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박물관열람실(72)

73. <성서 말씀 명상>: 호통치는 광야의 소리

solomong 2026. 2. 25. 10:27

73. ​<성서 말씀 명상>: 호통치는 광야의 소리

(마 3:1~12)

-평범한 사랑 실천이 복음-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전통 사회에서는 아무도 '나'를 주장하기 위해서 '우리'의 권위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나'는 '우리'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집단적 화해(和解) 체제가 지배했습니다. 그곳에는 하나의 공동체 문화가 존재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전통 사회의 특징은 와해(瓦解)가 아니고 통합(integration)이었습니다. 동네마다 농사철이 되면 서로간 '품앗이'로 흐뭇한 정감을 서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새참'을 먹을 때는 지나는 나그네를 손짓해서 요기를 같이 하는 정겨운 사랑이 있었습니다.

어느 집의 혼인 잔치는 나의 집의 경사요, 누구 집의 슬픔은 나의 집의 슬픔으로 같이 울고 더불어 장례를 치르곤 하였습니다. 이것은 어떤 조직체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동네마다 어른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 어른의 뜻에 의해 질서가 불문규율로 세워져 갔습니다. 어른의 호통 한마디로 기꺼이 순종하고, 불평없이 달게 벌을 받곤 했습니다.

그만큼 동네 어른은 삶에서 사람들의 모범이었습니다. 만약에 그 동네에서 뜻하지 않게도 '나'란 이익을 앞세우거나, 부모에게 불효하거나, 이단자가 생기면 동네 어른은 엄하게 꾸중을 하거나, 적당한 벌을 가했습니다. 만약 어떤 망나니가 있어서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다고 할때, 그 동네에서 추방하는 것이 우리의 전통사회였습니다.

오늘의 변동사회(현대사회) 환경은 사회 구조를 '원자화'하였습니다. 따라서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공동체 의식과 소속감을 잃어버렸습니다. 사실상 공동체 의식과 소속감은 자아완성의 불가피한 조건입니다. 개인의 불안감과 강박관념은 공동체 의식을 못가진 원자화 현상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없어지고, 전부 나밖에 모르게 되었습니다. 정부 고위 관료도 우리가 아닌 나를 앞세우기 급급하다가 땅투기를 하여 수치스런 낙향을 합니다.

이 모두가 우리 사회의 참다운 어른인 세례 요한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기보다, 요한의 흉내조차 내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찌해서 세례 요한은 그처럼 담대히 호통을 칠 수 있었고, 유대 동네 사람들이 그 요한의 그 권위에 순복할 수 있었는지를 명상해 봅시다.

유대사회 마을에도 종교 지도자들이 그 사회 질서를 모세 율법에 의해 세워 나갔습니다. 그러나 지도층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은 사회에서 스스로는 어른 구실을 한다고 했지만, 그 사회 마을 사람들에게 본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 사회 지도층이라고 하는 제사장과 사두개인이라고 하는 그들의 삶이 겉 다르고 속다른 위선자들이었으며, 세상 권력과 야합하고 지극히 현실주의자로 살아왔습니다.

이른바 종교 지도자들은 비인간적 삶을 살아왔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하듯이, 유대사회 사람들도 이중인격적인 위선자가 되어서 남모르는 곳에서는 죄를 짓고, 이런 삶의 전통은 이어져 곪을대로 곪아 터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나마 예언자라도 있었으면 경고라도 하고 질타라도 했을 것입니다만,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여년간 예언자의 음성이 없었습니다.

이럴 때, 요단강 하류 지역의 유대 여리고 동네 서북쪽의 광야에 이상한 청년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요한은 이름 있는 가문에서 태어날 때부터 성령이 충만했고, 자기 통제를 잘 할 수 있어서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않았고, 성장할수록 영육이 강건하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 즉 공중(公衆) 앞에 나타나는 날까지 광야에서 영혼·정신·육체의 수련과 단련을 하였습니다(눅 1:15).

그의 의식주 생활은 옷이라곤 약대털 옷을 입었고, 구약성서에서는 털옷은 예언자의 의복이었다고 합니다(왕하 1:8). 그는 약대털옷과 가죽띠로 몸을 단장했습니다. 식사는 메뚜기와 석청이었습니다. 메뚜기는 모세 율법에도 특히 먹을 수 있게 규정되었고(레 11:22), 석청은 야성의 꿀이었습니다.

광야는 그의 집이었습니다. 유대 기후는 낮은 열대지역과 같고, 밤은 온대지역의 가을 밤과 같아서 춥습니다. 그래서 외투는 밤에 덮는 이불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일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바벨론 포로민이 돌아올 때, 저희 하나님이 같이 돌아오시고, 그의 선구자가 먼저 달려와 하나님을 위해 길을 예비하라고 외친 것처럼, 세례 요한은 죄의 포로가 된 유대 민족을 포함해서 인류를 해방시키기 위해 오시는 메시아의 선구자로 그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외친 것입니다.

