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귀댁의 따님을 저에게 주시오!"(저의 '회고록' 중에서 옮긴 글)
오늘(1997년 4월 25일)은 우리 부부 결혼 36주년이 되는 날이다. 나는 아침 커피를 마시면서 “여보!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시오.” 하면서 아내에게 반 농담 섞인 말로 물어 보았다. 아내는 “뭐! 4월 25일!, 김현철씨가 「국회 한보특위 청문회」에 증인으로 신문을 받는 역사적인 날이지 뭐요.”라고 대답한다. 요사이 하도 세파에 시달린 아내인지라, 결혼 36주년 기념일도 잊은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는 “당신이 틀렸소!”
오늘이 바로 “우리 결혼 36주년 기념일이오!”하니까, “양 견(梁 堅)한테 시집와서 36년 동안 고생한-지긋지긋한 날인데, 오늘 이라고 별수 있소!”라고 빈정대는 듯이 말을 한다. 사실 나는 아내에게 경제적으로 속만 썩인 36년의 세월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허랑 방탕한 것으로 고생 시킨 것은 아니다. 좀 고급스럽게(?) 고생만 시켜왔다. 미국 유학 5년, 막내 딸 불란서 유학 3년, 장남은 30세가 넘어 결혼해서 돈도 못 벌고 만학으로 일본 동경 유학을 갔다.
저희 부부가 맞벌이해서(이것도 부전자전인지 며느리는 남편 공부시키기 위해서 취직해서 돕고 있는 중이다.)공부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래저래 부모에게 돈을 뜯어간(?) 연고로 잔득 은행 빚만 진 36년의 세월이었다.(독자는 분수없이 유학은 호화판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하여튼, 오늘 36주년 결혼기념일을 맞이했지만, 결혼 전의 「데이트」에 엉킨 이야기부터 한 번 해 보려고 한다.
그녀와 처음 만난 것은 이렇게 해서 만났다. 고 2학년 때 계성학교 운동장에서(지금은 없어졌지만, 지금의 제2교회 부근이 교외 계성고등학교 운동장이 있었다.)가을철을 맞아 시내 교회연합회 주최로 운동회가 열리었다. 제1교회 여고부 대표로 출전하여 100m를 ‘스타트’해서 뛰는데, 그 뛰는 폼이 좋았고 전체적으로 첫눈에 좋은 인상으로 내 눈에 확 들어 왔다. 친구들에게 누구냐고 물어 보았다.
S. M.여고 1학년 윤 정(尹 貞)이라고 했다. 그때 “나는 바로 이 사람이다!”속으로 점을 찍었다. 그 이후부터 우리는 교회에서 자주 만나게 되었고, 정확히 말해서 내가 접근해 가기 시작했다. 고등부 성가 연습도 같이 하고 학생회 모임도 같이 하면서 우리 속으로는 서로 통하면서, 그렇게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었다. 세월은 흘러 그 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생들 때문에 ‘효성여대’ 음악과로 진학 하려고 시험 원서를 내놓고 포기 했다고 한다.
당시는 한 클래스에 여학생들의 대학 진학률이 20%가 될까 말까 했던 그런 때였다. 어느 봄날 교회에서 봄 야외 예배로 지금은 ‘두류공원’이지만, 그때는 두류산이 꽤 으슥해서 그 곳으로 갔었다. 이 날이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 날이다. 나는 사전에 작전을 잘 짜서 그녀를 '꼬시기'로 마음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갔기에 여유 있게 그녀 곁으로 가서 단 둘이서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대화의 화제는 박계주씨 작 '순애보'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작가가 묘사한 청순하고 희생적 순정의 여주인공 「명희」가 이상적인 여인상이 늘 마음에 들었다고 소감을 말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하나님의 종’(성직자)이 되려고 한다고 했다.“ ‘명희’와 같은 지순하고 순애적인 인생관을 가진 여인이 성직자의 반려자로 적합하다고 생각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 녀에게 물어 보았다. 그 녀의 대답은 ‘동감’도 가지만 ‘명희’가 너무 고생하고 희생하는 것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소설에 나오는 ‘명희’와 같은 삶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보았는데, 나와 결혼해서 나를 내조 해 주면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단도직입으로 엄습해 들어갔다. 그 녀는 좀 당황한 눈치이었고, “갑자기 이런 말을 들으니, 지금 당장 뭐라고 대답을 할 수 없고, 평소에 별로 생각해 본 적도 없기에 뭐라고 대답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상의 파격적인 대화가 그 날은 그것으로 끝났다. 그 후 우리는 같이 산책도 하면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의 사랑을 받아 주시오.”라고 사랑을 고백을 했다. 그 녀의 대답은 “나는 아직 고등학교를 갖나온 20세 나이에 아직 그런 계획이나 감정에 크게 느껴 본 적은 없으나, 다만 양 선생님에 대한 호감은 가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우리의 관계는 이런 정도의 ‘느낌’들을 가지고 서로 만나고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다.
