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박물관열람실(72)

52. <"407호!, 407호!">/아들 聖民 이야기

solomong 2025. 9. 2. 10:54

52. ​<"407호!, 407호!">/아들 聖民 이야기

[이 이야기도 암울하던 군사문화시대의 에피소드이다. 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양해를 바라는 바이다. 결코 경찰과 군(軍) 전체의 명예에 누를 끼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여기에 전제로 밝혀 두는 바이다.]

우리 집 아들이 대학 4학년 때 야기된 한 사건이다. 하루는 친구들과 캠핑을 간다고 하면서 아침 일찍이 캠핑 장비를 메고 집을 나선지 몇 분이 안 되었다. 어디서인지 “407호!, 407호!”라는 고함 소리가 들리었다. 급히 베란다로 나가보니, 아파트의 단지 출입구에서 우리 집 아들이 승용차 밑에 누워있는 것을 멀리서 볼 수 있었다.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은 교통사고로 차 밑에 깔려있다는 생각에서 맨발로 우리 내외는 급히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차 밑에 누워있는 우리 집 아들 주변에는 정체모를 사람들이 10여명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 즉시 나는 “이것은 교통사고가 아니고, 사복 경찰이구나!”하는 것을 직감을 할 수 있었다. 아내는 계속 교통사고인줄 알고, 아들보고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고 물었다.

그때 나는 “여보! 교통사고가 아니고, 사복 경찰들이 온 것입니다.”라고 이야기 해 주었더니 그제야 안심하면서, “민아! 왜 차 밑에 누워있니?” 물어 보았다. 우리 집 아들이 말하기를 “아파트를 나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10여명이 자기를 잡으려고 하기에 그들이 대기시켰던 차 밑으로, 들어가서 부모님께 알리지 않고는 가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차 밑에 들어가서 차를 붙잡고, “407호!,407호!”(407호는 우리 집 아파트 호수이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알려 주기위해 407호를 불렸다는 것이다.(1988년)

그래서 상황을 판단하고 나는 “민아! 나오너라. 그리고 경찰차를 타고 가거라.”라고 했다. 이젠 우리들이 너의 행방을 알았으니 염려 말고 순순히 따라 가라고 했다. 그럼 경찰들이 우리 집 아들을 잡아가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었던가. 우리 집 아들의 말에 의하면 아래와 같다: 1987년 대통령 선거 때(우리 집 아들은 군대 복무 중에 있을 때였다.), 영내에서 특정후보를 찍으라고 갖은 선심을 다 했다는 것입니다.

식사도 돼지고기와 술, 휴가 등의 선심이 대단했다는 것이다. 드디어 대통령 투표일이 당도했다.(당시는 영내에서 투표소를 설치해서 투표를 하게끔 되어있었다.) 그런데 우리 집 아들은 군사문화를 종식시키고, 문민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선심 공세에도 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투표용지에 투표한 것을 중대장이 거기에 앉아서 일일이 검사하고 투표함에 넣었다는 것이다.

그렇게도 선심을 베풀고 했는데, 오직 우리 집 아들만은 군대에서 특정후보를 찍으라고 한 것에 반해서, 문민 대통령 후보를 찍었다는 것이다. 이 투표용지를 햇빛을 통해서인지 전기 불을 통해서인지 잘 모르겠으나, 하여튼 봉투 안을 살펴서 자기들이 지정한 후보자를 찍지 않았다는 이유로, 배신자라고 하더란 것이다. 하여튼 중대장이 불러서 갔더니, “이 배신자야!”하면서 구두 발로 앞정강이를 마구 차서 피가 줄줄 흐를 정도로 맞았다는 것이다.(지금도 그 흉터가 앞정강이에 남아 있음.)

그리고는 제 일선지대의 전차부대로 당장 전출을 보내더란 것이다. 이 소식을 편지로 접하고, 나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그 부대를 찾아가서 항의를 했다. 지휘관들이 사과를 하면서, 당장 우리 아들을 원대 복귀를 시키고 말았다. 이렇게 우리 집 아들은 한 고비 홍역을 치루고, 그 후 제대를 하였다. 학교에 복학하여, 당시 대학교마다 학생들이 ‘부정선거’에 대해서 항의의 데모가 대단하였다.

