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구약설교마당

42. 힘의 균형

solomong 2025. 8. 12. 10:52

42. 힘의 균형

(본문: 시 55:1~23)

 

1). 서론: 인간 이해에 대한 초점은 개개인이 순전히 개체(個體)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사회적 자아(The social self)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타자의 눈을 통해서 비추어진 자아이기에, 개체의 사고와 행동에 대한 타자의 반응을 통해서 개체의 사고와 행동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은 홀로 외로운 고도나 자연 속에 묻히어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항상 ‘너’( You )라는 관계 속에서, 나와 너의 산 만남입니다. 이를 객관화 된 자아라고 하기도 하고, 우리들의 관계(We relation)의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로마의 줄리어스 시저가 부루터스의 칼을 받으면서 “부루터스 너도냐”("you too”)하고서는 친구의 배신에 실망해서 대항하지 않고 39곳에 칼을 맞고서 죽었다고 하지요. 나와 너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말의 뜻이라고도 생각이 됩니다. 본문은 시인인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과 친구 아히도벨의 반역을 고투하면서 하나님께 하소연과 구원을 확신하는 내용입니다. 그래도 필자는 단지 원수들의 악행으로 고생스러움을 하나님께 맡겨서 구원받는 말씀의 교훈으로만 생각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다윗 왕 자신에게 반역 행위로 도전해 오는 반역자 보다, 먼저 우리는 다윗 왕의 삶의 과정 중 ‘헛살아온 삶’의 부분을 생각해 보자는 말입니다. 즉, 다윗 왕 자신의 밧세바 간음 사건과‘우리아’를 교묘하게 죽인 살인 사건 말입니다. 동시에 압살롬이 그의 누이 ‘다말’의 일을 알고도 ‘암논’을 처벌하지 않은 아버지를 향해 원망하는 마음이 극에 달하여, 그는 철저한 계략에 의해 민심을 훔쳐서 반역의 거사가 야기된 것이 정의 사회를 이룩하지 못하고, <힘의 균형>이 깨진 원인을 살펴봄과 동시에 그것을 오늘날 우리들의 교훈으로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2). 본문의 이해(Text): 다윗의 시로서, 그가 압살롬 아히도벨에게 역모 당할 때, 아픈 심정을 노래 한 것입니다. 그 감정의 격렬한 점에서 예레미야의 시라는 견해도 있으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용은 1. 고난 중의 호소, 2. 배신당하는 고통, 3. 구원의 확신입니다.

 

3). 본론(Context): 시인 다윗이 오죽했으면 들짐승들과 돌 및 풀, 찌는 듯한 태양 볕이 작열하는 광야로 비둘기처럼 날개가 있다면 훨훨 날라서, 인간 세상에서 탈출하고 싶다고 하겠습니까? 그 광야는 폭풍과 광풍이 불며, 피에 굶주린 사나운 짐승들의 날카로운 발톱이 있으며, 독초가 무성하고 가시밭이 가로막혀있고, 전갈과 독사들이 이글거리며 물이 없어 목이 타며 배고파서 배를 움켜쥐고서 추위 아니면 폭서에 숨결이 막히는 그런 곳입니다.

 

본문의 시인이 현재 그가 사는 인간 세상이 괴로워서 현실 도피와 탈출의 심정을 가졌다면, 정신이상자가 아닌 이상, “편히 쉬고자 한 광야”(6절) 라는 곳으로 가고자 했겠습니까! 인간의 의지가 소용돌이치는 도시가 그만큼 광야보다 불안하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처럼 인간을 믿을 수가 없으며 독을 품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을 해코지하는 무섭고 음흉한 인간들이 사는 도시라는 말입니다.

 

자기의 이권, 권력, 부한 재산, 명예, 영화 및 자기 민족과 평안을 영구히 가지고자 하는 의욕에 불타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란 것입니다. 이런 악의 권력이 지배하는 도시에서 날마다 순간마다 오염되어 가고 질식되어 가는 인간 자신의 양심과 의로운 뜻 그리고 우리 인간 속에 깨끗하고 맑은 호흡을 해야 하는 영혼이 소리 없이 죽어 가고, 또 이미 죽어 있는 싸늘한 시체가 된 영혼의 만가(輓歌) 소리를 듣는 곳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사는 도시에 내뿜어진 독기를 무서워할 줄 아는 사람이면, 본문의 시인과 같이 “비둘기처럼 날개를 주십시오. 내가 광야로 날아 가리이다. 거기서 편히 쉬리이다.”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본문의 시인이 “비둘기처럼 날개를 달라!”라고 애원함은 바로 이런 심정일 것입니다. 악한 인간들이 모여서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을 마구 잡아 억압하고 핍박하고 죽이는 그 도시를 저주하는 것은 당연지사이며, 결코 현실 도피주의자라고만, 비난할 수 없다고 사료 됩니다.