그 후 군대 입영 통지서가 내게 날라 왔다. 1959년 4월 29일(월)이 입대 하는 날이다. 나는 4월 26일(금)에 가만히 생각 해 보았다. 마치 청초한 가을 코스모스와 같은 그녀를 그냥 두고 가기에는 불안했다. 군대 간 사이에 다른 사람과 약혼이나 결혼이라도 하면 큰일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그래서 어찌했던 4월 27일(토) 저녁에 그 녀의 집을 습격해서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날 밤 10시쯤이 되었다고 기억되어진다.
그녀의 부모님께 인사를 하고(같은 교회 집사님인 고로 평소 잘 아는 편이었다.), “오늘 밤 늦게 이렇게 실례를 무릎 쓰고 뵈러 온 것은, 제가 다음 월요일(4월 29일) 군대 입대” 하기 때문입니다. 그간 우리는 사귀어 왔습니다. “군대 입대하면서 결혼 승낙이라도 받고서 가려고 이렇게 불쑥 찾아뵙게 되었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다. 좀 의외라는 듯이 놀라는 표정들이었다. 이어서 단도직입적으로 “귀댁의 따님을 저에게 주시오.”라고 재차 결단적인 말씀을 드렸다.
이것이 만용인지 용기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들었다. 그런데 ‘허락’은 하지 않고, 중국집에 탕수육을 주문하여 한상 차려 놓고 손님 대접을 깍듯이 하였다. 그때 직감으로 나의 요청을 들어 주려고 대접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거부 하려고 하니 미안해서 대접이나 하고 돌려보내려는 느낌이 들었다. 같이 둘러 앉아 밤참처럼 먹기 시작하였다. 나는 사실 그 때 대답을 듣지 못한 상태에서 대접하는 탕수육 맛이 좋은지,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거의 반쯤 먹었을 때, 그녀의 아버님이 입을 여셨다. “우리 딸을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게 생각 하네, 그런데 아직 결혼 시킬 생각도 해 본 적이 없고, 이제 겨우 고졸을 한 차제에 동생들 때문에 제일 맏이로써 대학도 못 보내었는데, 연차적으로 봐서 대학도 보내려고 생각중이네.” 이런 말씀이 계속 흘러 나왔다. 나는 결론은 이미 난 것이 라고 생각되었다. 그것은 거절의 뜻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당장 결혼 할 것도 아닌 것인데 오래 않아서 애원해서 설득해 보았자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사나이 대장부가 기어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고집 부린 다는 것은 내 자존심이 나를 용허하지 않았다. 내 마음 속으로 “좋다! 허락 안한다면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작전상 후퇴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나이가 오기도 없느냐. 어디 이 집 딸만 가지고 여기서 애걸복걸 할 것이 아니라, 세월이 지나가노라면 이 댁 부모님의 마음이 변할 수도 있고, 또 더 좋은 규수도 나타날 수 있으니, 과감히 일어서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는 말처럼 불쑥 와서 이런 청을 드려서 실례가 많았습니다. 잘 알았습니다. 저는 그만 돌아가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하고 두 말없이 그녀의 집을 나왔다. 집에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후회스런 마음도 없고, 오히려 후련했다. 이튿날 상동교회(대구제일교회가 70주년 기념으로 세운 개척교회에 전도사로 봉사해 왔던 교회) 주일 송별예배를 드리고, 모두들 석별의 정을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그날따라 비가 조금씩 왔다. 부슬 부슬 내리는 비는 입대로 인한 송별과 결혼 약속 거절을 당한 나의 마음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어 주었다. 우연히 교회 문 바깥을 내다보니 그녀의 어머님이 우산을 들고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 “옳다! 왔구나! Okness!(허락)이다.”라는 느낌이 와서 급히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라고 반가운 인사를 드렸다.
