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약설교마당(135)

78. ​그리스도의 품안(ἐν χριστ​ῶ)

solomong 2025. 6. 19. 10:12

 

78. ​그리스도의 품안(ἐν χριστ)

(본문: 엡1:3-14)

 

1). 서론: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라는 용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 예수 안에서”, “주 안에서” 라고 변화하면서 바울이 즐겨 애용한 낱말입니다. 그의 서신을 통해서 164회나 사용한 것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만, 그것은 바울의 愛用하는 관용구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깊은 신앙의 체험에서 터득된 신학체계를 말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그리스도 안>이나,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하기엔 말소리나 말투가 주는 느낌과 맛의 語感이 좋지 않은 것 같아서, 우리 한글 표현으로<품안>이 우리들의 실존에 實感나게 닿는 용어라고 생각하여, <그리스도의 품안>이라고 해 보았습니다. ‘그리스도’는 神의 槪念으로, ‘예수’는 역사 세계에 내려오셔서 33년간 삶을 산 人的 槪念을 생각하고, ‘그리스도 예수’는 神人兩性의 의미를 지니신 ‘주님의 품안’을 말하는 것입니다.

 

‘품안’이란 낱말의 사전적 의미는 “품는 범위의 안”, 또는 “가슴으로 품을 수 있는 범위의 안”이란 뜻인데, 이를테면 ‘자식도 품안의 자식’이란 속어처럼, 그래서 우리는 ‘어머니의 품안에 안겨 잠을 자는 아이의 모습이 평화롭기 그지없다.’라는 말을 자주하지요. 하지만, 자식이 어렸을 때는 부모의 뜻을 따르지만, 자라서는 제 뜻대로 행동하려 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서, 자식도 품 안에 들 때가 내 자식이란 의미가 더 풍깁니다. 더 나아가서 ‘품안’의 넓은 뜻으로는, “어떠한 사람이나 세력이 보호하는 범위 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도 있습니다. 이런 思念들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의 품안”에 대해서 묵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2). 본론(Text): ①. 에베소서의 槪觀-에베소는 서부 소아시아의 ‘에게 해’연안에 (현재의 터키) 위치한,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의해 기원전 9세기에 건립된 식민도시입니다. 에베소교회의 설립 경위는 福音이 처음으로 전파 된 것은 바울의 2차 전도여행 중인 A.D. 50년경으로, 그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 등지에서 전도 여행을 마치고 유대 지역으로 돌아가는 중에, 에베소에 들러 단기간 전도하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남겨 두고 떠났던 것입니다.(행 18:18-23).

 

그 후 바울은 제3차전도 여행 중에 에베소를 다시 방문하여 적어도 2년 3개월 이상 머물면서 활발히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바울은 3개월 동안은 유대인 회당에서 말씀을 전했지만, 유대인의 반발로 회당 사용이 불가능 해지자 ‘두란노’ 서원에서 약 2년 동안 선교를 하며, 에베소 교회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행19:8-10)

 

바울은 그의 복음전도에서 소아시아지방은 잊을 수 없는 성역의 터전이었으며, 특히 에베소교회는 친히 2차나 주재하면서 전도했던 잊지 못할 곳이기도 합니다. 멀리 로마 옥중에 갇혀있던 바울로서는 이 지방에 부탁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마침 바울의 영향 하에 골로새교회를 직접 설립한 ‘에바브라’가 로마로 찾아와서 골로새교회의 이단사상이 들어와서 교회가 혼란한 위기에 직면한 사정을 바울에게 아뢰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골로새교회를 위해 골로새서를 기록하고, 때마침 로마에서 회개한 ‘오네시모’도 같이 보내어 그의 상전이며 골로새교회의 중진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기 위해서 빌레몬서를 기록하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의 마음에 숙제로 남아있던 문제를 편지로 써서 에베소를 중심한 소아시아교회들에게 보내 준 것인데, 이것이 에베소서인 것입니다. 그러나 에베소서를 기록할 구체적인 사유가 전연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소아시아의 교회들은 일반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같이 있으므로 잘못하면 분열될 위험을 늘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차제에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敎會의 통일을 당부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서의 저작은 결코 부수적인 목적에서만 아니라, 오히려 전체적이며 일반적인 요구에 응하는 치밀하고도 심도 있는 서신내용이었습니다.