 

본문의 시인이 살던 그 현실의 참상을 본문은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3절), “죽음의 공포에 둘러싸이게 했고”(4절), 그래서 “그 마음은 찢어지는 듯 괴롭다.”(4절), “무서움과 공포가 그를 뒤덮고 있다.”(5절) 그러하기에 그의 삶은 “순간순간마다 전율로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고 있다.”(5절) 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그의 삶의 순간이 공포와 죽음으로 직결되어 있기에 “비둘기처럼 날개를 가졌으면”하는 소원을 한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본문의 시인이 사는 도시 안에서 야기되는 죄악상과 그악의 질서를 비호 하기 위한 도시 권력자들의 비행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주야로 성벽 위를 두루 다닌다.”(10절) 라는 말은 성을 지키는 보초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성을 지키는 보초는 성 밖에서 오는 위험과 적국의 습격을 막는 임무이며, 또한 성안에서 일어나는 비행, 악행, 강도 등을 사전에 막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눈에 비추어진“성안은 포악과 범죄로 가득 차 있다.”(11절) 라고 했습니다.

 

성안 좁은 골목과 넓은 거리에 인권의 탄압과 사치와 폭행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암흑가가 되었지만, 아무도 이를 제지하거나 그런 악의 질서를 항거하는 소리나 움직임은 없다는 것입니다. 정의의 목소리는 죽었고 불의에 대한 항거는 그 흔적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정의 편에 선 사람들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더 기가 막히는 일은 가까운 친구들이 모두 정의를 배신하고 불의의 집단에 가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가깝게 지내던 가까운 친구, 서로 정답게 담화하고 하나님의 집에서 함께 경건한 삶을 실천하던 사람들”(13~14절)이었습니다. 시대가 아무리 악해도 친구들만은 끝까지 포악한 권력 편에 서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그럴만한 사유로 이제 그 친구들마저 악의 구조 속으로 잠입해서 도시를 더 불안과 공포의 장소가 되게 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비둘기처럼 날개를 가지고 광야로 날아가고 싶지 않겠습니까?

 

이제 시인은 자기 소원대로 날개 있는 비둘기는 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께 자기의 딱한 사정을 호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붙드실 것이니, 의를 사모하는 사람, 정의 편에 선 사람은 절대로 움직이지 않고 자기 길을 걸어가야 함을 본문의 시인은 마지막 결론 부분에서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상이 본문의 내용을 좀 더 쉬운 풀이로 해 보았습니다. 본문의 시인이(다윗 왕) 말하는 불의한 악인들은 첫째로 성안 백성들이며, 둘째로는 성을 지키는 보초(파수꾼)들조차 성안이 암흑가가 되도록 그냥 묵인하고 있으며, 셋째로는 시인 다윗의 모사꾼인 아히도벨까지 악의 무리와 동조하여 도시를 불안과 공포의 장소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시대적 배경은 다윗이 군왕으로 재임 때, 아들 압살롬과 친구이자 모사꾼이었던 아히도벨의 역모(쿠데타) 사건(삼하 15:1~12)을 배경으로 한다는 추정을 전제하고 말씀을 전개합니다.

 

아들 압살롬과 다윗왕의 심복 이히도벨의 역모의 주역이 된 사유 속에는 암논 형이 압살롬의 누이 다말 강간 사건(삼하 13:14)과 밧세바의 할아버지 아히도벨 (삼하 23:34, 11:3 참조 )이 다윗의 밧세바 사건 (6, 7계명 범죄)에 대한 복수심으로 압살롬에게 다윗의 후궁 10명의 강간을 계책으로 말하여, 압살롬이 왕궁 옥상에서 후궁 10명에 대한 강간한 사건 (삼하 16:22, 삼하 20:3 참조) 등으로 보아서, 역모의 동인(動因) 중에 다윗의 밧세바 사건이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봅니다.

 

