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감미로운 묵상
(시104 : 1~35)
1). 서론: 인간은 바다와 하늘과 땅을 보면서 인간 존재를 인식하고 느껴왔습니다. 고대의 우주관은 하늘과 땅, 지하로만 구분하였습니다. 하늘과 지하의 중간인 땅 위에는 인간이 존재해 왔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역이고, 인간이 죽으면 땅속 지하로 내려가며 거기는 죽은 이들의 세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간다.”라고 했으니 하는 말입니다.
오늘 104편 본문 시의 주제는 인간과 자연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그 저변에 흐르고 있는 사상은 자연이 인간의 찬미를 통하지 않고 그 자체가 찬미의 주체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 세계에는 인간의 찬미와 똑같이 자연의 찬미가 나란히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시입니다. 이제 창조주 하나님, 피조물인 인간과 자연의 3각 관계를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과 사랑을 지극정성으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2). 본론(Text): 103편과 같이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말로 시종 같은 저자의 것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송축의 내용이 전편에서는 하나님의 자비였으나, 여기서는 그의 창조의 위업입니다. 내용도 대체로 창조의 6일을 따르고 있습지다. 즉 하나님의 영광(제1일, 1~4), 땅과 물(제2일, 5~13), 초목과 새와 짐승(제 3일, 14~18), 일월(제4일, 19~23), 바다와 어족(제5일, 24~30), 및 결론: 여호와를 송축하라(31~35)로 되어 있습니다.
3). 본론(Context): 본문의 시는 대표적인 지혜시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논리를 전개하여 사람을 교훈하는 지혜가 아니라, 읽고 명상하고 노래하며 묵상하는 지헤의 시입니다. 본문의 시는 순수히 이스라엘적인 노래라기보다 애굽의 아메노피스 4세가 지었다는 "태양의 노래"를 모방했거나, 그 영향을 크게 받은 시(詩)라 함에 많은 주석가들의 의견이 일치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시는 103편의 저자와 동일하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궁켈, 커크파트릭, 슈미드)
그 이유는 이 두 시는 그 시작과 끝마침이 똑 같이 "내 영혼아, 야웨를 찬양하라."로 되어 있고 문장의 유사점도 있으며 하나님의 은총과 주권을 찬양함에도 그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103편은 역사에 더 관심을 가졌고, 104편은 자연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킨 노래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유사성에 대한 문제보다도 이 104편은 시편만이 아니라 구약 문학 중에서도 가장 특징 있는 시의 하나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워즈워드"라 할 만큼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만물에 대하여 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아름다운 명칭과 묵상을 다양하고 소상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서구신학이 자연의 가치를 별로 인정하지 아니하고 인간의 정복 대상물로만 여겨와서 서구 문명을 이룩한 과학과 기술의 발달을 가져 왔습지다. 그러나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바르트와 브룬너 논쟁의 결과로 자연의 위치가 인간과 그 역사만큼 소중하게 다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자연 그것이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 인간의 찬미 속에 감추어지고 말았습니다. 즉 인간이 자연을 찬미함에서 자연의 위치가 밝혀지고 있지만, 실상은 104편 저변에 흐르고 있는 사상은 자연이 인간의 찬미를 통하지 않고 그 자체가 찬미의 주체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 세계에는 인간의 찬미와 똑같이 자연의 찬미가 나란히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시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시는 동양적인 자연관에 매우 가깝습니다.