나는 우리 집 아들이 데모대 제 일선에 서 있을 때 마다, 교수로써가 아니라, 아버지로써 아들에게 “너무 앞장서서 과격하게 하지 말라.”고 하면서 제일 후미로 데리고 와서 앉히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학생들로부터 야유를 받았다. 그러나 “부모의 심정은 그렇지 않으니 이해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 집 아들은 “나는 부정선거를 직접 목격하고, 아픔의 체험을 한 자이다.” 하면서 나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다가 양손에 화염병을 들고 있는 모습이 경찰의 사진에 포작 되어 찍혀서 그 증거로 지명수배가 되었다. 나는 관활 경찰서장에게 찾아가서 “아버지의 심정에서 부탁을 드립니다. 나의 교수직을 걸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서약을 하고, 한 번만 용서를 구하였다. 이렇게 하여 경찰서장도 받아 들여서 문제를 해결하였다.(그때 보안과장, 정보과장도 배석했다고 기억이 된다.)

그런데 그 후 얼마 안 되어 관활 경찰서장이 바뀌자, 전임자의 약속을 저버리고, 우리 아들을 잡으려고 온 날이 바로, “407호!, 407호!” 우리 집 아들이 고함치던 날이었다. 결국 우리 집 아들은 ‘화원 교도소’에서 3개월 삼복더위에 고생하면서 재판을 받아 ‘집행유예’로 풀려나게 되었다. 나는 이런 사건을 통해서 몇 가지 느낀 바가 있었다. 첫째로, 우리 아들이 “407호!, 407호!” 하면서, 차 밑으로 들어가 누어서 차를 붙들고, 부모님께 알리고 잡혀 가겠다는 그의 생각을 곰곰이 새겨 보았다.

그래도 그가 행방을 부모님께 알리고 가겠다는 것에, 그가 좋을 때나 어려울 때나 의지처의 기둥이 있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그는 행복한 자인 것에, 느껴 보았다. 만약 그런 것이 없었다면, 그는 얼마나 고독하고 불안하고 고통 속에 헤매었을까 생각해 보니, 혈연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었다.

둘째로, 관활 경찰서장과 본인과의 교수직을 걸고 약속했으면, 나를 신뢰해 주어야 할 것인데, 서장이 바뀌었다고(후임자에게 이 사실을 인계해야 함에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신감에 분노를 느꼈다.)약속을 파기하고 다시 재론 한 것은 야속한 관계(官界)의 깊은 불신의 골이 깊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 나라 정치 지도자들까지 불신하게 되었다.

우리 백성들이 정부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 줄지의 의구심은-그들의 백성 대한 공약사항은 믿지 않기로 했다는 말이다. 정말 관계(官界), 정부 및 정치가들을 믿고 신뢰하는 그런 풍토와 문화 환경이 빨리 지켜지는 우리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지금도 간절하다. 셋째는,리 집 아들이 ‘화원 교도소’ 3개월(삼복더위가 한창 일 때)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면회를 가서 위로하고, 부모의 사랑을 진실로 표현 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

나중에 그가 출옥해서,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이번에 절실히 체험했습니다. 정말 부모님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그의 만강에 넘치는 고마움의 정감을 그는 맛보게 되었다. 「사람은 고생을 통해서 철이 들기 마련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나의 삶에 대한 기본 입장이다. 그는 이런 사건을 통해서, 잃은 것도 있지만, 얻은 것은 더 많다고 나는 생각한다.

네 째로,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매일 같이 넣어 주는 책을 그의 독방에서 열심히 읽고 조용히 자기성찰과 반성, 그리고 수십 권의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지성적으로도 많이 성숙해진 사건이었다고 생각한다. 인간만사는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하듯이 반드시 나쁜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생을 살다가 불운이 다가 왔을 때, 그것을 좋은 것으로 요리해 먹을 수도 있다는 것이 어찌 우리 집 아들의 사건만을 두고 하는 말이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