다윗 자신의 윤리적 범죄로 인한 다윗 왕가의 불륜 화와 사회윤리의 혼탁으로 파급됨과 정치적 지도이념이 혼미한 정황을 초래케 된 것은 최고 지도자인 다윗 왕 자신의 밧세바 강간과‘우리아’를 교묘하게 죽인 살인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압살롬이 그의 누이 ‘다말’의 일을 알고도 ‘암논’을 처벌하지 않은 아버지 다윗을 향해 원망하는 마음이 극에 달하여, 그는 철저한 계략에 의해 민심을 훔쳐서 반역의 거사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로, 성안의 불의한 악인들도 역모 사건을 동조하면서 ‘범 없는 골에 토끼가 선생’ 노릇을 한답시고 악행을 저질렀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성을 지키는 파수꾼들 역시 역모 사건의 동조자들이 되었으며, 셋째로, 아들(압살롬), 심복 친구(아히도벨=밧세바의 할아버지)의 배신행위였다고 보겠습니다. (삼하 17:1 이하) 군왕 정치체제 시대에서는 군왕의 전제주의가 보편화됨에도, 다윗왕의 인격(윤리적 의무)과 정신적인 모범의 결핍으로 역모 소식을 접한 다윗은 수하 사람들과 황급히 예루살렘 성을 탈출했다는 것은 평소 군사력 강화 (조직과 교육)에 소홀히 했다고 보며, 더욱이 밧세바 사건으로 민심 여론이 등을 돌린 상황을 고려할 때(끝내 역모 주역들은 사망하고 역모는 실패했지만), 초기 역모 사건이 야기 된 당시 상황은 역모 사건의 견제가 가능한‘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이 깨진 상태이기에 ‘정의 실현’이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역모 사건 전에,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한 책망(삼하 12:1~25)과 다윗 왕의 회개 자복을 하였지만, 민심은 이미 독기에 찬 악인의 언행으로 변모해 버린 상태여서. 민심의 동정을 얻기엔 어려웠다고 볼 수 있으며, 그러니 당시 다윗 왕의 지지자들은 나약했으며 민심을 돌리기에는 ‘힘의 균형’이 깨어져서, 현실 탈출 생각으로 “비둘기처럼 날개가 있다면 날아서 광야로 도피”하려는 불가능의 꿈을 꾸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의 교훈을 통해서 오늘날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한 ‘힘의 균형’이 요청되며, 교회와 기독교 기관이 선두에 설 수 있는 채비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르게 됩니다. 우리 기독 신자의 인간 이해에 대한 초점은 개개인은 단순히 개체(個體)라고만 생각하지 않고, 사회적 자아(The social self)의 개념이란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아는 타자의 눈을 통해서 비추어진 자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특히 R. Niebuhr의 저서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1932년) 속에 나타난 그의 <정의에 대한 개념>은 인간 사회라는 것은 단순히 良心이나 理性에 의해서만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힘(Power)의 견제를 통해서 “힘의 균형”이 정의 실현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보았습니다. 결국 그는 인간관계란 ‘힘’의 관계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 없이는 어떤 도덕적, 사회적인 불의를 완전히 성공적으로 방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인간 사회에서 개인윤리의 원칙이 ‘사랑’일지라도, 사회윤리의 관점에서는 ‘집단적 이기주의’가 강력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사랑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인이요, 죄인은 곧 이기적이기에 사회는 탈법과 부정과 비리와 온갖 권모술수와 힘센 자의 힘의 남용, 악용되는 곳이란 것입니다. 특히 힘(권력)이 독점되면 “힘의 불균형” 때문에 평화가 깨어지고, 싸움과 투쟁, 전쟁이 유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부정적 기능을 극소화하고 건설적인 기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길은 “권력의 분산”(Distribution of Power)과 “힘의 균형”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힘없는 집단이나 개인이 권력자나 힘이 강한 집단에 “정의”를 호소해도 수용되지 않는 이유 때문입니다. 대등한 힘이 있을 때만, 힘 있는 상대방의 호소와 주장을 수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Niebuhr는 “힘은 힘으로 도전되어야 한다.”(Power must be challenged by power. )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상과 같이 그는 국가와 국가, 정부와 사회성원, 집단과 집단, 기업주와 근로자 사이의 힘의 역학적 긴장 관계에서 정의로운 사회가 실현된다고 했습니다. 요컨대 사회는 ‘사랑’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힘’이 있어야 ‘정의’가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정의 개념에 대한 Niebuhr 이론에 의하면, 정의로운 지도자(영도자)가 되려면 힘이 있어야 하고, 정의로운 사회의 실현은 힘(권력)의 분산이 되어야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회 각 분야의 지도자, 그리고 목회하는 목사 등등 정의로운 지도자가 되어서 민중, 교인들을 잘 지도하며, 민중, 교인들 역시 정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정의 사회 실현에, 정의감이 투철할 수가 있는가가 중요한 과제로 대두하고 있습니다. 결국, 지도자의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그것이 지도자의 인격 형성 구성에 요체(要諦)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정의로운 지도자 되어 사회 집단을 지도할 때, ‘힘’이 있다고 하는 개인이나 집단을 견제하여 정의 사회를 이룩함이 가능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 권력의 분산이며, 힘의 균형을 이루어서 정의로운 나라와 사회를 실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목사들은 종적으로 정결한 신앙과 윤리 생활로 향긋하게 하나님께 보여 드리며, 횡적으로는 교인과 사회에 모범을 보여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 공동체가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께는 자랑스러운 종들이 되며, 일반 사회인과 집단이 만만히 보거나 우습게 보이지 않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4). 결론: 본문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과 다윗 왕의 친구이며 모사꾼인 아히도벨이 다윗 왕에 항거하여 역모를 일으켜서 다윗은 고난과 위기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호소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받는 내용입니다. 시인 다윗 왕은 성내 시민들의 독기에 찬 악행과 예루살렘 성을 지키는 파수꾼들도 역모 사건의 동조자가 되었으며, 다윗의 친구들 역시 역모의 주역으로 배신하여, 다윗은 비둘기처럼 날개가 있다면 광야로 날아가서 도피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다윗의 아들 암논이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성폭행을 하여 이에 분노한 압살롬은 역모에 박차를 가하게 되며, 다윗의 친구요 모사꾼인 아히도벨은 다윗이 밧세바 강간과 우리아 살인 건에 대한 밧세바의 할아버지로서의 분노와 복수심으로 역모에 가담하여 다윗이 피난을 떠나고 남은 후궁 10명을 압살롬이 성적 겁탈토록 하여 부자간을 이간시켜 역모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계책으로 간하여, 결국 궁궐 옥상에서 압살롬은 후궁들을 성적 폭행을 강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모두가 전날에 다윗이 밧세바에 대한 간음 사건으로 야기된 다윗 왕가의 불륜과 친구 아히도벨의 원한에 찬 복수심의 일환이었습니다. 다윗 자신의 윤리적 범죄로 인한 다윗 왕가의 불륜 화(化)와 사회윤리의 혼탁으로 파급됨과 정치적 지도이념이 혼미한 정황을 초래케 된 것은 최고 지도자인 다윗 왕 자신의 밧세바 강간과‘우리아’를 교묘하게 죽인 살인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첫째로, 성안의 불의한 악인들도 역모 사건을 동조하면서 악행을 저질렀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성을 지키는 파수꾼들 역시 역모 사건의 동조자들이 되었으며, 셋째로, 아들(압살롬), 심복 친구(아히도벨=밧세바의 할아버지)의 배신행위였다고 보겠습니다. 군왕 정치체제 시대에서는 군왕의 전제주의가 보편화됨에도, 다윗왕의 인격(윤리적 의무)과 정신적인 모범의 결핍으로 역모 소식을 접한 다윗은 수하 사람들과 황급히 예루살렘 성을 탈출했다는 것은 평소에 군사력 강화 (조직과 교육)에 소홀히 했다고 보겠습니다.

