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궁궐과 광야의 대결: 요한 크리소스톰
2). 요한 크리소스톰: 이번에는 동로마에서 황제에 맞선 위대한 주교가 등장하였습니다. 수도사 출신으로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풀의 대주교가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49~407)이 그 주인공입니다. 그는 시리아 안티오크(안디옥)에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크리소스톰은 10대부터 수사학과 철학, 신학에 심취하였고 수도사가 되어 극단적인 수련을 하였습니다. 너무 많은 날들을 금식하여 장이 손상되었고 늘 쇠약했습니다.
요한은 안티오크에서 사제가 된 후 곧 뛰어난 설교자로 이름이 났습니다. 그의 설교가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사람들은 그에게 "항금의 입"(Golden Mouth)이란 뜻의 '크리소스톰' 별칭을 붙여주었는데, 이것이 그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사실 그는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설교자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당시 신학은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크에 세워진 두 학파가 주도하였고 상호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은 3세기의 위대한 교부 오리겐의 영향을 받아 성서를 우의적인(allegorical) 시각에서 해석하였습니다. 그러나 안티오크 수도사 학자들은 문자적이고 도덕적인 성서 해석을 선호하였습니다. 크리소스톰도 백성들에게 성서를 실천적인 규범으로 가르쳤습니다. 일전에 데오도시우스 대제가 세금을 더 늘리자 안티오크 시민들은 폭력 시위를 벌였습니다. 대제가 분노하여 군대를 보내 시민들을 응징한다는 풍문이 들려 왔습니다.
안티오크 시민들은 이내 공포에 잠겼습니다. 이때 요한 크리소스톰은 20일 동안 백성들에게 설교하며 무법한 삶에서 돌이키도록 촉구하였고 많은 시민들이 개심하고 질서가 회복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시민들 처벌을 유예하였습니다. 안티오크에서의 12년 활동으로 크리소스톰은 대중적인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데오도시우스를 뒤이은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는 398년 전격적으로 크리소스톰을 콘스탄틴노풀의 대주교로 초빙하였습니다.
군대가 와서 거의 강제로 크리소스톰을 이송해갔습니다. 가장 옝예스런 자리에 오른 크리소스톰은 가장 화려한 도시에서 가장 청빈한 수도사의 모습으로 일했습니다. 그는 콘스탄티노풀에 병원을 세워 빈민 환자들을 치료하고 자선을 강조했습니다. 대중들은 새로운 대주교를 환영했지만 모두가 좋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황족들과 귀족들, 그리고 고위 사제들은 대주교의 질책을 듣게 되자 모두 적대자가 되었습니다.
특히 향락과 사치에 중독된 여인 황후 유독시아(Eudoxia)는 대주교를 싫어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소스톰은 호사스런 방종을 견책하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크리스도께서는 벌거벗은 몸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제국내에 굶어죽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당신들은 매일 잔치를 벌이며 또 헐벗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실크로 치장하고 다닙니까?" 대주교는 끝내 그 직책에서 5년 이상 버티지 못하였습니다.
403년 황후와 귀족들은 주교단을 장악하여 크리소스톰을 파면하고 귀향을 결정했습니다. 그 때 콘스탄티노풀에 갑자기 지진이 발생하자 이를 하늘의 진노로 여긴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크리소스톰을 복귀시켰습니다. 얼마 후 유독시아 황후가 교회당 앞에 자신의 석상을 크게 세우자 대주교는 여지없이 이를 비판하였습니다. 강직한 크리소스톰의 모습은 부패한 황궁에 맞지 않았습니다.
결국 두달 만에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그를 끌어내리고 변경으로 귀양을 보냈습니다. 시민들이 대주교의 복위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으나 황제는 오히려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하였습니다. 로마 교황도 항의단을 동로마에 보냈지만 이들조차 구금되었다가 쫓겨났습니다. 크리소스톰의 귀양지는 수도에서 가장 먼 아르메니아 코커서스였습니다. 407년 두 명의 젊은 병사가 낮에는 뜨거운 날씨로 밤에는 매서운 추위로 일관한 일기 속에서 60세의 대주교를 학대하며 두 달 동안 끌고 갔습니다.
크리소스톰은 결국 이송 행로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다음의 한 문장이었습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께 영광을!" (Glory be to God for everything!) 요한 크리소스톰은 대바질(Basil the Great),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등과 함께 '동방교회'에서 "위대한 세 교사"로 추앙되었습니다. 동방 지역의 교회 건축물에는 빈번히 이들 세 교부들의 성화가 그려졌습니다.
로마 역사에서 향락의 자리를 탐한 이들은 수없이 많았어도, 황제들의 부도덕함을 꾸짖고 백성들을 대변한 이들은 적었습니다. 암브로시우스나 요한 크리소스톰을 위대한 설교자로 부르는 것은 단순히 그들의 수사학이나 화술의 탁월함 때문이 아니라, 진리를 대변하는 힘, 청빈한 사람, 그리고 약자들에 대한 사랑이 실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굳어가는 교회와 추락하는 로마 제국을 직시한 시대의 예언자들이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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