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성서 말씀 명상>: 역설의 복음
(마 5:1~12)
역설이란 모순(矛盾)이란 말의 뜻과 비슷한 말입니다. 모순이란 말이 생긴 유래는 옛날 중국에 창(槍)을 만드는 사람이 세상의 어떤 방패(防牌)도 뚫을 수 있다고 장담하니까, 이 소리를 전해 들은 방패 만드는 사람이 이 방패는 세상의 어떤 창도 막아낼 수 있다고 한 말에서 생겨났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역설이란 모순과 정반대됩니다. 2차대전 후에, 세계 사상계를 풍미한 실존철학은 역설의 철학이라고 불립니다. 실존철학의 아버지라고 하는 키에르케고르의 학사논문 제목은 아이러니(Irony, 풍자, 역설의 뜻)였으며, 논문의 배경은 희랍의 소크라테스였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한 길가에서 행인들을 붙들고 무언가 열심히 질문하면, 누구든 처음은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서 "나는 모르겠습니다"라고 손을 든다고 합니다. 그때 철인은 괴상한 미소를 지으면서 "당신은 지금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몰랐어요, 왜 모르면서 아는 척 하느냐?"고 비꼰다고 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헤겔 철학을 관념적이고, 우주적이고, 조직적이고, 이성적인 철학이론이라고 했습니다. "헤겔은 으리으리한 좋은 빌딩 집을 지어놓고, 그 속에 들어가서 살지 않고, 그 옆에 조그마한 움막 집 속에 들어가 산다"라고 꼬집은 적이 있었습니다.
미술의 세계도 역설을 통하지 않고서는 미술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 삶(실존= 현실존재) 자체가 원래 역설적 존재라면, 미술에 비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할 때, 우리 나약한 죄인은 역설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그 때의 역설은 단순한 역설이 아닙니다. 역설로 표현되는 신비한 진리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역설의 진미를 모르고는 복음의 진가도 모른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고요히 본문 성서에 나타난 산상보훈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산상보훈의 말씀을 읽는 모든 사람들은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불신자까지라도 산상보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숭고하고도 심오한 교훈 앞에 찬탄과 감복을 금치 못합니다.
'산상보훈은 그리스도의 전 교훈의 요약이다'라고 부르스(Bruce)란 주경학자는 말하였고, 일본의 흑기(黑崎) 주석자는 '수백의 보석으로 꾸며진 왕관'이라고 평하였습니다. 혹은 '모든 종교의 서곡이다.' , '그리스도의 전 생애와 교훈은 산상복음의 주해였다.' 나아가서 '산상보훈은 천국의 대헌장(Magna Charta)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인도의 위대한 지도자 간디는 비록 비기독교인이었으나 평생에 산상보훈을 애독하였고 그의 기본생활, 이를테면 그의 유명하였던 단식 무저항주의, 비폭력주의는 그리스도의 이 교훈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처럼 유대 백성은 ‘축복’을 추구했던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사회적 생활의 기준이었던 모세율법은 ‘복과화’(福과 禍)로 엮어져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버리면 화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비단 한국인뿐만 아니라 복 받기를 바라는 것은 인류의 공통이지만, 소원대로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은 복 받는 방법 즉, 복의 정로를 알지 못해서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8복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인간 세상의 이치와는 정반대 되는 말씀이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역설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부자를 복이 있다고 하는 세상의 판단에 비추어볼 때 그것은 역설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강자가 땅을 정복하는 것을 승리하였다' '의(義)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는 것도 역설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옳게 하면 이(利)로움이 없다고 합니다. 이로운 것이 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이롭게 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행해야 이롭다고 합니다. 그래야 벼락부자가 되고, 벼락 감투를 쓰게 된다고 합니다.