 

그리하여 초기 역모 사건이 야기 된 당시에 곧바로 진압할 수 있는 견제가 가능한‘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이 깨진 상태이기에 ‘정의 실현’이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로는 밧세바 사건으로 민심 여론이 등을 돌린 상황을 고려할 때, 다윗은 평소 자기 왕권을 공고하게 유지하기 위한 행정관료들과 군대 통수권이 다윗 왕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교육과 조직화가 미약했으며, 민심과 여론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 사유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위와 같이 다윗이 <힘의 균형>을 이루지 못하여, 거친 광야로 도피하려는 심정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호소한 내용을 교훈의 거울로 삼아서, 먼저 우리 기독 신자의 인간 이해를 바르게 하여 개개인은 단순히 개체(個體)라고만 생각하지 않고, 사회적 자아(The social self)의 개념이란 것을 인식하면서 자아는 타자의 눈을 통해서 비추어진 자아이기에 개체의 사고와 행동에 대한 타자의 반응을 통해서 개체의 사고와 행동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 수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회 각 분야의 지도자, 그리고 목회하는 목사 등등 정의로운 지도자가 되어서 민중, 교인들을 잘 지도하며, 민중, 교인들 역시 정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정의 사회 실현에, 정의감이 투철할 수 있도록 선도를 잘해야 하겠습니다. 결국, 지도자의 핵심적인 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그것이 지도자의 인격 형성 구성에 요체(要諦)가 됩니다. 이리하여 정의로운 지도자가 되어 사회 집단을 지도할 때, ‘힘’이 있는 지도자가 되어서, ‘힘’이 있다고 하는 개인이나 집단을 견제하여 정의 사회를 형성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곧 권력의 분산이며, 힘의 균형을 이루어서 정의로운 나라와 사회를 실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목사들은 종적으로 정결한 신앙과 윤리 생활로 향긋하게 하나님께 보여 드리며, 횡적으로는 교인과 사회에 모범을 보여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 공동체가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께는 자랑스러운 종들이 되며, 일반 사회인과 집단이 만만히 보거나 우습게 보지 않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