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약설교마당(135)

79. 행복한 결말

solomong 2025. 6. 24. 08:57

79. 행복한 결말

(본문: 빌1:20-21)

 

1). 서론: 인생이란 줄곧 행복의 연속으로 되풀이되는 것도 그리 재미없을 것 같습니다. 매일이 그 날이 그 날이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사는 것도 재미없지요. 대학 졸업하고 부모를 잘 둔 덕(德)에 당장 갖출 것 다 구비하고 옛날 표현 같이 날아갈 뜻한 기와집에 머슴(비서) 두고, 요사이 매일 같이 전국관광이나 가고, 그것도 재미가 없어 세계여행을 떠나 몇 년이나 결려 150개국 나라 이상을 몇 번 여행한들 그것도 싫증이 날 것입니다. 이런 것은 순간적 쾌감내지 쾌락은 있을지 몰라도, 가슴을 뭉클케 하는 감격은 없을 것입니다.

 

필자가 청년심리학을 전공하여 석사학위를 받은 Pacific School of Religion(태평양 신학대학원)의 소재지요, 대학촌인 미국 California주의 Berkeley는 사시장춘(四時長春) 나무와 풀들은 꽃이 핍니다. 두 번째 도미하여 마지막 공부한 곳은 Missouri주의 St. Louis에 소재한 이든신학대학원(Eden Theological Seminary)이었습니다. St. Louis의 기후는 우리나라 서울이북 강원도의 기후와 비슷합니다. 연 평균 눈이 허리까지 오는 추운 겨울 날씨이고, 따뜻한 봄이 올 때면, 캠퍼스의 잔디와 조경나무에서 피어나는 파릇파릇한 생명의 상징인 잎과 꽃은 CA.의 '버클리'에 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업, 공부, 연구 등등에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겨 든든한 기반을 잡는 그 순간! 행복의 결말에서 얻는 성취감! 도전(挑戰)과 응전(應戰)의 짜릿한 행복의 결말은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 인생 전반에 있어서, 예컨대 종교가, 예술가, 학자, 사업가, 공직자의 진급, 결혼 등등의 분야에서 노력한 그 결과로서의 행복의 결말은 다 아름답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바울이 로마 옥중에 갇혀있으면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란 말씀을 묵상 할 때,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등한시 하여 부끄러운 것도 없고, 지금도 당당한 삶을 살지만 혹여 죽음이 와도 주님만 존귀하게 할 수 있다면 餘恨이 없다고 한 말씀을 생각해 봄직 합니다.

 

2). 본론(Text): ①.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외부적인 환경 조건이 더 좋아지기를 바람이 아니라(출옥하여 자유인이 되는 것 등등의 것), 바울의 간곡한 소망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기대”(προσδοκία)란 헬라 원어는 πρός 대격의 전치사로서, ‘향하여’, ‘목적으로’라는 뜻이 결합하여 ‘大望’한다는 의미이고, “간절한 소망”(ἀποκαραδοκία)이란 ἀπό=‘빼내어’라는 뜻이고, κάρα=‘목’이란 名詞이고, δοκει̃ν=‘바라보는’ 형용사이며, 동사는 προσδοκάω로서 ‘바라보다’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鶴首苦待라는 낱말이 가장 어울리는 표현입니다. 학이 목을 길게 빼내어 앞을 향하여 애타게 바라본다는 의미입니다.

 

②.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께 줄 항복을 하고난 이후부터는 소극적으로는 ‘아무 일’ 즉, 자기를 중상 모략하는 악의의 전도자나, 자기 몸을 결박해 있는 로마의 관원도 자신의 마음을 부끄럽게 할 조건은 못되었습니다. 적극적으로는 온전히 담대하여, 여기 膽大(παρρησία)란 “언론의 자유”의 뜻으로 “담대성”, 또는 “확신” 등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온전히 담대하여”란 의미는 “모든 확신적 자유에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과거나 현재나 확신에서 담대하게 전도하였고, 그의 말을 꺾을 자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③.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바울의 삶은 일반 사람들처럼 자기를 위한, 가족을 위한, 향락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일보 전진하여 일반 신자들처럼 그리스도를 위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자신의 삶 자체가 그리스도란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삶의 동기요, 목적이요, 그의 생각이요, 理想이요! 전부란 것입니다. 실로 그는 그 자신은 죽고, 그리스도가 그의 안에서 살아 계신다는 것입니다.(갈2:20) 철저한 그 자신의 생명관점이었습니다.

