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박물관열람실(72)

53. [예수 그리스도의 외로움]

solomong 2025. 9. 9. 10:11

 

 

53. ​[예수 그리스도의 외로움]

- 우리가 외로울 때, 주님이 가장 가까이 계실 때이다. -

코로나 시대에 쓸쓸한 마음 안팎으로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는 요사이 시골 생활이다. 한적한 촌길을 운동 삼아 걷노라니, 부쩍 습관처럼 깊은 사념에 잠기곤 하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어 번쩍 주변을 살펴보니, 5월의 장미꽃 외에는 초봄에 핀 꽃들은 벌써 망울져, 무성한 신록이 행인들의 그늘 쉼터로 자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 같다.

문득 고적감(孤寂 感)이 나의 전신을 엄습해 오면서 나는 왜 이렇게 홀로 걷는지를 물어보았다. 마치 귀양살이 온 옛날 선비처럼 애가시조(哀歌時調)한 수라도 지어 놓고 곡(哭)이라도 하고픈 심정이었다. 그래! 나도 유배 왔다고 생각하고 홀로 곡이라도 하고픈 마음으로 귀가를 하였다. 책상머리에 앉으니 산책길에 느낀 그 외로움에 ‘주님의 외로움’이 불현듯 생각났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외로움’이란 글을 써 보기로 했다.

인류 역사상에서 예수님처럼 지고지순하고 거룩하고 착한 생애는 없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예수님만큼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은 사람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왜 미워했을까. 그것은 예수님이 발하는 빛이 너무나도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요 3:19-20) 부엉이와 지렁이는 태양 빛을 싫어해서 부엉이는 밤에 울고 지렁이는 땅속에 살고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그처럼 고결했기에 미움을 받은 것만은 아니다.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정직하고 성실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과도 불의한 타협을 용납지 않아서 미움을 받으셨다. 30세가 되어서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기 위해서 가정을 혈혈단신으로 뛰쳐나와 광야에서 방황하였고, 갈릴리로 가서 복음을 전하셨으며,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충만한 힘을 얻어 침식을 잊어가며 가련한 인생들의 병을 치료하셨다.

친족들이 볼 때는 30년 동안의 주님 생애와는 너무나도 큰 변화였으므로 미쳤다고 할 만도 했지만 (막 3:21), 친족까지도 주님을 불신하는 철저한 외톨이가 되셨다. 어머니 마리아에게“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4:49)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어머니를 경멸하는 말투처럼 들려졌고 또 한번은 말씀을 하시는 중에 어머니와 형제가 문밖에서 찾고 있었다.

이때 주님은 청중을 향하여, “누구든지 하나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모친이니라.”(막 3:35)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바로 주님 당신 가족을 무시하는 말로 인륜 도덕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인지 몰라도, 그들이 인간 형제‘예수’만이 아니요, ‘그리스도’란 것을 모르는 애석한 한탄일 것이리라. (요 7:5) 그래서 주님은 어느 경우에서든 어머니도 형제자매도 없는 완전히 고독한 존재가 되셨다. 하지만, 십자가상에서 어머니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며 그 고독한 아픔의 순간에도 인간의 도리를 다하신 주님이셨다. (요 19:25-27)

어찌하였든 공생애 3년간 주님을 의심하고 미워했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세상에 골육을 몰라보고 다른 사람들과만 친하게 지내는 혈육의 배반자’라고 그 얼마나 주님께서는 눈총을 받으셨는가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 같다. 또한 그의 가족의 경우처럼 예수님의 고향 갈릴리 나사렛 사람들도 그러했다. 주님께서는 공생애 최초로 고향 땅 나사렛 회당에 모여든 군중들에게 은혜로운 말씀을 전하셨다.

그래서 나사렛 사람들은 지혜와 권능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집안 내력을 들먹이며 卑下시키는 듯하면서도, 나사렛 출신 저명 인이 출현했다고 치켜세워 전국을 향해 자랑하며 동일시(同一視)의 심리로 예수님을 통해서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기들의 허영의 도구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연코 이를 물리치셨다. 공생애 처음으로 고향 땅에 와서 당신 자신이 메시아의 자의식을 은연히 천명하신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사실이, 한갓 한 고을이나 한 나라의 점유물이 아닌 세계의 구세주요, 당신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을 나사렛 사람들은 알 리가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 예레미야 사건의 전철을 암시하시면서(렘 11:21),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막 6:4)라고 말씀하시자, 나사렛 사람들은 크게 노하여서 주님을 회당에서 거리로 끊어내어 산 위 절벽까지 끌고 가서 낭떠러지에 밀쳐 죽이려고 했다. (눅 4:29)

