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박물관열람실(72)

47. 우리 생이 '피 맺힌 삶의 한복판'처럼

solomong 2025. 8. 20. 09:29

47. 우리 생이 '피 맺힌 삶의 한복판'처럼

(호세아1:2, 3:1~3)

영국의 윈저 공은 심프슨 부인을 사랑해서 왕관도 버려 '세기적 사랑'이라고 지금까지 부르고 있습니다. 한번은 기자가 찾아가서 "왕관을 버린 것이 후회되지 않느냐?"고 하자 윈저공은 "심프슨 부인을 위한 사랑이라면 두 번 왕관을 버리겠다"고 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사랑을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슴 내려앉는 명령

본문에 나오는 호세아의 사랑이야기는 사랑할 수 없는 고멜이란 여인을 깊은 갈등과 고뇌 뒤에 최종적으로 결단 내리는 사랑이야기입니다. 자, 그러면 '피 맺힌 삶의 한복판'을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그린 호세아의 인간상과 그의 거룩한 사랑이야기를 묵상해 봅시다.

호세아란 뜻은 '구원'이란 뜻이고, 호세아는 북조 이스라엘의 사람으로 주전 8C경에 활동한 예언자였습니다. 당시 역사적 배경으로 정치적으로는 부흥했으나, 도덕적으로는 타락하고 부도덕한 사회였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이교국과 타협하여 유일신 하나님을 저버리고 바알 신을 숭배하던 때였습니다.

이런 역사적 정황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호세아에게 임했습니다. 본문 1장 2절에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예언자의 가정에 이런 스캔들이 있어서 되겠느냐고 이의를 말하는 자도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실이 그런 것이 아니고, 상징적 의미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한 것입니다. 그것은 신랑 되시는 하나님께서 신부되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리 타락하였을지라도 아주 버리지 않고, 그들을 회개시켜 다시 사랑한다는 것이 호세아서의 주된 메시지입니다. 사실적 측면에서, 또한 상징적 의미에서 이 두 가지를 다 묵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찰력 있게 읽어보면, 호세아는 부정한 여인 고멜을 아내로 맞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호세아는 순종을 합니다.

호세아는 고멜과 결혼하여 2남 1녀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호세아 예언자의 가정도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했습니다. 고멜의 불평과 불만, 그리고 짜증은 살림살이하는데 이만 저만한 고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호2:5에 보면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를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을 내게 준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미루어보아 고멜의 미모가 아름다운 여인인 것 같습니다. 또한 요새 말로 말하면 돈 많은 남자들이 돈으로 유혹하니 돈에 흔들리는 것 같은 인상입니다.

이 사실을 안 호세아는 너무나 애달프고 답답해서 호2:6에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라고 한 것을 보아 호세아가 자기 아내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무인카메라나 벨 장치를 해 두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가출하여 오랜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그녀를 찾아와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3:1에 "너는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하기로 "내가 은 15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속전(贖錢)을 지불하고(포주에게 화장품 값, 옷 값, 병원비 등 빚진 것을 말함)찾아오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호세아에게 임했습니다.

가출한 부인(자식을 버리고)고멜의 방탕한 세월이 오래 지난 뒤에 미모도 젊을 때 미모이지, 늙어 병들어 병원비 등으로 포주에게 빌려 쓴 돈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하고 지내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하나님의 지엄한 명령인지라, 은 15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을 속전으로 가지고 가서 포주에게 빚을 다 갚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고멜에게 말합니다. 본문 3:3에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그리하리라"고 굳게 다짐을 서로 합니다.

사랑하는 아내여, 이젠 다시 그러지 맙시다. 내가 돈을 많이 벌지 못해서 당신이 도망간 것이니 내게도 책임이 있으니 용서하오. 서로 사랑을 굳게 다짐하면서 집으로 같이 돌아오는 호세아의 모습입니다. 결국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는 호세아의 행위는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고, 고멜은 이방 바알 신을 섬기는 백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메시지의 핵심을 좀더 심화시켜서 생각해 봅시다. 이것은 호세아의 생의 경험에서 울려오는 새로운 메시지로 터득해 봅시다.