 

본서의 특색은 그리스도교의 <교회론>에 대한 새로운 啓示였으며, 교회의 터전은 주님이시며(고전3:11), 창시자시요, 소유자이시지만(마16:18),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는 제자들의 신앙상태가 너무나 빈약하였기에, 깊은 진리의 계시는 후일에 강림 하실 성령의 역사에 남기셨던 것입니다.(요14:26) 그 중에서도 가장 뚜렷한 것이 예가 <교회론>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비밀은 바울에게 계시되었던 것입니다.

계시된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스도를 그 머리로 하여,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연합함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론>은 그리스도를 중심한 교회의 교리를 논하는 동시에(1:-3:), 이 교리를 반영할 성도들의 사랑의 행위를 논하고 있습니다.(4:-6:) 여기에 교회를 중심한 하나님의 영원하시며 웅대한 계획의 전모가 엿보이게 합니다.

 

②. 1:3- “그리스도 안에서”(ἐν χριστ) -사도 바울의 애용 구절인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축복의 방법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누릴 신령한 복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며(요14:6) 그 복락을 누릴 장소는 그리스도 품안(κόλπος)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이 그리스도와 聯合함으로 一體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서신에서 164회나 바울이 반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씀을 하는 狀況은 언제나 신앙의 결단, 확신, 및 선포를 할 때, 항상 그의 이 愛用 句를 썼던 것입니다.

 

3). 본론(Context): 사도 바울은 그의 14편의 서신(히브리서 포함) 중에서 “그리스도 안에서”(ἐν χριστ)란 用語를 즐겨 쓴 句節이 164회나 된다고 합니다. 그의 서신에서 이 愛用句節을 쓸 때는 그간 자기가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 死線을 넘나드는 위기에서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신앙, 복음 전도의 가시밭길을 헤치면서 인도해 주시는 성령의 보호하심을 받은 경험에서, 서신의 受信者들을 향하여, 자기 신앙의 結緣한 意志를 決斷하는 모습을 보일 때, 그리스도를 향하는 신앙의 자기 確信을 표명할 때, 수신자들을 향한 복음을 통한 행복 된 삶을 영위할 것을 宣布할 때마다 이 애용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이 관용구는 ‘그리스도인의 존재 樣式’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설교제목으로는 <그리스도 안>이나,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하기엔 말소리나 말투가 주는 느낌과 맛의 語感이 좋지 않은 것 같아서, 우리 한글 표현으로 <품안>(κόλπος)이 우리 실존에 實感나게 닿는 용어라고 생각하여, <그리스도의 품안>이라고 해 보았습니다.

 

일직이 예수님께서 地上의 삶을 마감하는 고별의 말씀을 요한복음 13:1에서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표명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요14-16장에서 <다락방 강화>를 하시고, 이어서 대제사장으로써의 간곡하고 애절한 기도를 요17장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올리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다락방 강화와 기도문 속에서,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15:4)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17:29)

 

