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수필사랑마당

21. <성서 말씀 명상>: 종말론적인 인생살이

solomong 2025. 11. 22. 11:35

21. <성서 말씀 명상>: 종말론적인 인생살이

(고후 5:1~10)

-오늘이 내 최초의 날인 것처럼, 최후의 날인 것처럼 살자!-

여러분께서는 일생을 통해서 시험(試驗)을 쳐 보지 않은 분은 한 분도 없으리라고 봅니다. 학교에 다닐 때 시험을 쳤습니다. 직장에 입사할 때도 시험을 치렀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학생들의 시험 보는 옆에서 지켜봅니다. 누구든지 시험지를 손에 잡으면 심각해집니다. 이 시간에는 선생님에게 모른다고 질문도 할 수 없습니다. 참고서를 볼 수도 없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도움을 청할 수 없습니다. 고독히 홀로 앉아서 흰 종이 위에 답안을 써야만 합니다. 되도록 아는 것부터, 쉬운 것부터 풀어 나가야 합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시간 내에 써야 합니다. 마감 종소리(벨)가 땡땡 하고 울립니다. 그땐 손을 올리고, 밥이 되었든 죽이 되었든 답지를 제출해야 합니다. 후회해도, 무엇을 탓해도 소용 없습니다. 이것이 시험장의 엄연한 현실입니다. 이 시험장이야말로 인간사를 한마디의 웅변으로 상징합니다. 그것은 바로 '종말론적(終末論的) 인생살이'입니다.

시공(時空)이 재연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인생은 일회적(一回的)입니다. 흰 시험지에 답을 써서 제출해야만 하는 것처럼, 그것이 10년을 기록한 것이든, 50년을 기록한 것이든, 80년의 인생 보고서를 쓴 것이든, 하나님께 일생을 산 결산서를 사실대로 제출해야만 합니다.

본문의 말씀인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이란 것은 이 세상의 종말론적 인생살이를 가르친 말씀입니다.

조직신학적 견지에서는 우주적(역사적) 종말론과 개인적 종말론으로 구분하게 됩니다. 기독교인의 역사적 종말론의 입장에서, 시간의 개념은 직선적입니다. 시간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역사에는 종국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종말'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현재'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는 지나간 이야기이고, '미래'는 앞에 있는 미지의 세계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언제나 현재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회상)-------현재(종말)--------(소망)---------미래

그러면서도, 일반적으로 과거는 현재에 의해서 해석됩니다. 우리는 과거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추억이니 회상이니 회고이니 역사라는 표현으로 말을 합니다. 현재에 의해서 과거를 보는 것입니다(Remembrance). 환언하면, 현재 내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기쁨과 감사가 넘칩니다. 이럴 때 과거를 달리 생각합니다. 오늘의 기쁨을 위하여 과거가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의 고통, 그 때의 실패, 전부 오늘을 위해서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하면, 현재에 근거해서 미래를 전망합니다. 그래서 내일, 내년에는 좋을 것이라고 소망합니다. 희망을 가지고 삽니다. 희망이 있으니 힘이 분출합니다. 희망대로 성사되는 일이 별로 많지 못하지만, 기대하고 삽니다. 내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뜻대로 성사됩니다. 그러나 대개가 인간의 욕심 때문에, 인간의 희망이란 아롱진 시간에 속아 사는 것이 인간 일생이요 인생살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또한 기독신자는 미래를 현재에 의해서 풀이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신 저 앞에 있는 축복의 미래, 행복한 결말, D-Day! 그 아름다운 드라마를 위해 오늘 내가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런 3가지 시간관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개인적 종말관에 대해서 묵상해 봅시다.

본문의 말씀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장막 집' 과 '영원한 집' 과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장막 집'이란 텐트라는 말입니다. 여름에 야영을 하기 위해, 가을에 운동회를 위해 잠시 치는 텐트입니다. 이것은 우선 1). 임시적이란 것 2). 철거할 때가 있다는 것 3). 영구적이 못 되고 낡아지고 바람에 넘어져 찢겨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집'이란 마치 이 세상의 튼튼하게 지은 벽돌집, 기와집, 빌딩을 비유한 말씀입니다. 텐트에 비해서 견고하고, 비바람을 막아주고, 여름에 시원케 해주고, 겨울에 따스함과 안락을 제공하는 그런 집을 말합니다. 하루 아침에 일어나면 "친구 누구누구가 돌아갔다." "어느 인사가 돌아갔다."는 애석한 부고가 자주 들려옵니다. 하기야 '장막 집'이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나이 많아서 무너지는 것이고, "나는 아직 창창한 청년이니 내게는 상관없다."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디 공동묘지에 가서 "여기 20대 청년의 무덤이 없지요!" 하면, "아니요!", "여기요!", "여기요!" 합니다. 죽음은 노소가 없이 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대병 중에 가장 악독한 병은 암(cancer) 병입니다만, 암은 어린이에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찾아오는 병입니다. 육체적, 심리적 고통이 동반합니다.

