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약설교마당(135)

77. 근심이여 안녕!

solomong 2025. 6. 12. 08:55

 

77. ​근심이여 안녕!

(본문: 고후7:5-10)

 

1. 서론: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는 "근심은 생명의 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염려는 우리의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파괴하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명을 단축시킬 뿐 아니라, 새로운 창조적인 일에 전념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거짓말은 눈덩이와 같이 굴리면 굴릴수록 더 커질 뿐이라는 말처럼, 근심도 마찬가지입니다.

 

데일 카네기의 '근심이여 안녕'이란 책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만, 미국 콜로라도 주 한 산봉우리에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나무는 400여 년간 열네 번이나 벼락을 맞아도 쓰러지지 않았으며 수많은 눈사태와 폭풍우를 이겨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 나무가 쓰러진 까닭은 바로 딱정벌레 떼가 나무속을 파먹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랜 세월에도 시들지 않고 폭풍과 벼락을 견뎌온 그 거목이 손가락으로 문지르면 죽일 수 있는 작은 벌레에게 쓰러지고 만 것입니다.

 

우리도 이 거목처럼 인생의 폭풍우와 눈사태와 벼락은 이겨내면서도 '근심'이라는 벌레에게 우리의 심장을 갉아 먹힐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는 말씀도, 본문의 말씀을 겪고 난 이후의 그의 인생과 신앙의 단련 속에서 영감을 받은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을 묵상하고서 우리도 <근심이여 안녕!>합시다.

 

2. 본론(Text): ①.고린도교회와 바울과의 화해 분우기에 대한 기쁨-바울은 그간 에베소에서의 환란(고후1:8), 드로아에서의 실망(고후2:12-13), 현재 본문에서 마케도니아에서의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복잡하고 어려운 사정을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은 에베소에서 엄격한 편지를 써서 ‘디도’편으로 앞서 보내어 문제해결을 바랬던 것입니다. 드로아에서 그를 만날 예정이었으나, 여의치 못해 실망한 나머지 드로아 전도의 기회를 버리고, 바다를 건너 마케도니아로 간 것입니다. 여기서 디도를 만날뿐더러, 그를 통해 고리도교회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과 고린도교회 사이에 화해의 분위기에 대한 기쁨이었습니다.

 