자연 그것이 주체(主體)가 되어 인간과 똑같이 하나님을 찬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시인은 자신이 자연물상(自然物象)을 본다기보다 자연을 대신해서 시인의 언어로 자연의 물상을 기록한 시입니다. 마치 창조의 신앙이 짙게 깔려 있어 그 신학사상에 있어서 창세기 1장 기자와 같은 계열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창세기 1장이 어느 예배의식에서 바벨론의 창조설화와 같이 낭송된 것이라 한다면, 이 시편 104편은 그러한 공동 예배 때에 찬송가로 불린 노래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노래한 자연만물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에서 그 존재와 그 활동이 언급되었습니다. 자연은 자기 스스로 존재하게 된 것이고는 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있게 하셨기 때문에 있다는 신과의 관련성을 자연은 자의식하고 있습니다. 땅의 기초도 하나님이 그 기초를 하나님이 두셨고(5절) 땅과 물의 경계선도(6절)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솟아오른 산과 낮아진 골짜기도 하나님의 조화로 된 것입니다.(8절)
이 골짜기에서는 샘이 솟아나고 여기서 시작한 물줄기는 시내를 이루고 강을 이룸니다.(10절) 이 샘물과 강물은 들의 짐승들, 나귀, 공중의 날짐승들에게 주어 이 물을 마시고 만족한 새들은 나무가지에서 노래를 부릅니다.(12절) 이렇게 이 시는 우리가 보는 자연 속에 살아있는 자연의 모습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은총으로 움직이고 있는가를 보여 줍니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요, "영광과 존귀로 관씌움을 받은 존재(시8:4)이지만, 이 사람도 하나님이 만드신 대자연 속에서는 하나의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자연과 만물을 지배한다는 제사문서(P) 기자의 말은(창 1:28) 자연과 대등한 위치에 있고 서로 협조하고 보충적으로 상호조화되어 있는 자연의 참 모습을 몰라서 본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P문서의 사상에서만 자연을 보아 온 서구의 신학이 얼마나 불충분한 신학이었는가를 이 본문 시 104편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가축을 위한 풀이나 사람을 위한 채소(14절)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여기 인간과 가축은 파조물의 위치에서 보면 동등한 것입니다. "사람이 먹는 식물, 그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 힘을 돋우어 주는 양식"(15) 모두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특별한 존재가 되어서가 아니라, 날짐승에게 물을 주고 가축들에게 풀을 주심과 똑같이 인간과 만물의 존재는 하나님의 은총의 손길에 달려 있는 동일한 존재임을 설명합니다.
새들을 위한 집, 너구리같은 야생동물들의 거처지, 젊은 사자의 식물 등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손에서 그 필요한 것을 얻고 있다고 했습니다.(18~21절) 자연은 진실로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일터입니다. 종래에 인간 역사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과 그의 구원사를 생각해 온 것은 얼마나 일방적인 이해입니까! 진실로 야웨 하나님께 하시는 일은 어찌 그리 많은지,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함을 노래했습니다.(24절)
만물은 때를 따라 그 먹을 것과 필요한 것을 하나님에게서 얻고 있습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게 살다가 하나님이 그 생명을 불러가시면 그는 흙으로 돌아갈 뿐이라고 했습니다.(28~29절) 여기 본문 시에는 물질과 명예에 대한 욕심이나 권력이나 금력에 대한 탐심과 그 쟁탈전이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이 나고 죽는 것은 다만 자연의 넓은 품 안에서 되어지는 일방적인 현상, 즉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면 때어나고 하나님이 그 생명을 이 땅에서 불러가면 흙으로 돌아가는 자연스런 현상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자연 속에 정하여 주신 순리대로 살다가 죽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할 일은 다만 그 생명이 있는 날 동안 창조주 하나님을 찬미하고 노래하는 것뿐이라고 시인은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 "나는 한평생 야웨를 노래하며 내 생명이 있는 날까지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라."(33절)라고 했습니다. 이 노래와 찬양만이 인간이 일평생 진실하게 해야 할 아름다운 묵상이라고 했습니다.(34절) 이 노래의 책임, 이 찬양의 의무만이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고 살 인간이 할 일이라고 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성서적인 조명이 비쳐지기 전부터 자연의 품이 얼마나 숭고하고 공평하고 또 화목하고 아름다운가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문학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 자연이 문자 그대로 스스로 있게 된 존재로만 아는 자연관을 기독교의 창조신앙으로 설명해도 아무런 무리가 없습니다. "아름다운 삼천리 금수강산"이란 말을 하나님의 창조 과업과 그 은총의 역사(役事)를 떠나서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 한국 기독교인이 자연을 새롭게 이해하고 신교의 과제로 삼아야 할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 이상과 같이 본문을 좀더 쉽게 풀이 해 보았습니다. 자연을 신격화하거나 단지 물질로 보지 않고 자연을 성례전적 존재로 본 본문 지혜 시로써, 바로 기독교의 생태학적 시(詩)라고 하겠습니다. 자연은 신성을 가진 것도 아니며, 단지 세속적 물질로서 우리가 마음대로 이용하거나 착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연이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책임있게 사용해야 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하고 영광을 돌려야 할 성례전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태학적 세계관의 정립, 개발과 실천은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인류의 새로운 과제라고 사료됩니다.