“어제 밤 자네가 가고 우리 두 부부는 한잠도 못 잤네.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 얼마나 실망이 될까?, 이런 궁리 저런 궁리 하다가, 새벽에 우리 내외가 최종 합의했네.”라는 서두로써도 알만했고 기쁘기 짝이 없었다. “젊은 청년이 갑자기 나타나서 청혼 허락 말에 당황도 했지만, 「귀댁의 따님을 저에게 주시오!」라는 그 말이 용감했고 믿음직스러웠네.”라고 하시면서 말씀은 이어져 갔다.
“거절당하고 돌아가는 뒷모습이 의연한 것처럼 보였으나, 속마음은 오죽이나 실망 했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허락하기로 했네.」”라는 말씀이었다. 마음속으로는 춤을 추고 싶을 정도로 좋았으나, 인사로 “정말 감사합니다.”하고서 나는 싱글 벙글 했다. 교회 송별회를 마치고, 급히 그녀의 집으로 부리나케 갔다. 두루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당사자인 그녀에게 “부모의 허락에 동의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런데 청천벽력과 같은 대답이 그 녀에게서 나왔다.
“아침에 부모님으로부터 허락의 말씀을 듣고, 지금까지 나는 울고 있었습니다. 그간 나는 양 선생님을 좋은 청년으로 알았고 동정하면서 연민의 정을 가져 왔으나, 성직자의 아내가 되는 것은 싫었고, 그래서 결혼 상대자는 아니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미안 합니다.”라고 했다. 정작 당사자가 이런 말을 하니 나는 정말 좋다가 말았다. 그녀의 이유는 성직자의 생활이 가난하고 고생스럽고, 우리 집도 너무 가난하다는 것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젠 반대로 그녀의 부모님이 그녀를 설득하는 입장이 되었다.
부모님은 “이만한 청년이 없다. 장래 봐라. 큰일 할 사람이니 너도 허락해라.”하는 식이었다. 끝내 그녀는 사랑하지만 ‘결혼’만은 할 수 없다고 고집이 대단하였다. 뒤에 가서 또 세밀히 이야기 하겠지만, 그때 그녀의 판단은 옳았다. 사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결혼 36년 동안 나는 아내에게 경제적으로 고생만 시켰다. 그리고 아내 자신의 인생보다 나의 외국 유학 5년, 딸, 아들 외국유학으로 자신은 정말 ?순애보?의 ‘명희’처럼, 남편과 자녀들을 위해 희생과 고생으로 점철된 세월의 일생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도, 나는 회갑을 맞이한 인생말기에 당도했고, 아내도 여자 인생의 말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57세에 이르렀지만, 경제적으로 인한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게 하니 아내에게 너무 죄를 많이 지은 것 같다. 「귀댁의 따님을 저에게 주시오」해 놓고, 고생만 시키니 이젠 좀 평안케 해 주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정년 4년을 앞두고, 세칭 「계명대 사태」로 고소도 당하고, 어리석게도 교묘한 ‘함정’에 빠져서 ‘해임’을 당하여 백수건달(?)이 되었으니, 내가 아내에게 “해도 너무 했다.”는 자책감으로 괴롭기만 하다.
나는 내 인생을 돌이켜 볼 때, ‘내 일에’ ‘내 공부’에 너무 집착하기만 했던 것 같다. 몇 해 전 아내와 더불어 세계일주 여행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내의 폭발직전에 모처럼 만용을 부려서 위로 여행을 했지만, 그것으로 보상되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 외 말 못할 사정을 일일이 여기에 다 쓸 수 없으니 말이다. 사랑은 정신만으로 살 수 없고, 물질만으로도 살 수 없다. 더더구나 사랑은 자발적이고, 사랑의 강요는 고귀한 사랑의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일방적으로 희생과 내조만을 무조건 강요하는 것도 모독이다.
