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성서 말씀 명상]: 기쁨의 새로운 의미
-즐거움과 기쁨은 전혀 다른 의미-
폴 틸릭히(P. Tillich)는 그의 저서 <존재의 용기>(courage to be)에서 기쁨(Joy)과 즐거움(Pleasure)을 구별해서 말했습니다. 도둑이 남의 물건을 왕창 훔쳐서 돈을 물 쓰듯 해도 한 때 '즐거움'은 있을지 몰라도, 그 삶 속에 참 '기쁨'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기쁨은 슬픔에 반대되는 개념(槪念)입니다. 또한 슬픔(Sorrow)은 고통(Pain, Suffering)과 구별됩니다. 슬픔은 존재의 핵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관계가 단절된 것으로 오는 슬픔은 관계가 회복될 때에만 슬픔이 해소됩니다. 전사(戰死)한 남편의 장례식에 아무리 훈장을 달아주어도 슬픔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단지 죽은 남편이 살아 날 때 슬픔이 해소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통스럽고 손해를 보아도 그 속에서 기쁨은 맛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에게 삶의 의미를 두고 있는 어머니에게는 비록 고통스러워도 자식이 존재하는 한,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사도 바울은 로마 옥중에서 옥고를 치루고 있는 중에도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향해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고 했습니다. 삶이란 결코 기쁨의 연속일 수 없는 엄숙한 현실이기에, 고통 중에도 신앙 속에서 참 기쁨을 맛보란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일생을 통해서 기쁨보다 오히려 고통이나 고뇌를 더 많이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로마 옥중에서 죄수의 몸으로 고통 속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는 불치의 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서 "내 육체의 가시, 이것이 떠나기 위해 3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주께서 답하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하시기로 나는 오히려 자랑하게 되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기쁨이나 감사의 가치관은 세상의 그것과 다릅니다. 기독교는 눈물을 흘리면서 씨를 뿌리고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종교입니다.(시 126:5~6) 그러기에 기독교의 기쁨은 역설적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할 때 고통이 동반하고 아픔이 전제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현대인은 생을 '즐긴다'(Pleasure)다는 말을 쓰고, 행복의 기준도 '즐거움'에 있습니다. 즐거움은 곧 행복이란 등식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틀(Aristotle)은 행복을 최고선(最高善)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인생의 모든 것은 행복을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의미입니다.
에피큐리안 학파는 감각적 육체적 쾌락을 인생의 진리요, 참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이런 논리가 그냥 그대로 전개된다면, 사랑도, 우정도, 행복을 위한 하나의 기교(테크닉)에 불과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거기에는 참 사랑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가 문제가 되지 않고, 고마움이나 감사가 있을 수 없고,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행복할 수 있느냐가 궁극의 목적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참 기쁨은 사랑하는 대상에게 더 주고 싶고, 손해를 보아도 감격하는 것이 우리가 느끼는 기쁨이 아니었습니까! 사랑하는 자녀를 위한 부모의 희생, 진정한 연인 간의 사랑의 관계는 이와 같은 것입니다. 만약 이 말이 틀렸다면, 사랑하는 대상도 자기중심적인 행복을 충족키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사랑이니, 순정이니, 우정이니 하는 것은 이용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기에 현대인의 고민이 있고, 현대 교육의 고민이 있습니다. 신앙도, 감사도 조건부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니 감사하다는 것은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신앙은 인격과 인격이 부딪쳐서 나오는 것이지 인격과 물건(I-It)의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어떻게 기뻐하고 감사할 것인가?
첫째 고난과 근심을 그대로(사실대로) 받아들일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그 사실을 분석하고, 만약 실패할 경우 최악을 받아들일 각오를 하자는 것입니다. 그 끝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마음의 기쁨은 최악의 불운(不運)까지도 받아들일 각오를 하는데 있습니다.
둘째 적어도 그것이 주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이상 비난과 조소에도 개의치 않으며 염려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1929년 미국의 시카고 교육계에 일대 '센세이션'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예일대학교 급사, 가정교사, 판매원 등을 거쳐 고학한 로버트 헛긴스이 30세 나이에 미국에서 네 번째로 크고 유명한 시카고대학의 총장이 된 사건이었습니다.
"애송이 천재, 젊고 교육 이념이 삐뚤어졌다."는 비난의 화살이 난무했습니다. 그 때 그의 아버지는 '아무도 죽은 개를 차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아들을 격려하면서, "부당한 비난 속에 위장된 칭찬이 있는 것을 잊지 마오."라는 말로 격려했다고 합니다. 그 후 사람들의 비난은 사라지고 그는 유명한 총장이자 교육학자로 남게 되었습니다.
셋째 자신에게 만족하면서 몰두하라는 것입니다. 근심·걱정은 우리가 행동할 때보다 한가할 때에 밀어닥칩니다. 한가한 때 공상이 시작되고, 마귀가 알을 까기도 합니다. 자기 일에 의미를 가지고 몰두하라는 것입니다.
기쁨의 새로운 의미는 고뇌를 통한 기쁨(joy)이요, 최악의 불운까지도 받아들일 각오 속에서 오는 기쁨이요, 주님의 뜻 때문에 비난도 개의치 않는 데서 오는 기쁨이요, 의미 있는 일에 자신을 침잠시키는 데서 오는 기쁨이 참 기쁨인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참 기쁨의 삶을 살도록 해야겠습니다. 끝.
2005. 10. 4.
산밑연구소 소장: 양 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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