호1:2에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아라"고 예언자에게, 총각에게 이런 하나님의 명령이 내렸다는 것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이것은 고향 친척을 떠나 새 역사의 테이프를 끊은 아브라함의 생애나,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상에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비교해 볼 때, 뒤질 수 없는 준엄하고도 가슴이 내려앉는 명령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라밋의 나라 이집트에 가서 고통하는 동족을 구원하라는 소명 받은 모세에 비교할 수도 있고, 원수의 나라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은 요나와,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종내 피땀 쏟으며 고투하신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과도 비할 수 있는, 맑은 하늘에 벼락 치는 것과 같은 하나님의 명령이었다고 사료됩니다. 사실은 더러운 여자에게 장가들어 더러운 자식을 낳으라고 한 것은 기분 나쁜 일입니다. 정상적인 총각치고 결혼하겠다고 할 사람이 없을 것이며, 더욱이 자식까지 저주 받기를 바라는 그런 부모도 없습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여러분, 성서에는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만 호세아가 이렇게까지 순종하기까지 그의 내적 갈등은 어떠했을까 상상해 보셨습니까. 모세나 요나처럼 못하겠다고 항거하지 않았을까요. "할 수만 있으면 이 고난의 잔을 마시지 않게 해 달라"고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애원을 했습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예수님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폴 틸리히는 기독교의 신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라고 했습니다.

이런 상황과 조건이지만 그런 것을 무시하고 뛰어넘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따르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약속의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을 향해 당장 가겠다고 아브라함이 대답했다고 믿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창22:3에 "어떤 아들인데 어머니인 사라는 모정에서 어떻게 죽으러 떠나는 그 아침에 대성통곡도 있을 법하고 아니면 눈물 젖는 모성애 음성으로 무슨 의사표시가 있어야 함에도 아무런 말 한마디도 없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고 실존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사람은 극도의 충격을 받으면 말문이 막힌다고 합니다. 억장이 매였는데 무슨 말이 나오겠냐는 것이 나의 답변입니다.

부정한 여인에게 장가들어 더러운 자식을 낳으라는 하나님의 말에 피눈물이 흐르는 내적 갈등과 저항이 없었다면 호세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호세아의 내적 갈등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본문 3:1에 "너는 정부와 불의한 관계를 맺고 정을 통한 여인을 다시 찾아가서 사랑하라"는 이 말씀에 심각하고 침통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렇게 인간의 생각과 의미와 감정을 압도해 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이런 것입니다. 이런 것을 거절했기에 오늘날 한국교회와 교인들이 세상의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호세아의 생을 휩쓸어서 흘러가는 세상의 흐름에 막아서신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호세아 예언자는 세상으로 도전해 오는 하나님의 도전을 바로 자기 생에서 공격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명은 호세아의 고막을 울리고 머리로 들어가는데 멈추지 않고, 그의 생의 한 복판에서 폭탄처럼 던져진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피맺힌 삶의 한 복판'이었습니다.

무수한 피망울이 진 삶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신앙이 추상적이고, 피상적이고, 감성적이고, 관념적으로 교인들에게 가르쳐 왔기에 생생한 삶의 한 복판에서는 위선(僞善)과 거짓으로 점철되는 삶을 살게 되었기에 오늘날 한국교회 실상이 이와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삶이 말씀이 되는 삶

