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주 날개 밑
(본문: 시 36:1~12)
1). 서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상황이 갑자기 감당할 수 없는 시련과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만나거나, 불가항력적 사건을 접하게 되는 것을 "상황적인 광야”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런 상황적인 광야로 내몰릴 때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그 처방책을 본문의 말씀은 제시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막가면 막가는 한계상황일수록, 오늘 본문의 시인 다윗처럼 더욱 주의 날개 밑으로 피하는 삶을 살아야 할 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날개 아래 피하는 삶이란 더욱 주님께만 앙망하는 신앙과 향긋한 사랑을 받쳐 드릴 때, 인자하시고, 성실하시며,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주의 집에 살진 것과 복락의 사랑으로 우리 영혼을 풍성하고 시원하며,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밝음과 어두움이 교차 되는 내용이 전개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가슴 깊이 새겨주는 교훈을 깊이 간직했으면 합니다.
2). 본문의 이해(Text): 본문의 시는 교훈적인 시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하여(5~9), 이를 거역하는 악인의 생태와(1~4절), 이를 따르는 선인의 기도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시인 다윗의 만년의 시로 보입니다.
3). 본론(Context): 본문의 시는 광명과 흑암이 교차 된 인생 實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 부분(1~4절)은 악인들이 설치는 어두운 현실을, 두 번째 부분(5~10절)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한 밝은 현실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자의 주인공은 악인이며, 후자의 주인공은 의로운 사람, 주를 아는 자, 마음이 정직한 자입니다. 악인의 자랑은 교만이요(11절), 의인의 자랑은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고 합니다.
36편 시인은 전반부에서 지혜로운 자와 같이 악인의 잘못된 것을 경고하고 둘째 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한 사람으로 무엇이 사람들에게 만족한 일인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시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 자신이 많은 경험을 가진 자로서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서 주석자 중에는 이 전반부와 후반부는 그 언어와 사상의 주제가 서로 다르기에 각각 독립된 다른 시가 편집자의 손에 의하여 여기서 합쳐져 하나의 시가 되었다고 하지만, 반드시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 시는 일반적인 삶의 현실을 말하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려는 의도를 보여주기 때문에, 시인 자신이 그 시대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지혜 자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교훈의 중심은 무엇이 가장 보배로운 삶인가를 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당신의 사랑이 어찌 그리 보배로운지요.”(7절) 이는 가치론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 삶에서 무엇이 가장 귀한 것으로 생각하느냐에 대한 질문에 답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 자신의 가치관이 있습니다. 제각기 자신의 소중한 것을 찾고 그것을 오래도록 간직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도 복음을 설명하실 때도 값비싼 진주 또는 밭에 감추어진 보화에 비하여 이 보화를 구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산다고 했습니다. (마 13:44~46) 우리의 보배가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소중히 여기는 자기 보화에 대해서는 이것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항상 소유하기를 원하고 또 그것을 가진 것을 인간 삶의 보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어떤 보화를 가졌거나 그것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 보배로 자신이 그 보배만큼 값진 인생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의 시인이 우리에게 소개하는 보배는 이 세상의 어떤 물질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의 헷세드”, 그 계약의 사랑, 우리가 쓰는 사랑이란 말이 포함한 좋은 것보다 더 좋은 것을 말하는 '헷세드'(דסֶח)를 보배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표시하는 이 '헷세드'는 단순한 개념도, 사랑도, 어떤 이념도 아니고, 그것은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인간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위한 사건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사건입니다. 인간도 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사건입니다. 인간의 가능성이 절망 되었을 때,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을 동시에 보여주는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성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건을 '헷세드'라고 했습니다. 가령 출애굽 사건 같은 것, 이스라엘의 힘과 지혜로서는 어찌할 수 없었던 어려움을 하나님이 해결해 주신 사건을 말합니다. 대체로 이런 사건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그 마음속에 사랑이 차고 넘쳐서 행하신 사랑의 행위를 말합니다.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한 하나님의 헷세드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구원행위는 모두가 하나님 사랑의 행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선택한 일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신 7:6~8) 이스라엘과 더불어 맺으신 계약과도 사랑에 기초한 계약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헷세드'(דסֶח)를 “계약적 사랑”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40년 동안 지켜 인도하신 일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부모가 그 자식을 품에 안음과 같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신 1:31) 가나안 복지에 들어감도 나라를 세움도 그 나라 역사를 이끌어 주심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호세아는 누구보다도 이 헷세드에 감격하여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 마음속에 너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나 내가 견딜 수 없구나!” (호 11:8)
이렇게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하나님의 헷세드에서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시인은 이러한 사실을 실감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헷세드(사랑)는 어찌나 보배로우냐! ”“얼마나 값진 것이냐!”라는 감탄을 하여, “사람들은 이 사랑의 날개 밑에 피할 때, 참으로 안전함을 얻을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시인은 이런 안전을 깨우치도록 우리 인간들이 사는 이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본문 시 처음에 말하고 있으며, 그래서 주 하나님 사랑의 날개 밑으로 피해야 할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1~4절)