외치는 주제는 '회개하라 천국이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일반 평민들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한에게 스스로 와서 죄 사함 받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바리새인을 위시한 소위 유대 사회의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자들을 상대해서 외치기를,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고 내리 호통을 쳤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맺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조상 족보만 자랑한다고 해서 죄사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야단을 칩니다. 그러면서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고 하면서, 의문에 속한 것이나, 위선적이고 진실하지 못한 그들은 심판을 면치 못한다며 호통을 쳤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목소리로 유대 광야에 이를테면, 유대 사회의 호통치는 어른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400년간 예언자 목소리가 그쳐졌다고 탄식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요한에게서 예언자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특색은 악을 보는대로 무섭게 탄핵을 했습니다.

그때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사두개인들)에게 거침없이 그들의 외식주의(형식주의)를 질타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에게도 귀아픈 경고를 서슴치 않았습니다. 그는 햇빛처럼 어두운 구석을 비췄으며, 광풍처럼 온 땅을 휩쓸었습니다. "진리는 아픈 눈에 비치는 햇빛같다. 누구의 감정도 상하지 않게 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좋은 일을 한 것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희랍의 디오게네스는 말했습니다.

그는 대낮에 등불을 켜고 다니면서 옳은 사람을 찾는다고 한 철인이었습니다. 요한은 자기를 초월한 사람이었습니다.(self-transcendence). 그래서 그는 악을 폭로하고 죄를 꾸짖을 뿐 아니라, 메시아의 길을 예비했습니다. 그가 닦은 길은 왕의 길, 메시아의 길이었습니다. 그는 완전히 자기를 하나님께 봉헌한 겸허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자아실현(self-actulization)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한창 젊은 30대 입년(入年)하여, 한 세상 보란 듯이 잘 살 수 있는 유혹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요한은 철저한 자기 통제의 사람이었습니다(눅 1:80). 그의 자의식 속에 사명감, 그리스도를 위한 선구자 역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란 ‘거울’을 통해서 '외유내강'한 사람으로 준비한 사람이었습니다. 요단 강가에서 자기는 그리스도에게서 세례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요한 자기에게 세례 받기 원하는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겸허하심에 놀랐으며, 결국 이는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에 의해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요구(The requires of God)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의 외유내강의 힘은 그리스도란 '거울'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다져갔던 것입니다(마 3:14~15).

그래서 그는 광야를 택한 고행자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황야의 바람에서 영원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는 선악에 대해서는 현실주의자였습니다. 그에게는 선·악의 중간이 없었습니다. 그는 도덕적 법칙을 주시하여 이완(弛緩)보다는 엄격으로 기울었던 자였습니다. 그는 심판을 예측하고 회개를 요구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절조없는 사람도,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 같은 허영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약대털옷과 가죽띠로 몸을 단장한 광야의 사람이요, 단호한 절개의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이처럼 호통을 칠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자신의 삶에서 경건의 훈련과 자기 흠이나 책 잡힐 것이 없었기에 호통을 칠 수가 있었습니다. 군인들에게는 힘으로나 무기로 백성들의 인권과 재산을 강탈하지 말라고 호통을 쳤습니다(눅 3:11~14).

이런 소문과 세례 요한의 인기가 상승하자,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지도자들이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보내어서 그의 정체성에 대해서 탐문해 오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요한에게 '네가 메시아냐'고 질문을 던졌지만, 그 대답이 공개적이고 분명히 말하기를 "나는 메시아가 아니다"라고 답변했습니다.

'엘리야냐'라고 물었습니다. 또한 그는 "아니다"라고 답변했습니다. 그럼 '선지자냐'고 물었을 때, 아니라고 하면서 답변하기를, 나는 단지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대답을 했을 뿐입니다. 그들의 질문에 긍정만 하면, 그의 신분과 인기가 절정에 달할 수 있는 호기임에도, 하나의 긍정(肯定)을 위해서 수 많은 부정(否定)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의 위대성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선생님 요단강 저편에서 선생님이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소개했던 그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들이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보고하자, 이 말을 듣고 태연자약 할 수 있는 사람이 그 얼마나 될까요. 자기 한몸에 와 있던 인기가 그리스도에게 간다는 소식은 참을 수 없는 치욕의 소리로 들리는 것이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단지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할 심부름꾼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그는 더욱더 중요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나는 점점 별볼일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He must become more important while I become less important.)고 말했습니다(요 3:30).

이런 세례 요한의 자기 사명감과 자기 헌신의 삶을 안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자가 없다.'고 칭찬을 했습니다.(마 11:11). 그리고 세례 요한은 헤롯왕에게 '당신 동생의 아내와 결혼하는 것은 의롭지 않다.'고 딱 짤라 의로운 말 한마디로 그간의 광야의 소리는 끝나고, 그의 목은 날라가 버린 위대한 일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마 14:1).