영국의 시인 A. Tennyson(1809~1892)의 장시(長詩)인 '이녹크 아덴'(Enock Aden)이란 것이 있습니다. E. 아덴은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두고 먼 항해를 하다가 풍랑을 만나서 겨우 어느 절해고도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근 근처로 지나가는 배가 없어서, 배를 기다리며 10년이란 생을 그 섬에서 혼자 사는 법을 터득하고 살았습니다. 한편 고향 땅에 있는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은 남편과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면서 살아오는 중 E.아덴의 친구인 필립(Philip)이 수 삼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아니하니, 필연코 죽은 것이니 자기와 결혼하여 살자고 서두는 바람에 E.아덴의 아내는 할 수 없이 필립과 결혼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이런 중에 10년 만에 어느 날 E.아덴은 지나는 배를 만나서 자기 고향 땅에 서산에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에 당도했습니다. 황급히 자기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E.아덴은 대문으로 들어가려다가 잠시 창문으로 안쪽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자기 사랑하는 아내는 행복에 겨운 듯 앉아서 뜨개질을 하고, 자기 아들은 마루방에 누워서 뒹굴고, 자기 친구인 필립은 편안히 누워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여보 내가 여기 왔소" 하면서 대문을 박 차고 들어가느냐, 아니면 저렇게 행복한 아내와 자식을 두고 뒤돌아 가느냐의 갈등과 고민에 몸부림치게 되었습니다. 내가 들어가서 저들의 행복을 깨느냐. 아니면 돌아가느냐에 고민하다가 들어가지 못하고, 그날 저녁에 여관집에 들어가서 묵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그는 여관에서 오랫동안 이 두 사이에서 갈등을 하다가, 몸져누웠고 종내 마음의 병이 들어서 거기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테니슨은 이 시에서 하나의 거룩한 종교적 사랑으로 승화시킨 거룩한 사랑을 묘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의 사랑이야기를 통해서 배신한 이스라엘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는 비유의 사랑이야기가 바로 이 호세아서인 것입니다. 내적갈등 고뇌에서 활화산처럼 용솟음치는 거룩한 사랑으로 E. Aden은 사랑하는 아내를 친구와 아내의 현재의 행복한 사랑을 위해서 깨트리지 않고, 자기를 순(殉)한 거룩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그린 Tennyson의 장시처럼, 호세아도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거룩한 사랑으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회개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비유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배신한 우리들의 참회와 회개하는 과정의 자화상을 그린 것이라고 봅니다. 이 호세아의 아픔은 차원을 달리 한다면 이스라엘의 생 속에 고통을 일으키면서 그의 생을 뚫고 터져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의 아픔은 사랑하는 동족의 문제를 껴않은 하나님의 아픔이었습니다.

환언하면 민족의 깊은 상처의 아픔은 하나님의 가슴에 울려서 호세아의 심장을 아프게 찔려 온 것입니다. 이쯤이면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요, 사랑의 필연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호세아의 불꽃 튀기는 팽팽한 긴장과 갈등에서 마침내 하나님의 아픈 사랑의 가락이 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지 않겠다고 버티면 버틸수록 하나님은 기가 막힌 사랑의 가락이 아프게 울려 퍼지는 것이었습니다.

연구실에서 양 견 목사(1990년)

이것을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몸을 더럽힌 고멜에 대한 고뇌와 배신, 집나간 아내를 잊지 못하면서도 배신한 여인에 대한 분노, 치욕에 고민하다가 드디어 쓰라린 사랑의 가락이 호세아의 심장에 두 방망이가 요동했던 것입니다.

호세아의 가슴을 온통 하나님의 사랑의 가락이 집어 삼켰습니다. 미음도, 분함도, 다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되면 호세아의 생은 하나가 된 것입니다. 생 전체가 송두리 채 말씀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비대해졌지만 성숙한 신앙은 아니었습니다. 말씀과 우리들의 생이 유리(遊離)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말씀과 삶이 일치하는 우리들의 생의 한복판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런 삶으로 진한 삶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말씀과 생이 철저한 교육적 목회와 역사 속에서 삶이 엉켜 생의 한복판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이런 경험의 신앙이 될 때, 진정 마음으로 하나님께 참 감사가 용솟음칠 것입니다. 끝.

2004. 11. 16.

山下연구소장: 양 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