이처럼 예수님의 제자로서 누리는 행복은 예수님의 품안(κόλπος)에 깊이 머무르면서 예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 평안, 사랑을 소유하게 되며, 예수님께서 느끼는 것을 같이 느끼고 예수님의 가슴으로 다가가며 예수님의 가슴으로 사는 제자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되려면 우리 안에 예수님의 가슴이 가득하기를 열망하는 信仰의 生命體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κόλπος)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요13:23)의 익명의 제자는 요한복음의 저자 사도 요한을 가리키고 있습니다.(요19:26, 21:7, 20 등 참조)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품속에서 滿腔에 넘치는 사랑을 가슴으로 느끼고, 體得했기에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쳤으나, 골고다 예수님의 십자가까지 가서 눈물지었으며, 예수님의 유언인 ‘성모 마리아’를 죽기까지 지성으로 모셨으며, 그는 귀양살이 ‘밧모’ 섬에서 요한 계시록을 기록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품안>은 생명과 평안과 사랑이 넘쳐흘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란 말씀을 자기의 사랑하는 애용어로, 신앙의 체험에서 나온 결단과 확신에 찬 신념으로 受信敎會에 선포했던 것입니다. 이는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결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율법에 충실한 자며, 그 율법주의에 충성심의 소유자이었음을 자처했던 그가 다메섹도상에서 그리스도에게 포착된 후, 그의 신앙은 과거 유대교에서 가졌던 것 이상으로 체험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진리를 배우고, 인식하고, 가르치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예배드리는 것 이상으로 체험했던 것이며, 이는 그리스도와의 結合이었습니다. 그는 이 결합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단히 호흡하며, 생각하며, 일하며, 사는 확신적인 실존이었던 것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 안>이란 기본 바탕은 바울 신학의 槪念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일직이 요3:3에서 거듭나는 길, 즉 重生의 도리에 대한 구체화하고 완성한 것이 바로 신앙의 길로서, 그리스도와 生死苦樂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로지 ‘개인 對 개인’의 결합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구원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具現은 성령의 역사로서 달성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수양이나 명상이나 어떤 인간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실 때 홀연히 체험되는 사실입니다.(요14:20) 구약시대에서는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위한 역사였으며(God for us), 성육신하신 성자시대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실현시켰으며(God with us), 지금은 성령을 통해 우리들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God in us) 이것은 축복의 絶頂이라고 하겠습니다.

 

자! 이제 우리들도 <그리스도의 품안>에서 주님의 생명, 평안, 사랑을 순간순간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통해서 부단히 공급받으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축복의 범주 안에 살다가보면 福에 겨워서, 蕩子처럼(눅15장),아버지 품안을 벗어나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無風地帶라 품안을 벗어날려는 유혹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바깥쪽이 어떤가를 기웃거릴 수도 있고, 탕자처럼 세상으로 향했다가 悔恨에 젖어 울기도 합니다.

 

세상살이의 恨이 맺혀, ‘울프’라는 닉네임의 무영시인의 쓴, <늑대처럼 밤을 새워 운다.>를 아래에 적어 봅니다만, 사실은 이런 자들이 <그리스도의 품안>에 제일 먼저 급히 안겨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품안에서 福된 삶을 산다고 自足하지 말고, 울고 있는 이웃형제들을 <그리스도의 품안>으로 안내 할 더 큰 사명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또 다시 적막한 밤이 찾아왔습니다./휘황 찬 보름달이 앞산 위로 고개를 내밀면/까닭모를 그리움에 산에 오릅니다./돌아보면 지난날들은/물 위에 써 내려간 몇 줄 낙서,/댓잎을 스쳐간 한줄기 바람이었습니다./머물고 싶어도 머물 수 없었던/가슴 속에 접어둔 悔恨이었습니다./보이지도 않고/무엇 하나 잡히지도 않는데/비 오고 바람 부는 거친 들판을/장님처럼 다듬거리며/무엇을 찾아, 무엇을 얻으려/그렇게 또 헤매었을까요./사노라면/그립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눈물겹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바람에 지는 꽃잎 하나에도/이렇게 가슴 아픈데/외로움이 사무처 그리워 질 때/그리움이 사무처 서러워 질 때/산마루에 홀로 서서/밤을 새워 나는 웁니다./늑대처럼 나는 웁니다.”

