들이 마땅히 받을 벌로서 그들에게 갚으소서”(4절) 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무죄한 자의 고통을 없이해 주고 악을 행하고도 무사한 그 사람들을 벌하는 것입니다.

 

이 사상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옛날부터 가지고 있었던 인과응보 사상이었습니다. 욥기는 이 사상을 극복하려고 시도했지만, 시편의 시인들은 이 전통적인 사상을 그대로 자기 신앙에 반영시키고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은 그 의로 복을 받고 악인은 그 악의 보응(報應)으로 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시인도 그런 사상에서 행악자가 벌을 받도록 하나님께 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상대로 되어 있지 아니한 모순된 사례를 많이 보지만, 깊은 철학적인 사고를 하지 않는 일반적인 시인은 대체로 인과응보 사상을 당연지사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또 그렇게 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탓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정의 행사는 악을 행한 자는 그 악업의 報應을 받아 멸망하는 것입니다. 5절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하지 아니하리라.”라고 한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벌을 말한 것입니다. 악인들이 근본적으로 잘못하게 된 이유는 그들 마음속에 있는 이기심이나 잔인성이나 허위성 때문만이 아니고, 그들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에 관한 관심이 없는 경건치 못함과 비신앙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악행을 심판하실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저들이 알아야 하고 또한 하나님은 자기 손으로 만물을 지으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역사, 개인의 생활까지 간섭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악인들은 그 생각을 못 한다는 것입니다.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시는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한다.”(5절) 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무신론적인 생각, 하나님에 대한 무감각과 항거하는 태도가 이 사람들을 악인으로 만드는 근본적인 이유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시인은 이러한 사회 모순에 대한 고민과 자기 자신의 수난을 자기의 의지 신앙으로 훌륭히 극복하고 있음을 본문 6~9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도다.”(7절) 라고 했습니다. 이런 구원에 대한 확신은 여호와가 그의 “힘”, 그의 “방패”, “구원의 산성이 시로다.”(7, 8절) 라는 것과 그의 애원을 들으시고, 그를 양을 치는 목자처럼(9절) 되시고 그의 하는 일에 복 주실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찬송하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실존 자체가 <말씀(로고스)> 시며 (요 1:1), 예수님은 말씀의 씨이신 아들이며, 성령은 말씀의 능력 실행자로서, 우리는 이를 성 삼위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온 우주를 섭리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지존하시고, 능력자이시며, 따스한 사랑과 지엄하신 정의의 하나님이 십니다. 전능자 하나님이시기에 때로는 근엄하게 묵묵히 침묵하실 때도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반영되는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하나님일지 몰라도, 하나님 당신 자신은 깊은 장고(長考) 속에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을 가볍게 여겨서 버릇없는 언행은 삼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탄원과 호소의 기도를 드려도 아무런 응답이 없이 묵묵하시면, 하나님께서 침묵 중에 심도 있는 사념에 잠겨 계시는 하나님으로 알고, 이럴 때 우리도 깊은 침묵으로 참고 견디는 시공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진실로 인종하는 침묵 이후에는, 하나님께서는 묵중한 침묵의 문을 여시고, 근엄하신 웅변으로 선악을 판단하시어 은혜와 징벌로서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쓸데없는 말을 삼가는 혀의 침묵, 타인의 약점 찾는 버릇을 멈추는 눈의 침묵, 험담과 얄궂은 소문의 소리를 실어나르는 귀의 침묵, 이기심, 미움, 질투, 탐욕을 피하는 마음의 침묵 및 거짓됨과 파괴적인 생각, 의심과 복수심을 차단하는 지성의 침묵을 지키도록 늘 경성 해야 하겠습니다. 다시금 환언(換言)하면, 좀 더 유익하고 정화된 말을 하기 위해 우리는 자주 침묵이라는 우물 속을 들어가 마음을 행구(씻는다는 말) 는 노력을 하자는 것입니다. 오만과 독선으로 경직된 차가운 침묵이 아니라, 사랑과 겸손을 바탕으로 한 따스한 침묵의 주인공이 되자는 것입니다.

 

4). 결론: 본문 시 28편의 시인은 악인들에게 화 받을 일이 자기가 사는 세상에는 있을 수 없다고 하여 하나님께 탄원과 호소를 구하면서,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면 자기에게는 죽음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을 해치기를 즐기는 사람과 거짓과 음모를 꾸며 자신의 이익만 도모하는 이런 악한 자들과 자기를 같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속 침묵하신다면, 이 세상에는 억울한 일이 너무 많아 울고 괴로워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며, 세상은 무법천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악인들의 사악한 면은 그들의 말과 행동이 다른 이중인격을 가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이런 악한 자를 상대하는 길은 하나님 자신이 이 악인들에게 그들의 악에 따라서 갚아주는 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무죄한 자의 고통을 없이해 주고 악을 행하고도 무사한 그 사람들을 벌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옛날부터 가지고 있었던 인과응보의 사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시인은 이러한 사회적 모순에 대한 고민과 자기 자신의 수난을 자기의 의지 신앙으로 훌륭히 극복하고 있음을 본문 6~9절에서 밝히면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차서 찬송하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실존 자체가 <말씀>이시며, 성 삼위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계속해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때로는 근엄하게 묵묵히 침묵하실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간곡한 기도를 드려도 묵묵부답하시지만, 사실은 우리의 정황을 다 아시고, 깊은 장고(長考) 속에서 심도 있는 사념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가볍게 여기고 버릇없는 언행은 삼가면서, 우리도 기도 외에는 인종(忍從)하는 침묵의 시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인종하는 침묵 이후에는, 하나님께서는 묵중한 침묵의 문을 여시고, 엄숙한 웅변으로 선악을 판단하시어 은혜와 징벌로서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좀 더 유익하고 정화된 말을 하기 위해 우리는 자주 침묵이라는 우물 속을 들어가 마음을 행구(씻는다는 말) 는 노력을 하자는 것입니다. 오만과 독선으로 경직된 차가운 침묵이 아니라, 사랑과 겸손을 바탕으로 한 따스함과 참고 기다리는 침묵의 주인공이 되자는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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