이따금씩 도시 빌딩의 짱글 속을 떠나 대자연의 품에 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계절에 따라 변화무쌍한 자연은 모두에게 반면교사(反面敎師)이기 때문입니다. 도시 빌딩에서는 인간의 능력과 그 능력이 창조해 낸 문명의 이기밖에 보이지 않아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 하지만 대자연의 품에 안겨보면, 거기에는 인간의 능력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 들에 핀 야화, 쪽빛 푸른 하늘, 떨어지는 낙엽에서 새봄을 준비하는 새움의 기지개, 강풍 폭우 낙뢰 속에서 '인간이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불쌍한 인간들을 향하여 눈을 돌려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십니다. 생활, 의식주 문제 때문에 지치고 지친 가난한 무리들을 향하여 빵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주시지 않고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만 하십니다.
공중의 새, 들의 백합화 등 아름다운 자연은 빈곤에 지치다 못해 마음까지 가난하게 된 우리 인생에게 영원한 스승으로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자연은 침묵하는 법을 알려줍니다. 봄바람과 가을비에도, 그 여름날 폭풍우와 벼락에서도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소리 없는 말이 온 땅에 통하고, 그 침묵의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게 합니다. 봄에는 연초록으로, 여름에는 녹음으로, 가을엔 천산홍엽(千山紅葉)으로, 겨울엔 소복단장을 하고 아무런 말이 없이 그냥 있습니다.
<대지>의 저자 <펄벅>은 '마른 잎은 굴러도 대지는 살아있다'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외세에 의해서 중국 땅이 영국과 일본의 발굽아래 짓밟혀도 영원히 그 땅을 정복할 수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전쟁의 포화에서, 골육상잔(骨肉相殘)의 비극 속에서 대지는 한때 통곡하고 눈물도 흘렸지만 고요히 인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성을 가진 동물, 말하는 동물인 인간의 '말' 때문에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고, 우리가 차가운 이성을 앞세울 때 뜨거운 신앙의 정열은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제일 두려운 상황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려두시는 순간입니다. 로마서 1장 21절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라고 하시며, 하나님은 침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앙 생활에서 무거운 침묵에서 하나님의 고요한 음성을 듣는 기도 생활은 말보다 능가한 예지를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듣는데서 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어깨를 맞대고 긴 이야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린 이따금씩 정신없이 대지를 밟고 뒹굴던 그 자리에서 고요히 침묵의 날개를 펴고 하늘을 훨훨 날아 보아야 합니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저는 듣겠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만이 미지(未知)의 대지를 지나 갈 수 있는 예지라고 생각합니다.