미국 일리노이 주 South Cook Country 정신병원 가정의학과 여의사 엘리자베스 쿠불러-로스 박사의 '암 환자의 죽음에 이르는 심리적 5단계'를 1970년대 재미있게 소개한 저서가 있습니다:

제1단계: 부인과 고립(First Stage: Denial and Isolation)='암'이라는 진단이 의사로부터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환자는 부인하면서 오진이라고 화를 낸다고 합니다. 또는 죽음이 온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더 고립 속으로 빠져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제2단계: 격노(Second Stage: Anger)="나는 윤리 도덕적으로 선한 생활을 해 왔는데, 왜 하필이면, "왜 나냐(Why Me!)"라고 하면서 분노를 터트린다고 합니다. 대상은 의사, 간호원, 가족에게 격노를 발한다고 합니다.

제3단계: 협상(Third Stage: Bargaining)= 마치 아이들이 부모가 밖에 나가 놀지 못하게 하면, "이제부터 잘할께요, 놀게 해주세요."! 또 의사에게 협상 제의하듯이, 만약 오페라 가수이면 마지막 무대를 장식하고 관중들로부터 박수를 받고 화려한 모습을 남기고 죽을 수 있도록 생명 연장을 애원한다고 합니다. "자녀들의 결혼식 때까지만 살게 해 주세요!", 기도할 때도 "이런 요구를 들어주십시오." 하면서 하나님과 과도 협상을 한다고 합니다.

제4단계: 우울증(Fourth Stage: Depression)= 1)반발적 패배감으로, 우리 몸의 일부분을 절단하는 수술을 받게 되면, 인간의 기능상실에 대한 패배감 같은 것을 말합니다. 우울증은 죽음의 준비 단계에서 오는 것인데, 얼마 있지 않으면 죽음의 실존적 존재로 변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만사가 다 어둡고 다 비관적입니다. 멍하게 하늘을 쳐다보고 앉아 있게 된다고 합니다.

제5단계: 수용(Fifth Stage: Acceptance)=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가족과 의사에게 잘못했던 것을 사과하면서 즐거웠던 일들을 회상하곤 한답니다. 심지어는 자기가 죽은 후 가족들 염려, 행복을 빌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나의 긴 旅行을 위해 나는 준비가 되었다!"("I am ready for my long journey")고 차분히 수용한다고 합니다.

스위스의 철학자 칼 히티는 "오늘이 나의 최초의 날인 것처럼, 또한 최후의 날인 것처럼 살라."고 했습니다. 최초의 날은 삶의 '감격'이 있습니다. 최후의 날은 삶의 '엄숙성'이 있습니다. 동시에 여러분! 각자 우리의 사정에 따라 종말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종말은 나의 형편을 묻지 않고, 이미 내 속에! 내 삶 속에! 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한 집이 있기 때문에 초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올 때보다, 내가 살고 간 이 세상이 나로 말미암아 더 좋게 만들고 가려는 노력을 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불의와 무질서, 부정부패가 있는 곳에 정의와 질서, 그리고 청정(淸淨)이 있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말이 벌써 우리 실존적 삶 속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여류 시인이었던 에밀리 딕킨슨의 시 "내가 만일 애타는 한 가슴을 달랠 수 있다면"(If I Can Stop One Heart From Breaking)을 감상해 봅시다:

"내가 만일 한 상처 입은 가슴을 달랠 수 있다면

내 삶은 결단코 공허하지 않으리.

내가 만일 한 생명의 고통을 진정시켜 주거나

또는 한 괴로움을 시원케 주거나

또는 할딱거리는 로빈새 한마리를 도와 주어서

보금자리로 돌아가게 해 줄 수 있다면

내 삶은 정녕코 허무하지 않으리."

종말이 벌써 현재 내재해 있다고 해서 인생살이가 불안하다거나 허무하다는 생각일랑 버립시다. 디킨슨의 시처럼, 죽어가는 새 한마리를 살릴 수 있다면, 아니! 어떤 한 사람의 상처 입은 가슴을 달랠 수 있다면, 현재 인생살이가 근원적인 선의(善意)로 돌아가 어떤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에 맞는 일이니 불안해 할 것이 아니라 안심해도 좋을 것입니다. 언제 내 인생의 종말이 와도 두렵지 않게, 유감없이, 위의 시처럼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종말은 예상을 못합니다! "내 안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서 나를 각성(警醒)시키는 이는 나의 '종말'이란 것이 있습니다. 허지만, 종말은 나를 '엄숙함'과 '진지함'으로 안내하는 자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그러나 우리는 '장막 집'이 무너지더라도, '영원한 집'이 있는 것을 믿음의 영안(靈眼)을 통하여, 이 '소망'과 '약속'을 믿고 항상 깨어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끝.

2004년 12월 7일

山下연구소장: 양 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