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가면을 쓰지 않는 하나님
(시편 99:1~9)
1). 서론: 하나님은 다른 피조물의 도움 없이 스스로 존재하십니다. 스스로 독립하며 자존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의 하나가 자존(自存)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생각(롬 11:33-34), 그분의 뜻(롬 9:19, 엡 1:5), 하나님의 능력(시 115:3), 혹은 그 분의 도모(시 33:10-11)를 위해서 어떤 것이나 어떤 자에게 의존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결코 가면(假面)을 쓰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배우들이 썼던 가면(假面)을 페르소나(Persona)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을 의미하는 영어의 ‘퍼슨(person)’이나 ‘성격(personality)’의 어원도 페르소나 입니다. 심리학자 칼 융(Cart Jung)이 사용해 보편화한 페르소나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덕목이나 의무에 맞춰 자신의 원래 모습 위에 덧씌운 사회적 위선의 가면적인 인격을 말합니다.
사람은 겉으로는 거룩한 채 하고 속은 더러운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이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모든 것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가면을 쓰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가면을 쓰고 자신을 포장하지만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든지 거룩하신 분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자들은 가면을 쓰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 역시 가면을 쓰고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짓의 가면을 쓰려는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거룩을 묵상하면서 닮아가려는 노력을 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2). 본론(Text): 신정시(神政詩)의 결론적인 시로(100편이 있지만) 여호와의 가룩함을 노래합니다. "천사의 찬양(시 6:3)에 대한 땅의 응답"이라고도 불리웁니다. "여호와는 거룩하시도다."가 3번 반복하여(3, 5. 9) 후렴 역할을 하고, 따라서 내용은 3분 되어, 1. 만민의 통치자(1~3), 2. 심판의 주(4~5), 3. 용서의 주(6~9)로 되어 있습니다.
3). 본론(Context) : 본문 시의 주제는 "그는 거룩하시다."라는 시인의 고백입니다. 쓰여진 여러 경우를 살펴보면 (1). 거룩한 이름(시 33:21, 103:1, 105:3, 106:47, 111:9),(2). 거룩한 산(시2:6, 3:4, 15:1, 43:3, 45:21, 87, 99:9), (3). 거룩한 성전(시 11:4, 138:2, 65:4), (4). 거룩한 장소(24:3, 거처, 시 68:5), (5). 거룩한 팔(98:1), (6). 거룩한 기름(89:20), 그리고 (7). "하나님은 거룩하시다".(시 99:3, 5, 9) 등입니다.
본문 시의 3, 5, 9절은 본문 시의 후렴과 같이 성전의 성가대가 회중의 찬송에 화합하여 부른 것 같습니다. 후렴에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는 사상을 거듭 반복함이 본문 시인이 가진 독특한 사랑이라 하겠습니다. 본문 시도 95, 97 편과 같이 "야웨는 왕이 되신다." 또는 "왕이시다."하는 제의적인 선언으로 야웨 하나님의 통치를 밝히는 시인인데, 95편은 야웨를 경배하는 일, 97편은 야웨를 사랑하는 일을 강조한 것에 비하여 본문 시는 통치하시는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라 함을 애써 전하려는 것 같습니다.