오히려 사랑은 서로가 자발적으로 ‘주는 사랑’(Self-Giving Love)이어야 한다. 사랑하기에 자발적으로 더 ‘못주어서 안달이 나는 것이 사랑의 평범한 이치이다. 나의 아내는 「귀댁의 따님을 저에게 주시오.」해서 36년간 사는 동안 희생적인 내조만 강요하기 위해서 「....저에게 주시오.」했단 말인가. 아무리 ?순애보?의 여주인공 '명희'처럼 되겠다고 했지만, “내가 너무 했던 것 같소!” 마음속으로 나는 지금 용서를 빌고 있다. 이 글은 내 인생의 고백서이요, 인생 회고록이니 생각해 보니 아내의 결손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정말 36년간 사는 동안 당신은 정말 위대했소!” 이런 회한의 찬 고백적인 결산서를 쓰면서 19C. 영국의 시인 L.A.Tennyson이 쓴 'Enock Arden'이란 장시가 생각난다. 주인공 ‘이녹 아덴’(남편)은 배를 타고 멀리 항해를 하다가 난파를 당하여 외로운 고도에 갇혀 산지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한편 아내는 남편 귀환을 기다리며 오매간 남편 생환을 그리면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갈수록 남편의 친구인 ‘필립’이 자꾸 유혹했다.
“남편은 이젠 실종되었으니 더 기다리지 말고 자기와 같이 살자.”고 꾀이었다. 아내는 오랜 세월이 흘러 갈수록 남편을 기다리는 마음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종내 ‘필립’과 재혼을 하고야 말았다. 그런데 10년 만에 남편은 구조를 받아 자기 집으로 생환하게 되었다. 어두움이 대지에 깔린 어느 날 저녁에 그녀의 남편은 고향 집에 당도 했다.
급히 옛날 살던 집으로 달려갔다. 자기 집 대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자기 집 창문 틈으로 내부를 살펴보았다. 거실에 아내는 자기를 완전히 잊고 행복에 겨운 듯이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자식들은 거실에 누워서 아무 걱정 없는 듯이 뒹굴고 있었고, 자기 친구 ‘필립’ 역시 행복에 찬 모습이었다.
자나 깨나 그리던 아내, 자식들 그리고 자기 집에 10년 만에 돌아왔건만 자기가 상상했던 것과는 판이했다. 귀환한 남편은 저렇게 아내가 행복에 겨워하는데, 내 이제 “여보! 내가 돌아왔소!”라는 마음으로는 감격에 찬 소리로 외치고 싶지만, 그러나 그 순간 아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은 산산 조각 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10년간을 못 돌아 온 것은 고의가 아니잖아.”하는 자기 정당성 사이에서 그는 무한한 내적 갈등을 느꼈다.
그는 결단치 못하고 그만 동네 여관방으로 돌아 와서 아파 누워 버렸다. 그러면서 계속 “내가 왔소!”라고 알리느냐. 아니면 아내의 행복을 위해서 알리지 말아야 하느냐. 의 고민과 갈등을 하다가, 종내 그 여관방에서 아내의 행복을 위해서 알리지 않고 고뇌하다가 고독히 죽은 이야기의 내용이다. 진정 사랑한다면 자기를 순(殉)하고 그녀의 행복을 위해 자기는 피를 토해 가면서 죽었다는 이 장시는 거룩한 종교적 차원에로 승화된 거룩한 사랑과 순정의 서정시이다.
사랑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나는 '순애보'의 주인공 ‘명희’나 '이녹 아덴'의 주인공처럼 그렇게 고결하고 순정의 사랑은 못할 것 같다. 그러나 더 이상 사랑의 강요나 희생적인 내조를 아내에게 요구 할 수만 없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지금부터 내 인생의 황혼이 짙어 질 때까지 이젠 내가 희생하고 아내의 행복을 위해서 베풀 순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요즘 자꾸만 강열 해 진다. 왜냐하면 「귀댁의 따님을 저에게 주시오.」했기 때문이다. 끝.
'11. 박물관열람실(72)'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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