가족과 고향에서 완전히 소외된 주님은 또한 동족인 유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따돌림과 시기, 그리고 미움 및 결국 그들에 의해서 고소당하여 돌아가셨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두 개의 종파가 있었다. 하나는 사두개파요, 또 하나는 바리새파였다. 사두개파는 신전을 맡은 의식 파이고 바리새파는 구약성서에 충실한 실천 파였다. 당시의 종교가는 이 두 개 종파 중의 어느 쪽이든 소속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들 간에는 늘 논쟁이 끊임없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들은 유대 종교계의 두 물줄기로 자처하면서, 항상 군림하는 자세로 그들 밑에 소속하지 않는 사람은 신앙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았으며, 단지 그들의 형식적인 제사 의식, 오만, 위선 및 권위 주의에 저항을 하셨으며,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그들의 위선에 항거하셨다.

‘독사의 자식들아’하시면서 호통을 치셨으며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파에 대한 대답 못 할 정도로 무안을 주셨다. 사두개파는 이때부터 예수님을 그들 속으로 끌어넣으려는 야심을 버리고 그 뒤로는 늘 예수님께 반대와 적의를 품고 예수님을 괴롭혔다. 이것을 알아차린 바리새파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서 자기들의 파로 회유하려는 듯이 니고데모를 파송하여 은근한 추파를 던졌다. (마 22:23-46, 요 3:1-15)

니고데모는 오히려 예수님의 설득을 받아 주님 살아생전엔‘숨은 제자’로 지내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공개된 제자’로 지성스러운 섬김을 하였다. 어찌했든, 예수님의 안중에는 사두개파도, 바리새파도 없고, 단지 하나님 아버지와 복음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리하여 예수님은 절대적으로 고독하셨다. 혈육으로부터, 동향 인으로부터, 동족인 유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하물며 한 제자에게 배신을, 수 사도를 위시한 제자들은 가장 위기와 고독한 순간에도 스승을 버리고 제 갈 길로 다 가버리고 말았다.

그나마 여 제자들만 십자가 멀리서 눈물지었으나, 십자가는‘속죄의 대업’을 위한 숭고한 고난으로 알기엔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고, 다만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애간장을 태운 요한과 어머니 마리아는 인지상정과 혈육의 정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주님의 그 속 깊은 뜻을 몰라주었던, 천지간에 고독한 생애를 마감하셨다. 돌이켜 다시 생각해 보건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할 만큼, 인성적으로는 철저한 외로운 사람이었다. 답답하고 철없는 제자들의 언행을 생각하면서 외로움(Loneliness)을 극복하기 위하여, 홀로움(Solitude) 속에서 깊은 명상에 잠기기도 하셨다.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홀로’ 뭍에 계시다가”(막 6:46-47)라는 말씀이라든지,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 6:15)라는 말씀들을 비추어 볼 때,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군중과 제자들, 그리고 유대 교권자들과 헤롯왕의 박해도 피하시고, 무분별한 군중의 환영에도 피하셔서 혼자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다. 예수님은 외로움을 피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홀로 해결하고 대처하기 위해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피땀 흘리며 기도하셨고, 십자가상에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도 외면당한 채, 외로움 속에서 인류의 죄와 투쟁해서 승리하시고, 부활 후에 죽음을 정복하셨다. 그러므로 외로움은 피동적이라면 홀로움은 주동적이요, 스스로 고독함에 돌입함으로써 외로움을 삼켜 버린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외로움을 홀로움으로 치열한 영혼의 투쟁 마당에서 아니, 하나님이 주신 전쟁터에서 인간의‘죄와 죽음’ 및 ‘외로움’을 정복하신 그 첫 번째 승리자였다.

오늘의 주님을 따르는 종들도 외로움에 몸부림칠 때가 많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로서, 그‘외로움’을 주님처럼 ‘홀로움’으로 극복해야겠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처럼 철저한 고독은 아니다. 오히려 고독할 때, 성령께서 영감을 주시고 우리가 외로울 때, 주님이 가장 가까이 계실 때이다. 그래서 우리의 고독은 아픔이 아니라, 달콤한 것이요, 창조의 순간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오늘의 우리 동역자들이여! 흥청거리며 때로는 이해타산에 들끓는 세태를 떠나, 주님의 뒤를 따라 고독한 실존으로 성역에 일로매진했으면 한다. 서두에서 필자가 외로움을 하소연하였지만, 어찌 예수 그리스도의 외로움에 비하리요. 끝.

2021년 5월 27일

山下연구소장: 양 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