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인간의 아픔을 정화하는 문학과 목회
문학은 절대로 인류를 구원하거나 인류 평화를 실현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는 없다. 문학이 철학이나 신학보다 더 형이상학적이고 포괄적인 진리를 지향하는 차원 높은 예술 형태라는 이론에도 동의할 수 없다. 문학은 역시 '배설'이다. 시원함이다. 막힌 마음 한 곳을 뚫어서 고개를 살며시 들고 세상을 보는 그리움이다.
실낙원에 대한 향수요, 일시적 사랑의 노래다. 고독과 절망, 그리고 인간 사회의 여러 가지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좌절감, 육체적 욕구와 고통 등이, 작가의 내부에서 축적될 대로 축적된 끝에, 저절로 쏟아져 나오는 '배설물'이 바로 문학작품이란 것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배설)에 대한 정의는, 비극이나 어떤 종류의 문학(시), 음악 등과 같은 예술에 항상 수반되는 미적 효과라고 했다.
울적한 감정을 쏟아 버림으로써, 정신을 정서의 압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그리하여 일종의 기쁨을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애상이나 공포를 심신 밖으로 쏟아 버림으로써, 마음을 진정하는 것을 말한다. 정화라고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학>에서 카타르시스의 개념을 이렇게 제시하였다. 이때의 정의는 정화 작용을 의미하는 의학 용어로서, 문학의 효용론적 효과를 가리키는 말이다.
말하자면 이 말은 사람들이 과식했을 때, 이것을 적절히 소화하여 배설(배변)하게 함으로써 신체의 균형을 되찾아 건강을 유지시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한 시적 카타르시스의 주요한 목적은 연민과 공포와 같은 격렬한 정서 과잉 상태를 질서 있게 진정시켜, 정서의 균형을 찾는 데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영국의 시인이나 비평가 사이에서 다소 변형된 형태로 적용되었다. 18세기 말에 시인들은 문학 작품들을 일종의 개인적인 치료 수단으로 보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은 어떤 의미에서, 나그네 인생 삶에서 지치고 비틀거리는 조금씩 마음의 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문학 작가가 되고, 시인이 되며, 문학 애호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문학적으로 표현한다면, 로맨티스트였다. 들의 백합화, 공중 나는 새, 창녀들, 병고에 고통스러워하는 군상들, 외식주의자 바리새인들에게 어쩌면 애정과 애달픈 연민에 찬 시선이었다. 과잉 반응의 사랑이었다. 그래서 낭만은 쓸데없이 낭비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었다. 유물론자들은 배를 채울 수 있는 밥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문학 변두리를 왕래하는 사람들과 목회자들은 영혼의 생명이 그리워서 배회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친족들도 예수님이 미쳤다고 했다. 그 나라와 의를 먼저 생각하는 낭만주의자이었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은 성서를 통찰력 있게 심층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학적으로 성령의 감동이 우선해야 하지만, 이것 가지고는 부족하다. 교인들에게 감동을 줄 수 없다. 설교 원고문 속에 형용사와 부사를 어떻게 구사하느냐 하는 문학적 기초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신학자 칼 바르트는 성서를 읽고, 신문을 읽어야 말씀을 바로 해석할 수 있다고 했다. 성서는 신적 요소와 인적 요소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기름 자르르한 얼굴을 갖기 보담, 고뇌의 아픔을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 고투하는 작가의 아픔을 실토한 문학작품을 많이 읽어야 한다. 그 작가들이 토설한 작품의 주제엔 언제나 어두움, 갈등, 고뇌 그리고 그리움, 사랑, 기쁨, 희망이다. 신앙적 구원과 환희도 고뇌의 아픔을 통한 마음의 빛이다. 부디 목회자들이여! 당신들의 목회와 설교가 교인들로 하여금 일종의 배설물처럼 시원하고, 마음을 정화(카타르시스)시켜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 주시오. 끝.
2011. 2. 18.
山下연구원장: 양 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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