 

序論에서 우리말 俗語 풀이를 해 보았습니다만, “품안의 자식”이란 부모의 품안의 생명과 평안 그리고 사랑을 享有하는 행복한 자식이란 의미보다는, 어쩌면 부모 膝下를 벗어난 한심스런 자식을 비유하는 뜻이 더 강하게 풍기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는 “불면 날아갈까, 손대면 깨질까, 金枝玉葉 내 새끼”하면서 품안에 안고 키우지만, 자라서는 제 뜻대로 행동하는 자식을 일컫는 말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자식은 아무리 나이 들어도 부모에게는 언제나 어린 아이 같습니다. 그래서 자식이 세계무대로 향해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도 여전히 품안에서 놓지 못하는 것, 그것이 어쩌면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부모의 공통된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들 중에는 이런 不孝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품안’의 廣義로서“어떠한 사람이나 세력이 보호하는 범위 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처럼, 주님께서 다락방 강화에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15:4)는 말씀과 같이, 포도나무 가지는 나무 안에 거하고 주체의 수분은 가지 안에 흘러나와 생명을 유지 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와 우리들과의 생명적 관계가 유지 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과실을 맺을 수 없다는 것은 극히 단순한 이치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열매란 신앙을 떠나서 천성적으로나, 수양으로도 되지 않는 것도 자명한 진리입니다. 참된 열매란 그리스도께서 공급하시는 은혜를 힘입어서만이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성령의 열매 9가지-갈5:22 참조) <나=그리스도>와 <너=그리스도인>의 관계는 선명한 人格的인 信仰을 말하며, 結合하여 一體가 되는 것이며, 그 결합의 結果로서果實을 맺으며,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으로 歸結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품안>에서 생명과 평안과 사랑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4). 결론: <그리스도 안에서>라는이 愛用句節를 바울이 쓸 때는 그간 자기가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 死線을 넘나드는 위기에서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신앙, 복음 전도의 가시밭길을 헤치면서 인도해 주시는 성령의 보호하심을 받은 체험입니다. 그래서 서신의 受信者들을 향하여, 자기 신앙의 結緣한 意志를 決斷하는 모습을 보일 때, 그리스도를 향하는 신앙의 자기 確信을 표명할 때, 수신자들을 향한 복음을 통한 행복 된 삶을 영위할 것을 宣布할 때마다 이 애용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일직이 주님께서도 <다락방 강화와 고별기도문>에서, ‘그리스도와 우리’의 선명한 人格的인 信仰을 말씀하시면서, 聯合하여 一體가 되어야 하며, 그 結果로서果實을 맺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품안에 안겼던(κόλπος), 요한복음의 저자 사도 요한도 예수님의 품속에서 滿腔에 넘치는 사랑을 가슴으로 느끼고, 體得했기에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쳤으나, 골고다 예수님의 십자가까지 가서 눈물지었으며, 예수님의 유언인 ‘성모 마리아’를 죽기까지 지성으로 모셨으며, 그는 귀양살이 ‘밧모’ 섬에서 요한 계시록을 기록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안에서>는 단지 진리를 배우고, 인식하고, 가르치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예배드리는 것 이상의 체험인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와의 一體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단히 호흡하며, 생각하며, 일하며, 사는 확신적인 실존이었던 것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란 기본 바탕은 바울 신학의 개념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일직이 요3:3에서 거듭나는 길, 즉 重生의 도리에 대한 구체화하고 완성한 것이 바로 신앙의 길로서, 그리스도와 生死苦樂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로지 ‘개인 對 개인’의 결합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구원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具現은 성령의 역사로서 달성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수양이나 명상이나 어떤 인간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실 때 홀연히 체험되는 사실입니다.(요14:20) 구약시대에서는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위한 역사였으며(God for us), 성육신하신 성자시대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실현시켰으며(God with us), 지금은 성령을 통해 우리들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God in us) 이것은 축복의 絶頂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품안>은 ‘기독자의 존재 樣式’인 것을 명심합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품안>에서 생명과 평안과 사랑이 넘쳐흐르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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