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박물관열람실(72)

72. 맏딸 愛敬 이야기-<맏딸의 화상>

solomong 2026. 2. 11. 11:06

 

72. 맏딸 愛敬 이야기-<맏딸의 화상>

5월은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21일)로, <가정의 달>이라고 매스컴이 떠들썩하게 야단이다. “부모 살아생전에 「효」를 다 해야지, 돌아가신 뒤엔 후회해 보았자 소용이 없다.”라고 일상적으로 하는 말을 되풀이 한다. 나는 이날을 맞이하여 자녀들에게 효를 바라기전, 내가 자녀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먼저 반성하는 날이 되었으면 한다. 자녀들에게 효를 받자면, 평소 내가 부모에게 어떻게 효를 했는가의 따라서 자녀들도 부모에게 어떻게 효하는가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녀들은 부모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어떻게 하는지, ‘본대로, 느낀 대로, 행동 하는 대로’ 그대로 본받아 자녀들이 우리 내외에게 어떻게 효하는지의 ‘잣대’(Canon)가 된다고 생각한다. 맏딸과 장남 그리고 막내 딸이 결혼을 해서 이제 저들도 자녀를 낳아 키우니 부모의 심정을 이해하리라고 본다. 저들도 자녀들에게 효를 받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잣대’가 부모에게 어떻게 하느냐의 따라 저들도 자녀들에게 효를 받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린 것을 경험에서 알 수 있으리라고 본다.

부모에게 한 만큼, 그 만큼 그들의 자녀들로부터 효를 받게 된다. 흔히들 사랑은 내리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사랑을 베풀면, 자녀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또한 사랑을 베풀게 된다. 내가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을, 나는 또 자녀들에게 사랑을 주고, 그 사랑을 받은 자녀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주게 된다. 이 세상에서 부모만큼 순수하고 희생적인 사랑이 다시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희생적인 사랑을 베풀면, 그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베풀면서, 비로소 부모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된다고 나는 믿고 있다.

특히 어버이날에 내가 자녀들에게 어떻게 했는가를 반성하면서, 지난날의 가슴 아프고 잊을 수 없는 이야기를 좀 해 볼까 한다. 내가 20대 후반 전도사 시절에 교회에서 부흥집회를 가지게 되었다. 부흥집회란 본 교회 목사가 아닌 타 교회 목사 중에서 인격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특별히 이름난 분을 모셔서, 그의 신앙 간증적인 설교와 성경해석을 듣고, 배워 교인들이 신앙의 새로운 다짐을 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 장로교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을 때 두 가지의 ‘메시지’를 듣게 된다. 즉 미국의 프린스턴 신학교의 설교학 교수인 스위지 박사는 “첫째는 성서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둘째는 그 성서 말씀을 전달하는 자(주로 목사)의 인격의 말을 듣는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고매하신 목사님을 뫼시고 부흥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 강사 목사의 숙소를 나의 사택 건너 방에 뫼시게 되었다. 옛날 담임 목사의 사택인지라 꽤 잘 지은 사택이라 아마 교회에서 그렇게 정한 모양이다. 나는 자연히 내가 사는 사택에 강사를 뫼시게 되었으니 자연히 손님 강사 목사의 잔심부름을 정성껏 하려고 온 신경을 쏟게 되었다. 아내는 교회 여신도들과 더불어 강사 식사 대접에 정신을 쏟고 있었다.

그런데 부흥회 첫날 저녁에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아마 그때 우리 집 맏딸이 4살 쯤 되었다.(1965년) 이제 한창 말을 배워 여간 재롱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우리 내외가 교회 행사에 정신을 쏟다보니 자연히 어린 딸의 편에서 보면, 부모의 ‘보살핌’이 덜 가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부흥 강사께서 저녁상을 물리고 나니, 아내와 식사를 돕는 신도들은 빨리 저녁을 먹고 설거지하느라고 분주했다. 나는 강사 방에서 부흥회 첫 시간을 위해서 도우고 있는 중에 있었다.

평상시엔 우리 세 식구가 저녁을 먹을 때 쯤 되었다. 그런데 우리 내외는 손님 대접에 정신을 쏟다보니 딸에게 쏟을 사랑의 보살핌이 소홀하게 되었다. 우리 사택 안방에는 부엌과 통하는 조그마한 문이 있었다.(보통 때는 우리 내외는 늘 이 문을 잠그어 두었다. 왜냐하면 문을 열면 부뚜막이 시멘트로 만들어 졌고, 또 깊어서 넘어지면 다칠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분주한 날에 그만 그 문을 잠그어 두는 것을 잊어버렸다. 딸은 부엌에서 엄마 소리가 들리니까, 밥 먹을 시간인데 밥을 주지 않으니, “엄마! 배고프다. 밥 주세요!”하면서 그 문을 밀다가 문이 열리는 바람에 아래로 넘어졌다.

그런데 넘어진 그 부뚜막 위에는 어느 교인이 저녁밥을 먹지 못했다면서 큰 냄비에 된장찌개와 여러 가지 반찬을 놓고 저녁을 먹고 있었다. 우리 재롱둥이 맏딸은 그만 그 큰 냄비의 끓는 된장찌개에 얼 굴 전체가 빠졌으니, 그 결과는 독자들의 상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글을 쓰니 눈물이 나와서 더 쓸 수가 없다.(벌써 근6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쏟아지는 눈물을 억제하고, 학교 연구실에서 필을 놓고 집으로 달려갔다. 전화기 앞에서 혼자 마음껏 울었다.