이 거룩함을 밝히는 후렴 3, 5, 9절을 살펴보면, 3절에는 "야웨의 이름"을 찬양할 것, 5절에는 하나님의 권위 아래 무릎꿇을 것을, 9절에는 "우리 하나님'을 두 번 강조하고 그가 계신 곳이 "거륵한 산"임을 언급하면서 무릎 꿇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전체의 내용은 "우리 하나님"이란 말이 가듭 나온 것을 보아 1절에 나온 "만민"과 2절에 나온 "모든 민족"의 대명사로서 "우리"란 말이 쓰이고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야웨 하나님이 98편의 경우와 같이 이스라엘의 민족 신의 범위를 벗어나 세계 만민의 하나님임을 밝히는 것입니다. 세계만민은 야웨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이라 할 것을 주장합니다. 이 시 중에 "야곱"이란 말(4절), "모세와 아론"(6절), "사무엘"(6절) 등 이스라엘의 민족 지도자의 이름과 조상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것은 야웨와 이스라엘의 민족사를 관련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의 이름이 나온 것은 야웨가 이스라엘의 신이라는 민족적인 관심에서가 아니라, 이들이 야웨 하나님의 "거룩함"(콰도쉬)을 누구보다 밝히 보여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성격상 많은 실수와 약점을 가진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거룩함에 접하는 것이 죽음을 가져오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그의 가룩함이 인간에게 임할 수 있을을 가르친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더불어 겨루어 이겼다."(창32:28) 할 정도로 하나님께 매달려 자기의 소원을 아뢴 사람이며 "하나님을 정면에서 보면 죽음을 받는다." 할 정도로 원시적인 '누미노제' <무서운 것, 감히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여기서 "거룩하다"(콰 도쉬)란 말이 유래했다.>를 무섭지 않은것, 그 거룩함에 접해도 죽지 않는 것을 알려준 사람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창 32:30) 함에서 야곱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세속화 또는 역사화시켰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론과 모세가 이스라엘 역사에 공헌한 일들이 많지만, "내가 선 땅은 거룩하니 네 발의 신을 벗어라."(출 3: 5) 함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이 얼마나 인간적인 요소와 세속적인 요소와는 다른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야곱이 보여준 거룩함의 역사화 때문에 하나님이 종종 인간의 오만성과 오만함에 짓밟혀 하나님의 위신과 권위가 땅에 떨어지게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가까이 할 수 있는 분이며 야곱과 같이 씨름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마주 붙잡을 수 있는 분이며 야곱과 같이 씨름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마주 붙잡을 수 있는 친근감은 종종 인간의 무례성으로 하나님의 위신을 격하시키는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이 야곱적인 친근성과 모세적인 경원성(敬遠性)을 함께 유지해야 합니다. 하비 콕스(H. Cox)의 세속화 개념은 야곱적이고 칼빈의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이란 사상은 모세가 하나님 앞에 신을 벗는 조심성을 말합니다.
* 이상과 같이 본문을 쉽게 풀이 해 보았습니다. 본문의 주제는 "여호와 하나님은 거룩히신 분"이란 것입니다. 본문 3절에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니 그는 거룩하심이로다.” 5절엔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의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라고 했으며, 마지막 9절에는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성품을 가지신 분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진실하시고 거짓이 없는 분이란 뜻입니다. 위선이나 가면(假面)의 행사를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야곱, 아론, 모세 3사람이 언급된 것은 야웨 하나님의 "거룩함"(콰도쉬)을 누구보다 밝히 보여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성격상 많은 실수와 약점을 가진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거룩함에 접하는 것이 죽음을 가져오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그의 가룩함이 인간에게 임할 수 있을을 가르친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과 오래 있어 봐야 합니다. 단지 몇 번 만났거나 인사치레 할 정도로는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는 이유는 사람마다 가면을 쓰고 만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쓴 가면을 바깥에서는 잘 벗으려 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 가면은 가까이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알기 어렵습니다. 가면을 벗었을 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면을 벗었을 때, 옆에 있는 사람이 좋아하는 경우보다 싫어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왜냐하면 인격적이고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가면을 쓰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면을 벗었다고 하는 것은 원래의 모습을 감추었다는 것이기에 가면을 벗었을 때, 싫어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약점을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감추고 싶은 치부가 많은 사람일수록 그 가면은 더 두꺼워집니다. 늘 그 가면만을 보다가 가까이에서 벗은 본색을 본 사람은 더 충격에 빠지는 것입니다. 특히 지도자일수록 이런 경우가 더 많습니다. 특히 그 지도자를 따랐던 사람일수록 더 충격을 받습니다.
