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박물관열람실(72)

60. ​'산 노을'의 명상

solomong 2025. 11. 4. 10:54
 

 

60. ​'산 노을'의 명상

 

먼 산을 호젓이 바라보면

누군가 부르네

산너머 노을에 젖는

내 눈썹에 잊었던 목소린가

산울림이 외로이 산 넘고

행여나 또 들릴 듯한 마음

아아, 산울림이 내 마음 울리네

다가오던 봉우리 물러서고

산 그림자 슬며시 지나가네

나무에 가만히 기대보면 누군가 숨었네

언젠가 꿈속에 와서

내 마음에 던져진 그림잔가

돌아서며 수줍게 눈감고

가지에 숨어버린 모습

아아, 산울림이 그 모습 더듬네

다가서던 그리움 바람되어

긴 가지만 어둠에 흔들리네

*명상: 1. 박판길 작곡자님은 사장조(G-minor)에 렌토 멜랑꼬리아멘테(Lento melancoliamente)로, 즉 느리고 우울한 느낌을 주게 작곡을 했다. 2. 유경환 작사자님은 곡조에 어울리게 우수에 찬 실존적이며, 서정적이고, 전원적인 내용으로 작사를 했다.

3. 산 속에서 느끼는 인생의 실존적인 고독을 달래는 듯이, 한 메아리가 있어, 그 옛날 속삭이던 꿈 속에 나타나고, 사랑했던 임의 모습이 눈에 삼삼, 귀에 쟁쟁한 목소리가 산노을과 산울림을 통해서 보이는 듯한, 들리는 듯한 심정에 젓는다.

가사 내면에 흐르는 사상은 행복했던 순간들, 아파했던 장면들이 산노을과 산울림으로 재현되는 듯하다. 허지만, 인생은 언제나 뼈져린 고통과 고뇌를 수반하는 것이기에, 생을 살만큼 살아 온 자로서의 비 바람 매운 갈기를 견디고 쓰다듬으며 견뎌 온 삶을 회상도 해 본다.

이제는 산 넘어 저편에 붉은 황혼이 져서, 산 봉우리에 걸린 것 처럼, 자기 인생도 저녘 노을에 지는 듯하며, 해는 지고 어두움의 그림자가 인생의 무상을 느끼게 한다. 지난간 사랑의 두루마리를 다만 추억 속에 묻어 버리겠다는 회한에 젖는 가사인 듯하다.

가사 속의 주인공 그도 실존적인 인간이다. 실존이라는 말은 인간의 진실된 존재, 현실존재(現實存在)를 의미한다. 실존(existenz)이라는 말은 어원적으로는 existere, 밖에(ex) 나타난다(sistere)는 라틴어에서 유래된 것인데 여기에 '나타난다'라는 뜻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이 의미는 역사적이고 개별적이며 주체적이라는 것이다.

실존이란 '인간의 본래의 자기에로'라는 뜻이요, 실존주의는 그러한 본래의 자기를 찾으려는 태도이다. 실존주의 철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하나 하나의 인간이란 각각의 주체를 실존이라고 하고 이는 절대로 남과 바꿀 수 없는 개별자요 단독자다.

또한 '객관적인 것이 진리'라는 특히 헤겔철학 사상과는 반대로 주체성이 진리이며, 나의 혼을 움직이고 나의 혼을 구제하는 파토스(pathos, 연민의 정을 자아내는 힘, 정념)적 진리가 실존적 진리이다. 객관적 진리는 시공을 초월하며 영원히 타당할 지는 몰라도 그것은 길가의 돌멩이처럼 싸늘한 진리로써 나의 생명, 나의 영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진리이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자기 자신은 홀로 서 있는 소나무와 같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실존철학은 존재를 바라다보고 이리 저리 해석하는 관상(觀想)의 철학이나 해석(解釋)의 철학이 아니며,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행동하며 실천하는가에 관한 행동과 실천의 철학이다.따라서 사실주의(realism)의 철학이다. 실존주의는 또한 주체성의 철학이며 행동적이며 실천적이고 윤리적인 철학이다. 종래의 사변철학에서 인간의 개별적인 존재를 강조하고 보편성을 추구하기 보다 특수성을, 합리성보다는 역설적 변증을 나타낸다.

실존철학에는 유신론적(有神論的)경향과 무신론적(無神論的) 경향의 두 가지 견해가 있으며, 키에르케고르에서 독일의 야스퍼스, 프랑스의 마르셀로 이어지는 사상적 계보는 기독교적인 유신론적 실존철학이며, 니이체에서 독일의 하이데거로, 하이데거에서 다시 샤르트르에로 흐르는 무신론적 실존철학의 유파가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철학에 대한 불만에서 출발하여 헤겔을 극복하려 하였다."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요,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는 문구에서 잘 표현되는 헤겔의 관념철학에서는 절대정신과 세계이성의 조작대로 개인의 구체적 존재의 의의는 없어진다.

그는 이에 극력 반대하고 개인의 주체성 즉 실존을 주장했다. 그래서 헤겔철학을 비유해서, 헤겔은 웅장하고 거대한 빌딩을 지어 놓고, 자기는 그 빌딩 옆에 조그마한 오두막 집에서 기거하는 것과 같다고,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철학을 혹평한 때가 있었다.

실존이 나타나는 단계는 3단계이다. 첫 단계는 '미적 실존'이다. 이것은 인생의 모든 쾌락을 향락하려는 태도이다. 이는 자유가 아니라 쾌락의 노예이고, 진실한 자기에로 높이 올라가야 함을 느끼게 한다. 그 다음 단계는 '윤리적 실존'이며 양심을 가지고 성실하게 살아가려는 가장 온당한 인생의 태도이다.

그러나 인간은 성실하고 완전한 자기가 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자기의 이상과는 너무나 멀고 부족한 자신을 발견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전지전능하고 자비로운 하나님 앞에 참회하고 귀의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윤리적 실존이 절망 속에 빠질 때, 도리어 신앙의 빛이 솟고, 종교적 실존의 단계로 올라가게 된다고 했다.

그렇다! 인간의 모든 심미적이고, 윤리적인 실존은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신약성서 베드로 전서 1장 24-25절) 그 옛날이래 부귀 영화, 온갖 명예 및 절대권력을 향유했던 솔로몬 왕의 고백이 "헛되고 헛되며....모든 것이 헛되도다."(구약성서 잠언 1장2절)라고 했다.

"These are the words of philosopher,David's son,who was king in Jerusalem. It is useless, useless, said the philosopher. Life is useless, all useless." 영역은 솔로몬 왕을 철학자로 번역했고, 그 철학자의 말은 인생은 다 쓸데가 없고, 무익하고, 무용지물이라고 표현했다.

여기에 인간 실존자들의 고민이 있고, 구원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이유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救世主)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하는 자, 그를 구주로 믿는 자는 다 구원을 얻게 되는 기쁜 소식이 이 가을 사색에 잠기고 우울한 인생들에게 복음으로 인생의 그 근원적인 우수를 해결키를 바란다.

그리고 위 우수와 고독의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 주장도 깊이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일본의 어느 문인은 가을에 귀뚜라미가 우는 것은 "인생들아! 생각을 좀 하고 살아라." 라고 해서 운다고 했다. 깊이 사색해 보는 이 우수의 계절이 되기를 바란다. 끝.

2007. 11. 15. 오후 15시 15분경, 山下연구원장: 양 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