이러는 중에 전화벨이 울리었다.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는 막내 딸이 어버이 날이라고 전화를 한 것이다. 나는 울먹이면서 사유를 잘 모르는 막내 딸에게 이야기를 하고, 언니가 너를 업어 키웠다. 그러니 언니에게 잘 하란 뜻을 전하고 저도 울먹이는 듯해서 그만 전화를 놓았다. 간신히 감정을 억제하고 큰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지난날의 부모가 실수해서 너의 근60 여 년 간의 괴로운 고통에 대해서 한 번도 너에게 용서를 구한 적이 없었다.

또 울음이 나와서 울면서 딸에게 사과를 했다. 그도 울었다. “아버지 그만 진정하세요! 그래도 시집 잘 와서 이렇게 목사 부인되어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하면서 말끝이 흐려진다. 이렇게 근60 여년 만에 부녀가 전화로 어버이날에 흉금을 터놓고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하는 ‘참 만남’의 대화를 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오랜 체증이 내려가는 듯한 시원함을 느끼었다.(다음의 글은 그 다음날에 쓴 것이다.)

나는 근60 년 전의 사건을 딸에게 사과를 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딸도 60 여 년간 가슴속에 부모에 대한 원망스런 감정의 찌꺼기들이 정화되는 듯 했다. 현재 외손자 眞旭(예술분야)과 외손녀 眞英(연세대 졸), 일남 일녀를 두어 보람되게 잘 사는 것이 그저 흐뭇하기만 하다. 그 때 참상을 좀 더 기술코자 한다. 그 끓는 된장찌개에 딸의 얼굴이 빠져서, 응급으로 가까운 병원에 가서 임시 치료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얼굴과 머리를 붕대로 감았는데, 평소보다 2배 이상 얼굴이 크게 보였다. 딸의 얼굴은 눈도 입도 분간 할 수 없을 정도로 퉁퉁 부어 있었다. 특히 그때 목까지 오는 샤쓰를 입어서 그 셔츠에 뜨거운 된장찌개가 묻어서 목이 제일 많이 화상(3도 화상?)을 입었다.(그때 웃옷을 빨리 벗겼으면 목이 그렇게 상하지 않았을 터인데......) 밤새도록 그 어린 것이 아파서 계속 울기만 했다.

우리 내외도 그 밤을 한숨도 자지 못하고 꼬박 세웠다. 너무나 긴 밤이었다. 그 이튼 날 아침에 동산병원에 입원을 하여 전기불로 상처 부분을 말리게 하는 치료를 하였다. 이렇게 하여 2달 넘는 입원생활을 했다. 퇴원 할 때는 그래도 딸의 얼굴 부분은 살결이 한 꺼풀 벗겨져서 별 흠이 없었다. 하지만 목 부분은 보기가 좀 흉했다. 부흥회는 이 사건으로 좀 어수선 한 중에 끝났고, 그 후 아내는 또 그 여파로 맹장 수술을 했다. 얼마 후 딸의 얼굴과 머리는 씻은 듯이 잘 치료가 되었다. 그래도 그만 한 것이 감사한 일이었다.

딸은 초등학교, 중학교, 다니면서 별스런 말이 없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진학하고서부터(사춘기 시절) 보기에 늘 우울한 것 같았다. 딸은 평소에 말이 별로 없었다. 일단 화가 나면 대단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정신적 외상이라고 한다.(Traumatic Event) 그러면서 딸은 열등감을 느끼는 듯 했다. 하기야 보통 사람도 사춘기엔 다 겪는 자아의식(Self-Identity)의 탄생으로 고민하는 때인데, 딸은 목 화상으로 더 심각한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예비 숙녀가 되었으니, 딸도 자기 장래 문제로 많이 고민 하는 것 같았다.

그럴 때는 더 크면 성형수술하면 좋아진다고 하면서 우리 내외는 그를 위로하면서 키웠다. 그러나 여름엔 더운데도 목까지 오는 옷을 입었고(화상 부분을 감추려고), 겨울엔 목 띠를 두르고 다녔다. 이런 모습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그의 내적 고통을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었지만, 당장 그의 고민을 해소 해 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딸도 지루하고 긴 자기투쟁의 나날들이란 것을 스스로 인식하면서 인종의 세월을 잘 참고 살아갔다. 부모 된 심정으로는 그저 고맙기만 했다. 이런 긴 고통의 세월이 지나갔다. 드디어 대학 졸업 후 2번이나 성형 수술을 받고, 그래도 얼핏 보기엔 모를 정도로 좋아졌다. 그러나 근60여년이 넘도록 딸의 화상은 우리 내외의 가슴엔 지워지지 않았다. 부모의 가슴속에 각인된 마음의 화상은 영원히 수술 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으니, 이것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인지 죄책감인지 모를 일이다.

한 순간의 부모의 ‘보살핌’이 결여로 말미암아 자녀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당케 한 것에 대한 근60 년 만에 좀 가벼워진 어버이 날이었다. 그는 지금 목사 부인되어 보람되게 살면서 두 자녀를 너무나 철저한 ‘보살핌’(자기의 전철을 밟게 하지 않기 위해서)속에 양육을 하고 있다. 또 이를 보는 우리 내외는 외손들을 지나친 과잉보호의 부작용이 있지나 않을까 또 걱정을 하고 있다. 고뇌를 통한 신앙의 환희를 우리 맏 딸은 아는 것 같다.

나는 이날에 둘째인 장남과 막내 딸에게 “너희 누나, 언니가 너희들을 업어서 키웠다.”고 하면서 늘 부모처럼 생각하라고, 나는 유언처럼 신신 부탁을 이들에게 했다. 금년 ‘어버이 날’은 자녀들에게 「효」를 받기보담, 우리 두 내외가 특히 맏 딸에게 해 묵은 감정의 찌꺼기들을 해소키 위한 ‘눈물 뿌리며 사죄한 날’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