 

3). 본론(Context): Paul은 길리기아 ‘다소’의 좋은 가문에서 출생하여 가말리엘 문하생으로서 헬라 철학에 정통하고, 유대 종교적으로는 율법주의자로 예수님의 복음주의를 반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다메색 도상에서 부활한 예수님을 뵈옵고 복음주의자로 전향(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고향땅 다소에 가서 10년 간 침묵의 자기 수련 기간을 보내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사도(천막 업을 하면서 복음전도, 교회 설립)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주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온갖 만고풍상(萬古風霜)의 고생을 경험했으며, 종내는 로마옥중의 죄수가 되어, 최후의 장렬한 순교로 그의 한생을 마감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란 자기 심중의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만, 그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자기의 간절한 기대(期待, Expectation), 그야말로, 학수고대(鶴首苦待)하고 소망하는 바였던 것은 자신의 신앙과 주의 종으로서 흐트러짐이 없이 행복한 결말이었으며, 그 바람이 도래하여, 승리의 개가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한 기독신자로서의 저마다의 목표가 행복한 결말로 탭을 끊는, 자기 인생을 저마다 “한 생을 잘 살았다.”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또한 남들의 입에서 “그는 잘 살았다.”라고 膾炙(회자)될 수 있도록 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행복한 결말은 시작과 과정은 고생과 어려운 고비가 있었다손 치더라도, 생애 과정의 탭이나, 관 뚜껑을 덥고 나서 ‘행복한 결말’이라고 자타가 인정 할 수 있는 삶을 지칭합니다. 그렇다고, 뭐 천지개벽(天地開闢)이라도 되어서, 호재(好材)와 호기(好期)를 만나서, 호박 덩굴이 그저 담 넘어오는 그런 것 말고, 한 인간으로서, 한 Christian으로써, 인생의 바람직한 목적을 갖고, 그 목적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두고 시작한 생이 그 과정도 기대와 소망이었고, 마지막 종착역이 그 기대와 소망을 성취하여, 그 목적의식이 일관되게 살았다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현실적 삶의 자세가 꿈을 가지고 사느냐가 더욱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 기대와 소망에 합당한 생활, 행위, 바른 이성, 철학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걸맞게 노력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이를 위한 건강, 절제, 인종(忍從)! 그것은 괴로운 인생의 안내자입니다. 행복한 결말(Happy Ending)이 아니라, 슬픈 결말(Sorrow Ending)이라면, 피나는 노력을 했는데 실패한다면, 처음부터 그 기대와 소망이 자기 분수에 맞지 않게 설정한 것이 아닌가를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기대와 소망이 내 노력과 일직선상(一直線上)에 서야 합니다. 그를 때, 성공도 있고, 영광도 있습니다. 현대 역사의 방향이 어디로 가는 가를 예의 주시할 필요도 있습니다. 만약 미래에 대한 믿음(소망)의 상실을 가져 온다면 그것은 곧 자기 파멸이요. 출발과 그 과정이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집단 수용소인 아우츠빗츠(Auschwitz)에서 유대동족을 위해서 상담자 역할을 했던 빅톨 프랭클은 그의“의미요법”을 설명하는 저서<Will to Meaning>이란 책 속에서, 같이 수용소 생활하던 동족이 프랭클을 찾아와서 지난밤에 꿈 꾼 이야기를 하더란 것입니다. 자기 꿈속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1945. 3. 30. 끝날 것이란 꿈의 계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수용소안 생활이 그 어떤 고난에도 인내하고 고난을 감수하면서 1945년 3. 30.을 기대하면서 희망차게 살더랍니다. 그런데 그 꿈대로 1945년 3. 30.까지 종전(終戰)과 해방이 안 되니까, 1945.3. 31.에 그만 죽더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한 어떤 과학자는 고국에 둔 사랑하는 아들을 보기 위해, 종이 조각조각 속에, 그 수용소 안이지만 그의 연구저서를 기록하면서, 자기 외엔 타인이 대신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면서 인종하면서 살더란 것입니다. 니체의 말처럼 “사는 이유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생존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분명한 삶의 목표와 이상(의미, 소망)을 가진 자들에 의해서 인류사회는 진전되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하나님 섭리의 역사는 대략 아래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①. 세계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인 역사의 방향이 ‘민주화’(民主化)였습니다. 이젠 특권층이나, 독재자가 점진적으로 살아지고, 백성이 주인이 되는 “By the people, Of the people, For the people.”입니다. R. Niebuhr는 “정의(正義)를 실현 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能力) 때문에 민주주의가 가능(可能)하며, 불의(不義)를 향하려는 인간의 경향성(傾向性)때문에 민주주의가 필요(必要)하다.”고했습니다. 우리나라 헌법 제1조 제2항에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되어있습니다.