홀로 봄 동산의 공원을 산책하며 생명이 움트는 나무 밑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그런 시간과 공간을 가져보란 말입니다. 요한복음 1장 48절에 "무화과 나무아래 있었던 '나다나엘'을 보았다."는 말씀을 하시고 그의 인간의 진실성을 격찬하여 "자네야말로 참 이스라엘이다."라고 함은 무화과나무 아래 친구들과 떠들썩한 세상 잡된 이야기보다 자기 영혼을 성찰하는 제단을 쌓아두었다는 말입니다. 많은 기독자들이 무화과나무 밑에서 이슬에 몸을 적시며 고민하여 잠못 이루는 진실의 밤을 보내지 못함이 오늘 우리들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자연의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복종'입니다. 다소곳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서 말없이 복종합니다. 새싹이 파릇하게 돋는 봄 동산에, 그 길고 긴 장마와 폭풍우 속에도 산사태가 나고 길이 끊어지고 사람들이 죽어지는 그때도, 찬 이슬이 내리는 허전한 만추에도 그리고 눈보라 치는 엄동설한에도 자연은 말없이 복종합니다. 사람들이 그 아름다운 백합화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거나 말거나 자연은 있는 그 자리에서 자기 나름의 향기와 미를 발합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절후는 빈틈없이 질서 정연히 돌고 돕니다. 진실로 그대는 창조주 하나님의 충성스런 충복인 것을 찬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왜 이다지도 천륜과 인륜사이에서 그처럼 많이 방황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진실로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는 순종이 이 사색의 계절인 가을에 나올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침묵 속에서 차분한 복종이 나오고, 그러니 절로 삶의 기쁨을 자연에서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어두운 내일의 운명의 그림자 때문에 결코 오늘에 주어진 삶의 기쁨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저들은 내일 일은 내일 보자고 합니다. 저들은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주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고, 다만 삶이 주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알고 있을 다름입니다. 그러기에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어 땅에 떨어지는 것도 주님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공연히 내일 일을 미리 당겨서 염려하며 슬퍼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연에서 지혜를 배우라고 하십니다. 때로는 공원 벤치에 홀로 앉아 침묵 속에 자신을 성찰하는 중에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들어 봅시다. 그 음성에 자연처럼 복종해 봅시다. 제가 저를 아는 것보다 주님이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주님 인도하십시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주어진 오늘에 기뻐하고 내일은 당신이 주관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끝.
4) 결론: 본문의 시는 창조자 하나님께 대한 기도와 사랑, 하나님을 향하게 하는 완전한 고독에 대한 소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소망은 가을이라는 계절이 주는 일반적인 느낌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가을은 낙엽이 지는 명상의 계절이요, 풍성한 열매가 맺는 결실의 계절이며, 누군가를 찾게 하는 고독의 계절로 묵상 되어집니다. 가을의 상념(想念) 속에서 반성의 기도를 할 수 있도록, 가을을 맞아 식물들이 과실을 맺듯이, 인간도 창조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라는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가을의 고독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찾는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하는 기도를 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서늘한 가을의 계절이 왔습니다. 자연의 품에 안겨보면 더 한층 가을을 만끽하게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 정황으로는 가을은 아픔의 계절입니다. <가을의 기도-김 현 승>: "가을에는/기도하게 하소서/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게 하소서. 가을에는/사랑하게 하소서/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비옥(肥沃)한/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홀로있게 하소서/나의 영혼,/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소슬바람 한 줄기 가슴을 스치는 날, 쌓이는 지난날의 아쉬움으로 잠 못 들어 뒤척이고, 낙엽 하나 떨어지는 소리에도 터질 것 같은 고독의 눈물이 고이곤 합니다. 모든 것을 채워도 허한 가슴 공허함으로 고혹(蠱惑)을 새겨 놓고, 가을 녘 홀로 눈시울 적실 때, 갈대 꽃 소리만 요란합니다. 가을은 붉게 멍든 우리 인생의 가슴에, 꿈인 듯 서성이던 자리에 추억은 아련하고, 두고 간 그리운 이들의 숨결은 여전한데, 가슴을 파고드는 가을의 쓸쓸함을, ‘그 무엇으로 이 가을의 아픔을 치유할 것인가.’가 가을 계절의 낭만적인 허무감이 감돌게 합니다. 이 허무감을 주님께서 치유토록 우리는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끝.
2025. 10. 9.
山下연구원: 양 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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