그러나 지금도 우리 사회 앞산과 뒷산에서 메아리치는 그의 '호통치는 광야의 소리'는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이러니 세례 요한은 호통칠 수 있었으며, 이에 감복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성령 충만한 사람, 정신과 육체가 건전한 사람들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의식주 생활을 광야에서 살아야 할 법은 없습니다. '이웃을 돌보지 않고 너무나 잘먹고 잘입고 잘 살아서는 안되지만', 더더욱 중요한 것은 영혼과 정신의 문제입니다. 자기 삶의 뒤가 흠잡을 곳이 없고, 책 잡힐 더러운 삶이 아닌 의로운 삶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소돔 고모라처럼 타락하고 부패한 세상에서 호통치는 큰 소리는 커넝, 세상이 오히려 교회를 걱정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문제입니다.

2005년 4월 8일 우리 기독교 사회의 지도급 인사라고 하는 분들인 김창인, 조용기, 강원용 목사님들께서 만시지탄이지만 ‘회한에 찬 공개적 회개’를 하였습니다. 만약 그 분들이 일찍이 세례 요한의 100분의 1, 1000분의 1이라도 ‘호통치는 광야의 소리’를 쳤던들, 우리 한국 교회가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호랑이 없는 골에 저마다 토끼가 선생 노릇한다.”고 야단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포기할 때는 아닙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바로 서면 한국 교회와 1200만명의 교인들이 바로 설 것이고,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와 한 민족의 유일한 '희망'이 될 것입니다. 기독자의 생이란 주님을 긍정하기 위해서 수많은 부정을 해야 진정한 기독교인입니다. 참된 인간입니다. 이것이 내가 죽고, 내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신비한 삶인 것입니다.(갈 2:20).

하물며 이럴진대, 어찌 "그는 점점 중요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나는 점점 별볼일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할 사람은 진정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서 없단 말이요! "너희가 가져야 할 '태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가졌던 태도이니라."(빌 2:5, 현대판 영어성경 역) 우리 성서가 말하는 마음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태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19세기 미국의 유명한 나다나엘 '호손' 이 쓴 <큰 바위얼굴>(The great stone face)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미국 뉴햄프셔주 프랑코니아 주립공원내 캐논 산(Mt. Cannon)에 있는 자연암석(old man face)을 주제로한 단편소설인데, 2003년 3월에 폭풍우와 추운 날씨에 애석하게도 붕괴되었다고 합니다.

소설의 줄거리는 남북전쟁 후, 어니스트란 소년은 어머니로부터 바위 산 위에 새겨진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아이가 태어나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란 전설을 듣습니다. 어니스트는 커서 그런 사람을 만나보았으면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자신도 어떻게 살아야 큰 바위 얼굴처럼 될까 생각하면서, 진실하고 겸손하게 살아갑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돈 많은 부자, 싸움 잘하는 장군, 말 잘하는 정치인, 글 잘 쓰는 시인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큰 바위 얼굴처럼 훌륭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전도자 어니스트의 설교를 듣던 시인이 어니스트가 바로 “큰 바위 얼굴”이라고 소리를 칩니다. 하지만 할 말을 다 마친 어니스트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자기보다 더 현명하고 나은 사람이 큰 바위 알굴과 같은 용모를 가지고 나타나기를 마음 속으로 바란다는 이야기입니다.

소설이 추구하는 위대한 인간의 가치는 돈이나, 명예, 권력 등의 세속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탐구를 거쳐 얻어진 말과 사상이 일치하는 인간상을 그린 것입니다. 호손은 당시 청교도 정신의 후손으로서, 깨끗하고 맑은 심성의 소유자를 이상적인 인물로 그린 것이라고 봅니다. 이 소설은 참다운 위인, 참다운 삶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위인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몸바쳐 일한 사람이지만, 작가 호손의 생각은 그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더욱 본질적인, '비록 소박하고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착한 행위와 신성한 사랑을 행하며, 끊임없이 자기 탐구를 행하며, 호통 치는 말과 사상과 생활이 일치되는 것'이 진실로 위대한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보아주는 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알아주신다는 복음 안에서 평범하지만 사랑을 실천해야겠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무조건 좋소, 옳소가 아니라, '나'에 사로잡힌 자에게 "그러면 안 돼" 하는 우리 사회의 작은 세례 요한, 작은 어른 노릇은 못할까요. '누구의 감정도 상하지 않게 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좋은 일을 한 것이 없는 사람이다.'라는 것을 명심하면서, 우리 사회의 호통치는 어른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끝.

2005년 5월 27일

山下목회연구소장/양 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