 

②. ‘인간화’(人間化) 방향으로 흘러왔습니다. 인간의 인격과 인간의 존엄성이 날로 극대화(極大化)되어 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헌법(憲法) 제2장 제10조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인권 보장(인간으로서의 존엄, 가치, 행복 추구할 권리,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가진다.)을 하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③. ‘복음화’(福音化)의 단계입니다. . 환란과 핍박, 고난과 역경이 곤두박질하는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이 시대의 뜻하는 바는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1988-1991해에는 소련의 공산주의 붕괴와 사회주의가 중공을 위시한 공산권에서 소멸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민족의 숙원인 남북통일도 정치적 문제만 아니라, 숨어서 기도하는 이북의 하나님의 백성들과 이북의 복음화를 위하고, 남북이 통일된 그날을 위한 우리들의 기도! 하나님의 뜻은 우리 민족만이 아니라, 세계열방을 향한 우리 한국교회의 세계사적, 선교사적 사명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모든 災殃의 그 근원은 잘 못 살아가는 인생으로 하여금 각성케 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일단 말해 봅니다. 신종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2019년 12월에 중국 ‘우한’에서 최초로 발생하여 2020년1월에 중국 전역과 세계로 전염되었고, 우리나라는 특히 2020년 2월에 대구의 이단자들의 집단인 신천지교회에서 전염확산 되어, 지금 대구와 경북 지역에만 1027명(2020. 2. 27. 오전 7시 현재)의 확진 자들이 발생하였고, 또한 전국으로 전염되기 시작하였습니다.(전국: 1261명)

 

우선 급속도로 퍼지는 이 전염병을 차단하고 소멸시키는 것이 급선무이지만, 하필이면 이단자의 집단에서 이 병이 크게 번진 것에, 온 국민들은 원망과 동시에 불신자들인 국민들은 기독교의 이단이란 개념에 무게를 두지 않고, 기독교회란 것에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케 하는 결과가 되었다고 사료됩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이단사상을 가지고 날뛰는 무리들을 차제에 회개를 촉구하고, 그들의 잘못된 신앙에 대한 징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를 때, 기성교회도 회오에 찬 반성을 가져야하겠습니다.

 

. 경제성장으로 인한 우리사회의 역기능(逆機能)의 현상(자살, 정신이상, 탈사회화)은 기독교 복음(福音)만이 인간을 근원적으로 치유 할 수밖에 없다는 호기(好期)를 우리는 이용하자는 것입니다. 비록 대구의 이단집단인 신천지 기독교회로 말미암아 위와 같이, 복음전파의 거침돌이 생겼을지라도, <믿음>만이 인간을 모든 굴레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는 신념 하에서, 한국교회와 기독자들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하겠습니다.

 

상기와 같은 시대정신을 비추어 볼 때도, 우리 한 인격체의 면에서도, 신앙(信仰) 안에서 한 Christian으로서 주님의 은총과 인도하심에 가장 행복한 결말(Happy Ending)을 초래케 하는 민주화,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 행복 추구, 자유 및 평등 등의 이런 사상이 가장 기독교적인, 복음적(福音的)인 시대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행복한 결말의 근원적 표본이 된 본문의 사도 Paul은 지금 Rome 옥중에서, 그는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두고서, 합당하게(부지런히,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으로서 도덕적인 면과 신앙적인 면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게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억만장자의 기대와 소망은 너무 거창한 것이고, 이룰 수 없는 꿈일 것 같습니다. 고관대작도 시기적으로 늦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소박할지 모르나, 우리의 행복한 결말(Happy Ending)은 먼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이요, 그러면서 개인적, 가정적 인간의 기본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이런 개혁이 물결치는 이 시대에 노력만 하면 살 수 있는 문화 환경이 도래한 것입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당당하게 자랑스럽게 하나님의 역사의식(歷史意識)에 동참자(同參者)로서 생을 누리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단지 기대와 소망은 부끄럼이 없이 옳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중에, 성령의 폭포수와 같이 내리시는 은혜를 감지하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입니까! 이러면, 우리의 삶은 행복한 결말(Happy Ending)이 될 것입니다.

 

4).결론: 우리 모두가 유감없이 후회 없는 신앙의 인생길을 살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有終의 美’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자타가 인정하는 “참 그 사람 누구누구는 잘살았다!”고 평가를 하고, 소박하지만도 이런 <행복한 결말>의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후세들에게 아름다운 이야기(Story)를 남기는 그런 우리가 되고, 그 스토리가 후세인들에게 하나의 깊은 감명을 주면서, 그들의 삶의 한 標本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