중국 역사소설 삼국지를 읽어보면, 천하를 호령하는 많은 영웅들이 등장합니다. 그 영웅들에게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일당백의 무장들과 방안을 제시하는 뛰어난 모사들이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무장들과 모사들의 싸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뛰어난 무장들과 모사들이 있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판가름 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목숨을 바쳐 평생 섬길 것처럼 떠벌리는 무장들과 모사들이 배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의 배반 때문에 적의 공격을 받거나 참패하게 됩니다. 그들이 그토록 따랐던 주군을 배반하는 이유는 비슷합니다. 처음 따를 때에는 진정한 영웅으로 보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유비라는 인물 주변에는 이런 배반자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유비에게는 다른 영웅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가면이 없었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따르는 사람들을 사랑했고, 덕과 공의로 백성들을 다스렸습니다. 가면은 일시적으로 나를 감출 수 있을지 몰라도 오랫동안 나를 숨길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내 주변 사람들에게 숨기기란 더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가면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감추기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 자신만 알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숨기면 숨길수록 가면을 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 가면을 쓰지 않았습니다. 또한 위대한 사도인 냥 자신을 내세우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그에게 가면은 굳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가면을 쓰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 역시 가면을 쓰고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두꺼운 가면을 쓰고 계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을 알면 알수록 엄청난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처음 잘 몰랐을 때에는 어쩔 수 없었다 해도 점점 알게 될수록 실망하고 떠나갈 것입니다.
사람은 겉으로는 거룩한 채 하고 속은 더러운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이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모든 것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가면을 쓰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가면을 쓰고 자신을 포장하지만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든지 거룩하신 분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러나 더러운 사람은 거룩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고 거룩한 사람은 더러운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더러운 사람은 더러운 사람을 좋아하고 거룩한 사람은 거룩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이처럼 거룩한 하나님을 따르고 그분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더러운 사람이 아니라,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떠나서 싫어하는 모든 사람들은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더러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시인은 4절에서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능력 있는 왕은 정의를 사랑하느니라 주께서 공의를 견고하게 세우시고 주께서 야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나이다.” 거룩한 품성이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라면 정의와 공의는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행하시는 통치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생을 다스리실 때, 늘 변하신다면, 한 번은 이랬다 또 한 번은 저랬다 하신다면 어떻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따르는 자들이 어떻게 믿고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항상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증거로 본문의 시인은 모세와 아론, 사무엘을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이 세 사람 모두는 백성들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을 때, 그들을 대신하여 간구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간구를 들으셨고,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지만 모세와 아론의 경우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어리석은 행동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8절에서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셨고 그들의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신 모든 것들이 공의로운 것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을 닮아 가려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점점 깨달을 때, 우리는 그분을 더 의지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 역시 나에게 있는 가면(假面)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인 줄 믿습니다.
4). 결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송과 경배 하면서 예배드리는 우리들의 일상적 삶이 되도록 노력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열등감은 자기를 남보다 못하거나 가치 없는 존재로 낮추어 평가하는 심리입니다. 그래서 이 열등감은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과정이나 좋은 인간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방해가 되거나 자신의 본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문제를 동반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의식은 태연한 척 포장하지만, 무의식은 뭔가 부자연스러움과 어색함을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이런 열등감이 무서운 이유는 가면을 통해서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라는 우월감, 미움을 받을까 두려워 타인에게 지나치게 친절하는 '착한 사람의 가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태연한 척 하는 'Cool의 가면' 실수나 잘못을 했을 때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완벽주의의 가면' 등이 그것입니다.
우리 기독자는 자신의 가면에서 자유로워야 하겠습니다. 감추기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야 하며,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 자신만 알뿐 아니라,다른 사람들에게 숨길 필요는 없습니다. 숨기면 숨길수록 가면을 쓰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 가면을 쓰지도, 위대한 사도인 냥 자신을 내세우지도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가면을 쓰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 역시 가면을 쓰고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두꺼운 가면을 쓰고 계신다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엄청난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거룩하신 성품을 가지신 분이시며, 진실하시고 거짓이 없는 분입니다. 우리는 가면(假面)의 유혹을 쓸어버리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인 줄 믿습니다. 끝.
2025. 8. 3.
山下연구원: 양 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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