1~4절을 좀도 쉽게 풀이해보면, “악인들은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지 아니했으므로, 자기 마음대로 악행을 행합니다. 자기를 심판하는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는 악행을 마음대로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교만하게 자기가 어떤 악을 저질러도 그것이 죄라고 할 수 없으며 설사 죄라고 해도 그것을 죄로 규정 지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권력을 쥐고 하는 일이기에 사람들이 자기 하는 일을 비판 할 수도 없거니와 자기를 미워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자기를 말로나 글로나 행동으로 거역하는 자는 곧 자기의 채찍이나 벌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악인의 말은 곧 법조문이 되어 사람을 구속할 수 있으나, 그 말은 죄악을 펴는 일이요. 사람들 앞에 공공연하게 거짓을 감행하고 이것을 참이라고 큰소리칩니다. 그에게는 이미 빠른 일을 할 수 있는 지혜도 멎었고 선행을 할 기능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리에 누워도 죄악을 도모하고 그의 삶 자체가 악의 창출밖에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본문의 시인은 이러한 악인이 사는 세상에서 오직 안전한 길은 하나님 사랑의 날개 밑으로 피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안전을 누리며 하나님이 주시는 살진 것으로 만족할 수 있으며, 복이 샘솟듯 하는 생명의 물줄기를 쉴 사이 없이 마실 수 있게 됩니다. 이는 곧 사람 생명의 원천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강수를 마시고 사는 사람은 악인이 설치는 어둠의 세계에서도 빛을 입고 사는 환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광명, 만족, 생명, 희열,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의 날개 밑에 있기에, “하나님의 사랑은 어찌나 보배로운가!”를 노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문 시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교훈은 세상이 악하기에, 하나님의 사랑의 날개 밑에서는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 날개 밑>은 주님께서 은혜로 보호하여 주신다는 상징의 말씀입니다. 시 36:7에 보면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밑에 피하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암탉이 그 병아리를 날개 아래 보호하여 외부적인 해를 면하게 하고, 또 따스한 사랑의 온기와 위안을 주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밑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시 57:1) 라는 말씀과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시 63:7)라는 말씀들은 비슷한 내용입니다. 또한 신약성서엔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눅 13:34)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순전한 사랑을 말하고 이 사랑을 거역한 유대인을 책망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이러한 성경 구절의 내용 속에 <주 날개 밑>이란 말씀이 항상 함께 표현되어 있습니다. <날개>란 곧 안전하게 보호하신다는 상징으로 말씀하였고, 그 보호의 이면에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라는 약속이 강력하게 강조되어 있습니다. 또한 <날개 밑>은 밤이 깊었거나, 비바람이 불거나 관계가 없이 평안히 쉴 수가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품속입니다. 이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안전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양 날개를 가지셨는데, 그것은 사랑과 공의의 날개입니다. 사랑의 날개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공의의 날개로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사랑의 날개로 우리를 품어주시고 공의의 날개로 악인을 심판하십니다. 두 날개가 나타난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인간을 구속하기 위하여 아들을 심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이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의 양 날개 밑에 피할 수 있다는 것은 가장 큰 행복입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데리고 다니며 모이를 주워 먹이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지요. 암탉은 위험의 대상이 닥쳐오면 새끼병아리를 모두 날개 아래로 숨기고 결사적으로 대항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구원받아 주의 날개 밑으로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품어 보호해 주십니다. 주의 날개 품속에 거하는 사람은 ‘올무’에서 보호받습니다. 올무란 새나 짐승을 잡는 데 쓰이는 도구입니다만, 이런 인생의 올무에 걸리면 벗어나 오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품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죄악 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당할 여러 가지 올무에 걸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주의 날개 그늘에 거하는 사람은 삶의 흑암으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흑암 중에 진행되는 악의 세력에 대하여 인간은 속수무책입니다. 그러나 순식간에 재난이 닥칠지라도 <주 날개 밑>에 거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그 시련에서 구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권능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감격스러운 축복입니까! 이런 주의 사랑의 날개 밑에 항상 거하는 우리가 되도록 합시다.
4). 결론: 본문의 시인은 세상에서 인생의 삶이란 악인의 올무와 교묘한 악의 창출만 생각하는 위험한 곳에서 살기 때문에, 오직 안전한 삶은 하나님의 사랑의 날개 밑으로 피하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안전을 누리며 하나님이 주시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며, 복락이 샘솟듯 하는 생명의 물줄기를 쉴 사이 없이 마실 수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는 곧 사람 생명의 원천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말하는 것이랍니다. 시인의 소신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한 인생은 광명, 만족, 생명, 희열을 누리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날개 밑에 있기에, “하나님의 사랑은 어찌나 보배로운가!”를 노래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주 날개 밑>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보호하여 주신다는 상징의 말씀입니다. 본문의 36:7에 보면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밑에 피하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암탉이 새끼병아리를 날개 아래 보호하여 외부적인 해를 면하게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 의미이며, 또한 <날개 밑>은 밤이 깊었거나, 비바람이 불거나 관계가 없이 평안히 쉴 수가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품속입니다. 이런 주의 사랑의 날개 밑에 항상 거하는 우리가 되도록 합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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