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수필사랑마당

25. 목사님들! 웃음을 줄이시고, 조금 슬픔에 젖어 보시죠.​

solomong 2026. 3. 20. 11:50

25. 목사님들! 웃음을 줄이시고, 조금 슬픔에 젖어 보시죠.

“타고난 천성이 매사에 긍정적이고, 만면에 미소를 짓는 돈키호테형인데, 뭐가 나빠서, 슬픔에 젖는 햄릿형의 고뇌에 찬 슬픈 인상을 지으란 말이요.”라고 제게 항의 하실 분이 계실가 해서 그 이유를 아래 차근차근 적어 보겠습니다. 제가 구약성서의 시가, 지혜서를 읽는 중에 오늘 아침에 전도서 7장 3절을 읽다가 무릎을 탁 쳤습니다. 우리 성경은 번역 상 마음에 와서 닫지 않습니다. 공동번역은 좀 괜찮으나, “웃는 것보다는 슬퍼하는 것이 좋다. 얼굴에 시름이 서리겠지만 마음은 바로잡힌다.”로 되었습니다.

흠정역엔 “마음을 더 좋게 한다.”, 개정번역엔 “마음을 빛나게 한다.”, 옥스퍼드번역엔 “마음의 기운을 북돋운다.”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현대판 영역엔 “Sorrow is better than laughter; it may sadden your face, but it sharpens your understanding."라고 되었습니다.(슬픔이 웃음보다 더 좋다. 그것은 얼굴에 비애스런 것 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사리분별을 예리하게 한다.) 특히 여기서 <사리분별을 예리케 한다.>! 이렇다면 성서를 읽어서 얻는 이득은 깊은 통찰력으로 볼 수 있게 한다 는 것이 아니겠는가!

성서의 표면적 말씀보다 내면에 깊이 감추어진 진리의 광맥을 찾아 낼 수 있으니, 이것보다 설교하는 목사님들께 특효약이 더 이상 있겠는가. 목사님들! 지금 목회현장에 그렇게도 희희 낙낙한 일들이 많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교인들의 심방을 가보나, 상담을 해 보나, 전해 오는 풍편의 소식은 가슴을 저리게 하는 것이 그 얼마입니까. 설교 때마다 강단에 서면 가슴이 철석 내리 앉는 것 같고, 결과는 목사설교 은혜 없다고 교인들의 구석구석에서 중얼거리며, 아내로부터 쪼들리는 애들 과외수업비, 생계문제 등등이 나가나, 들어오나 뭐가 좋아서 내숭을 떨고 있습니까.

MBC 시사보도프로그램 '뉴스 후'에 일부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호화스런 생활을 고발하는 소식도 못 들었습니까. '뉴스 후'는 C00 목사, K00 목사, K00 목사 등등의 호화로운 생활은 재벌회장과 다를 바 없다"고 꼬집고 있습니다. C목사는 골프 연습장이 딸린 고급 빌라에 살고 있으며, K목사는 3억 원에 달하는 최고급 외제 승용차를 몰고 다니고 있으며, 또 다른 K 목사는 경기도 남양주 인근에 값을 매길 수 없는 초호화 별장을 소유하고 있다는 뉴스는 듣지도 못했나요. 집과 별장이 수십억 하니 그것이 부러워 어서 대형교회 만들고 싶습니까?

 

그래서 만면에 미소로 가득 차고, 노회 총회 친구 목사들과 어울려서 임원 한자리 쑥떡 공론하고, 그러고 밀실정치하고, 이래저래 거짓말로 슬쩍 넘기고, 밥 사주고 또 한 끼 얻어 먹고, 이렇게 하면 대형교회가 됩니까. 지구상의 기아선상에 울고 있는 것은 고사하고, 같은 민족인 이북동포를 생각해 보는 것도 잠시 보류하고, 경향각지에 울고 있는 쪽방살이 인생들, 지하철 노숙자들, 허구 많은 음지에서 울고 있는 형제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어째서 환락에 젖어야 하는 목사들인지 이해가 안 됩니다. 목사님들! 이래도 슬픔이 없습니까.

세상을 비애에 찬 예리한 눈으로 보면, 성서에서도 예리하게 그 해답을 얻을 수 있고, 설교에 성령의 조명하에 은혜로운 메시지를 전할 수 있습니다. 목사는 공인받은 시인은 아니라도, 시인이어야 하고, 철학자가 되어야 합니다. 전도서 제1장 제1절의 “전도자의 말이라”는 영역은 “철학자의 말이라”고 되었습니다.(These are the words of the Philosopher.) 제가 목사가 왜 시인과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김소월의 ‘진달래꽃’)에서 마음속으로는 애간장이 타고 보내기는 싫지만 말로는 고이 보내겠다는 말이나,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 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 때에 '잊었노라' (김소월, '먼 후일'),

 

마음속으로는 결코 잊지 못하고 또한 잊지 않고 지냈으면서도, 곁으로는 "잊었노라"하는 것이나,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얐습니다."(한용운 '님의 침묵'),현실적으로는 님은 떠나갔지만, 자신의 의지를 통해 자신의 마음속에서는 님을 보내지 않고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옹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나,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곁으로 보기에는 명백히 긍정적이고 태연하고 웃는 것 같지만 마음속에는 시리고, 아프고, 온갖 간장이 다 녹는 것이 시인의 마음입니다.

고뇌 없이, 아파하지 않고 시를 토하는 시인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하여 많은 도시를 거닐어야 하고, 죽은 사람과 하루 밤을 지새워 봐야 시를 탄생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시인은 특별한 아픔의 감정에서 시를 배태시키는데 이를 <영감의 산물>이라고도 합니다. 워즈워드는 시를 “강한 감정의 자발적 유로(流露)”라고 했습니다. 이는 시의 근원이 외부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인 자신 속에 있음을 천명하는 것입니다. 목사도 성령의 영감을 받아야 성서 말씀의 깊숙한 비밀의 보고를 캐 낼 수 있고, 또 설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목사는 시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철학>이란 “지혜를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 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이 지혜가 아닙니까. 그리고 목사 자신이 제일 먼저 설교자이기 전에 하나님을 경외 하는 자요, 사랑하는 자어야 합니다. 명철(明哲)이 명철(名哲)이 아닙니까! 그리고 주변의 사리판단을 잘하는 자가 철학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제7장 제2절에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총명하고 사리에 밝다는 것이 명철(明哲)인데, 영역의 명철은 통찰(洞察, Insight)이라고 했습니다.(잠언 4:7 참조)

자, 이제 결론을 맺읍시다. 후배 목사님들! 눈물에 젖은 빵을 실지로 먹어보지 않고 어찌 주님의 제자로 자처하겠습니까. 자본주의 시장경제논리에 의한 교회운영이나, 배금주의 (mammonism)에 현혹되지 말고, 예수님의 광야 시험을 이기실 때의 말씀인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를 명심하면서, 대형교회의 목사들의 호화판 인생으로 사는 그들을 오히려 <연민의 정>으로 기도합시다. 시인의 아픔과 고뇌를 통한 詩가 사람들의 흉금을 울리듯이, 우리의 소우주(小宇宙)든 대우주든 고뇌에 찬 통찰력으로 말씀을 증거 하면서, 생활인의 철학자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합시다. 끝.

2008. 2. 2. 오후

山下연구원장: 양 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