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성서 말씀 명상]: 사모하는 마음의 승화(昇華)
(눅 8:1~3, 막 14:3~9, 마 28:1~10, 요 20:11~18)
일곱 귀신 들린 막달라 마리아는 오래간 고난의 아픈 세월을 보내는 중, 예수님을 통해서 병 고침을 받은 후, 다른 여인들과 더불어 자기들의 소유를 예수님의 복음 사역에 바치면서 헌신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특히 막달라 마리아는 보통 귀신이 아니라, 일곱 귀신이 들렸다고 한다. 일곱이란 숫자는 완전수로서 극악한 마귀가 들렸다는 것을 뜻하는 것인데, 이는 완전히 ‘망가진 여인’이라는 것이다.
병 고침을 받은 여인네들 가운데는 현대 의학 용어로 심한 우울증과 망상 신경증 등등, ‘일곱 귀신’ 들린 막달라 마리아는 오랫동안 미친 정신병의 삶을 살아왔다. 일직이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자키스가 그의 소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 예수님과 막달라 마리아를 연인 관계로 그렸으며, 이것을 바탕으로 뮤지칼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녀의 신분에 관해서는 591년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재위 590~604년)는 누가복음 7장 36절 이하에 나오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죄 많은 여자’를 막달라 마리아로 해석하여 그녀를 ‘회개한 창녀’라고 했다고 한다. 한편 일본의 ‘이누카이 미치코’ 작가가 쓴 <성서 이야기> 신약 편에 의하면, 문둥이 시몬의집에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었던 막달라 마리아는 교황이 언급한 ‘죄 많은 여자’는 아니라고 부인했다.
막달라 마리아의‘막달라’는 갈릴리호수 서편에 있는 막달라 고향마을 출신이란 지명을 말한다고 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수원댁, 안동댁’이라고 호명하는 것과 같은 뜻이기도 하다. 공동번역에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 개신교에서는 ‘막달라 마리아’, 가톨릭에서는 ‘마리아 막달레나’라고 부르고 있다. ‘미치코’는 막달라 마리아는 막달라에서 베다니 (예루살렘 동족 교외)로 이주해서 사는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세 남매 중의 마리아가 바로 막달라 마리아라고 했다. 필자는 ‘미치코’의 위 주장에 따라서 이 글을 전개코자 한다.
그녀에 관한 별별 이야기가 많지만 다 생략하기로 하고, 필자의 명상으로는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예수님께 향해서 감사한 마음의 정서 감정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여성 제자로서 예수님을 뒤따르며 지극 정성으로 모시게 되면서 점진적으로 그녀의 심정 저변에는 고마운 마음으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사모하는 마음의 <짝사랑>이 움트게 되었다고 느껴진다. 그녀는 바람이 불어오면 가슴에 구멍 난 사이로 지울 수 없는 그리움이 되어 하염없이 춤을 추게 된다.
한숨짓고 눈물지으며 잊을 수만 있다면 천 번이라도 한숨 짓겠으며. 아! 천 번이라도 울겠다는 심정이었다. 사모하는 마음 하나 버리지 못하는 연약한 여인의 마음! 말할 수 없는 기다림으로 살아가는 세월이었다. 사랑한단 말 한마디도 못 하고 지울 수 없는 그리움이 사무쳐서 가슴으로 노래하였다. 사모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연약한 그녀의 마음! 말할 수 없는 기다림으로 살아가는 세월이었다. 다만 울 수가 없는 그리움으로 살아가는 나날의 세월이었다.
그래서 유월절 엿새 전, 주 후 30년 니산월 9일 토요일 베다니의 동민들이 문둥이 시몬의집에서 잔치를 배설하게 되었는데, 이는 시몬이 예수님으로부터 병 고침을 받았고, 나사로는 살아났고,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나가게 해주셔서 건강하게 됨을 고마워서 예수님을 주빈으로 초대한 것이다. 연회 석상에서 마르다의 동생 막달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 앞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렸다.
예수님의 ‘발 앞에 여인’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지극 정성으로 몸과 마음과 물질을 다 기우려 받친 사랑과 헌신이었다. 귀한 옥합에 넣은 값비싼 향유를 깨뜨려 주님의 발을 씻겨 드린 것이다. 또한 그녀의 몸을 바친다는 뜻으로, 당시 유대 풍속엔 여인이 자신의 머리털을 풀어서 공중 앞에서 산발하여 풀어 헤치는 것은 ‘치욕’이라고 했는데, 그녀는 예수님을 위한다면, 무슨 욕된 일이라도 하겠다는 결의에 찬 여인이었다.