다섯째 복인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여섯째 복인 '청결이란 도덕적으로 깨끗함을 말하는데, 양심이 고와야 복이 있다는 것'도 이 세상살이에서는 통하지 않는 말입니다. 양심대로 살면 손해보는 것이라고 세상살이는 말합니다. 일곱째로, 인류가 생존해온 이후에 전쟁이 멈춘 때는 한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평화를 조성하는 자가 복이 아니라, 전쟁을 해서 남의 것을 탈취하고, 힘센 자가 복이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은 대단한 역설입니다. 고난이 복이라는 것은 이 세상 이치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상의 팔복이 전부 다 인간의 가치판단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역설입니다.그러나 이 팔복으로 시작되는 마태복음 제5장은 '기독자의 생활 원리', 제6장은 그 '내용', 제7장은 기독자가 삶에 있어서 경계(警戒)해야 할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팔복은 문전에 서는 자는 겸손한 심령을 가져야 하고, 그 문 안에 들어가면 먼저 죄를 뉘우치는 애통이 필요하고, 그 결과 마음이 온유해져 방향을 돌이켜 의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의에 만족을 얻으면 남에게 긍휼을 베풀게 되고, 이런 역사(役事)에서 마음이 청결케 되고, 사람 사이에 화평을 달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의(하나님의 의를 말함)를 위해 핍박을 감수하는 최고도의 은혜에 이르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령의 가난이란 마음의 겸손함을 가리킵니다.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처럼 종교적, 지적, 지위적으로 가진 것을 자부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생각하며 비천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입니다. 이런 자를 주님께서 돌보시며 천국의 축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자아의 죄책감과 부족함에 대한 애통만이 진정하고도 영원한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폴레옹이나 히틀러 같은 영웅들이 무력으로 점령한 땅을 다시 무력으로 잃어버리는 종말에 반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지금 전 세계 방방곡곡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온유가 세계 정복의 원리라는 말입니다. 또한 성도들이 미래에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할 것을 가리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의로운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전에는 세상의 재물과 명예 등을 목마르게 구하던 사람이 이제는 의(하나님의 의)를 추구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중생한 자의 모습이란 것입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첫째 복에서 넷째 복까지는 기독신자의 자기완성(self-completion)에 치중한 말씀이고, 다섯째 복부터 여덟째 복까지는 자기 몫을 분여하는 자기분여(self-parting), 즉 남에게 미쳐가는 덕을 말하고 있습니다.
남을 긍휼히 여기며 주는 자는 다시 긍휼로 보상 받는다는 것입니다. 긍휼을 행하는 길은 물질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도 할 수 있습니다. 말로도 할 수 없을 때는 눈물로도 할 수 있습니다. 영국의 대문호 섹스피어는 '긍휼은 억지로 하지 않고 / 하늘에서 오는 비처럼 / 이중의 복을 가지고 온다 / 주는 자에게 복을 주고 / 받는 자에게 복을 주어 / 최강자 중에도 최강자이며 / 보좌에 앉은 왕에게 있어서 / 긍휼은 왕관 이상으로 존귀하다.'라고 그의 작품 <베니스의 상인>에서 노래했습니다.
마음은 '전 인격'을 의미하고, 청결은 마음의 정의성과 행동의 단일성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런 자가 하나님을 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우리 모든 성도들의 숭고한 목표가 아니겠습니까. 시인 테니슨은 '인생길을 다 건넌 후, 우리의 주를 상면(相面)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자기 마음에 평화가 있다는 정도를 넘어서 다른 사람 사이에 평화를 이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몸을 주어,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 2:14) 하나님과 인류,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를 이룩하신 임마누엘이란 것을 의미하십니다. 팔복의 진도가 최정상에 달하여, 팔복 중에 있는 '역설'도 최정상에 달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최후의 복이라고 합니다.
보통 기하학은 '유-크릿트'의 원리를 따릅니다만, 고등기하학은 '비유-크리트'의 학인 것처럼, 고등 신앙에는 육의 환란을 오히려 축복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성 바울은 그가 진리를 알기 전에는 바리새인, 히브리인증에 히브리인, 가말리엘 문하의 학벌, 제사장의 배경, 또 아마 산헤드린 회원 등 육적 조건을 다 구비하여 세상의 행복의 조건을 다 완성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나고 참 진리를 안 후부터는 모든 것을 분토처럼 버리고(빌 3:8), 무일푼의 신세가 되어 매를 맞고 투옥을 당하고 주리면서도(고후 11:23~27) 오히려 기뻐하였습니다. 최고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하기를 "은혜를 받는 신자 즉, 고등신자는 믿는 것 뿐만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도 받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도 역설의 복음에 감격하였습니다.
또한 역설의 복음(고전 1:18~25, 롬 1:2~4)에는 "복음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복음의 복음이요, 복음의 화신(化身)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그리스도 인격의 역설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동시에 마리아에게서 나신 사람의 아들입니다. 이와 같이 신인양성(神人兩性)을 겸유하시고, 그에게서 하나님과 사람을 우리는 만나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사고나 연변(論理)으로 감당할 수 없는 최대의 역설입니다.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시고, 무한한 자가 제한의 세계에 사셨고, 초역사적 인물이 역사에 들어오신 분이었습니다. 그 분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실로 최대의 역설적 존재입니다. 그의 최후를 지켜 본 십자가 밑의 백부장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하였고, 유대 교권자들은 먹기를 탐하는 자, 세리와 죄인의 친구, 사귀왕, 바알세불에 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인격이 역설이고, 그의 교훈이 역설적입니다. 결과적으로, 그가 성취하신 십자가의 복음은 역설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역설을 말합니다. 십자가의 양면성인 인류에 대한 사랑과 죄지은 인류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공의(公義)를 만족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역설입니다.
2005년 6월 8일
山下연구소 소장: 양 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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