이처럼 막달라 마리아는 위와 같이, 첫째로 자기의 물질을 바쳤으며, 둘째로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은 것은 예수님을 높이고 자기를 낮추는 극한 행동도 서슴없이 실행했으며, 셋째로 언니 마르다는 활동적이고, 외적이고, 사무적이고, 육의 성격이라면, 막달라 마리아의 정신은 명상적이고, 정적이고, 내적이고, 원리적이고, 영적이었다.
그녀가 향유를 예수님의 몸에 바르는 사건으로 가롯 유다의 반대 논란이 야기되자, “저를 가만두어 나의 장사하는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비로소 그녀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유대인은 장례 때 시체에 기름을 바르는 풍습으로 그녀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하여 미리 행한 것은 아니고, 단지 예수님을 향한 사모의 사랑과 헌신의 정신이었으나, 예수님의 말씀으로 슬픈 사연을 처음으로 접했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그 후 그녀는 골고다 석벽으로 달려갔는데, 마가복음서는“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는데, 그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라는 말씀을 볼 때, 이 여인들이 처음에는 멀리 있었던 것은, 너무 슬펐던지, 로마 군병들에게 제재를 받아서인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이 너무 고통스러워서인지, 멀리서 바라보고 있다가, 점점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가까이 가까이 접근하게 되었다.
결국엔, “예수의 십자가 곁에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라는 말씀을 통해서, 그녀가 예수님의 죽음의 십자가까지 가서 눈물 지우며 애달픈 심정으로 같이 아픔의 몫을 나누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비로소 막달라 마리아야말로 예수님을 만나서 망가진 여인 모습의 탈을 벗고, 십자가 아래에서 새 인생의 가능성을 발견하여 <사모하는 마음의 승화(昇華)>가 된 성녀(聖女)가 되었다.
어쩌다 주님을 뵈옵게 되어 <망가진 여인>이 새 세상을 만난 감격으로 주님의 고마움에 문득문득 그리움만으로도 행복했었는데, 이젠 들뜬 꿈속 더딘 밤을 지새우며 환상의 미래를 떠돌게 되었다. 주님의 거룩한 향기가 그녀의 곁을 스치고 지날 때면, 사모의 짝사랑은 햇살처럼 부서지고, 거룩한 주님의 사랑에 도취 되어버린 그녀가 되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의 헌신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와 함께 필요한 물질로 지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마태 복음서에서 다시 한번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게 된다.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함께 보려고 갔더니”라고 남자 제자들도 포기한 예수님의 무덤을 그녀가 찾아간 것은 일곱 귀신에서 구원을 주시고, 자신을 그의 제자로 삼으신 그분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어서였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마리아는 거기서 뜻밖에 돌아가신 예수님이 아닌 다시 사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주의 천사는 마리아에게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라고 하였다. 마태복음서는“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라는 말씀은 이제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증인>이 된 것이었다.
특히 요한복음서엔, 그녀는 부활한 주님을 뵈옵지 못하여 무덤 밖에서 슬피 울고 있을 즈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시니, 그녀는 동산 지기인 줄 착각하고서, “여보세요. 당신이 그분을 옮겨갔거든 어디에다 모셨는지 알려 주셔요. 내가 모셔 가겠습니다.”(공동번역 성서)라고 간청하였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풍성하고 거룩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그녀는 여기서 한 번도 ‘시체’라고 말하지 않고,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그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서는 그녀는 주님의 시체를 모셔 가겠다고 했다. 새벽 미명에 산길에서 일개 연약한 여인이 남자의 시체를 어떻게 메고 갈 작정이었는지, 이런 용감하고 사랑에 찬 말을 할 수 있었는지 찬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오늘의 기독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어려운 시련에 처해 있을 때, 혼자라도 희생해 가면서 봉사하겠다는 정신을 본받아야 할 문제라고 여겨진다.
이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통한 육체의 구원에서, 인간적인 짝사랑의 사모하는 마음으로 변모하다가, 끝내는 애달픈 그리움을 종식 시키고, 거룩한 사랑으로 승화(昇華)되는 성녀(聖女)의 삶을 우리 가슴에 거울로 비추어 반성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오늘의 기독 신자들! , 주님의 종들! ,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가 무엇인지를 타산지석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 예수님의 종들인 성직자들! 정말 어려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짊어지고 가겠는지를 반문하면서, 헌신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끝.
2021년 10월 11일
山下연구소장: 양 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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