②. 고후7:5-6-위로와 사랑-고후 2:12-13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온 조수 ‘디도’를 만나는 장면을 말하려고 하다가 중단한바가 있었습니다. 이제 여기에 와서야 다시 ‘디도’와의 이야기를 계속하게 됩니다. 그간 바울이 마케도니아에 당도했을 때에는 고린도교회 내의 반대자들과 다투는 처지고, 그래서 바울 내심은 두려움으로 마음과 육체는 괴로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디도’의 기쁜 소식으로,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③. 고후7:7-10-근심과 기쁨-바울은 상심된 마음으로 勞心焦思 괴로워하던 중, ‘디도’를 통해 고린도교회의 기쁜 소식을 듣고, 몹시 감격한 심정이었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⑴. 고린도교회 내 분위기는 여전히 바울을 ‘사랑하고 사모’한다는 것이요, ⑵. 그간 자기들의 잘못에 대해서 뉘우치는 마음으로 ‘애통’해 하고 있다는 것이요, ⑶. 바울의 ‘교훈을 실행하고 그의 대적들을 막으려는데 열심’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얼마동안 ‘엄한 편지’(고후2:3-4)를 보낸 것에 대한 후회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편지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근심하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편지로 인하여 발생했던 근심은 ‘잠시 동안’뿐이어서 , 그들이 회개하게 되어서 바울은 기쁨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바울에게만 잘못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도 옳지 못한 태도이었으나,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되어서, 회개’함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근심’엔 2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근심으로, 전자는 悔改(μετάνοιαν-마음을 고침)를 통한 구원과 영생에 이르게 되고, 후자는後悔(μεταμελόμην-판단을 고침)를 이루는 것이기에 사망과 영벌에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그리스도께 대한 근본적인 마음의 고침이고, 후회는 세상 사람들에 대한 단지 마음고침에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3. 본론(Context): 바울은 그간 그리스도의 소명에 응답하여 주님의 일을 하는 중에,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절대 절명의 궁지 속에서 헤매는 것 같은 경험도 에베소 전도에서 체험하게 되었습니다.(고후1:8-9)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에서 1년 반 동안 머물면서 복음전도에 심혈을 쏟은 나머지, 고린도교회를 설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피와 땀을 흘린 그 결과의 보람된 열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교활한 유대 거짓사도들이 고린도교회를 어지럽게 하였습니다. 이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히브리인들이라고 떠들면서, 자신들이야말로 정통파의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큰 소리를 치면서, 고린도교회에 침투하여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고 선동하면서 고린도교회를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근심 걱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의 복잡하고 어려운 사정을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은 에베소에서 엄격한 편지를 써서 ‘디도’편으로 앞서 보내어 문제해결을 바랬던 것입니다. 드로아에서 그를 만날 예정이었으나, 여의치 못해 실망한 나머지 드로아 전도의 기회를 버리고, 바다를 건너 마케도니아로 간 것입니다. 여기서 디도를 만날뿐더러, 그를 통해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과 고린도교회 사이에 화해의 분위기에 대한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상심된 마음으로 勞心焦思 괴로워하던 중, ‘디도’를 통해 고린도교회의 기쁜 소식을 듣고, 몹시 감격한 심정이었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⑴. 고린도교회 내 분위기는 여전히 바울을 사랑하고 사모한다는 것이요, ⑵. 그간 자기들의 잘못에 대해서 뉘우치는 마음으로 <애통>해 하고 있다는 것이요, ⑶. 바울의 교훈을 실행하고 그의 대적들을 막으려는데 열심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잠시 ‘엄한 편지’(고후2:3-4)를 보낸 것에 대해서 후회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편지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근심하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편지로 인하여 발생했던 근심은 ‘잠간 동안’뿐이었고, 그들이 회개하게 되어 바울은 기쁨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바울에게만 잘못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도 옳지 못한 태도이었으나,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되어서, 회개’함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근심’엔 2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근심으로, 전자는 悔改(μετάνοιαν-마음을 고침)를 통한 구원과 영생에 이르게 되고, 후자는後悔(μεταμελόμην-판단을 고침)를 이루는 것이기에 사망과 영벌에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그리스도께 대한 근본적인 마음의 고침이고, 후회는 세상 사람들에 대한 단지 마음고침에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이상이 그동안 바울의 가슴 속에서 근심과 기쁨이 교차되는 사연이었으며, 드디어 바울의 마음속엔 <근심이여 안녕!>이었습니다.

 

<근심>에 대한 용어 풀이는 '해결되지 않은 일 때문에 속을 태우거나 우울해함'입니다. 인간의 정저 감정인 근심에 대한 心理學的인 논리를 잠시 전개해 봅시다. 왜 인간들은 걱정과 근심 속에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 입니까. 짐승이 아니기 때문에 현재의 삶을 思惟하고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는 '인지적 성찰'의 시간을 갖는 것이 인간만의 고유한 지적, 정신적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각자가 서있는 삶의 위치에서 ‘스트레스’ 없이 살 수는 없지만, 과도한 스트레스는 신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동시에 붕괴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으로 상대적인 위안을 얻기도 하지만, 끝없이 나보다 나은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그 사람에게 상실감을 안겨다 줍니다. 자신감이 강한 사람은 모든 것에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그의 내면은 약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며, 자신의 열등한 모습을 감추기 위하여 과장된 행동을 보이지 않게 허세를 부리게 되며, 거침없이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열등감을 숨기려는 底意라고 합니다.

 

인간의 생명은 살아가는 것 그 자체이므로 '헛되이 살았다.'것을 바라지 않기에, 가치 있는 삶, 돈, 물질적인 욕구, 성취에 몰두하지만, 자기 마음먹은 대로 안 되는 것이 인생살이인 것입니다. 또한 心理學에서는 安全의 욕구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심리적 안정을 취하려는 노력, 미래에 대한 불안감 등은 세상을 살아가도록 하는 觸媒劑 역할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인간은 두렵기 때문에 대비하여 미래를 준비하고, 그래서 편안한 노후를 꿈꾸기도 합니다. 불안한 미래는 인간이 안정감을 누릴 수 있도록 현재의 삶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려고 합니다. 햇살이나 따뜻함 등 긍정적 에너지를 담고 있는 단어들은 大腦의 聯想 작용에 의해 좋은 기분을 이끌어 내지만, 부정적이거나 무기력한 단어들은 내면을 음울한 안개로 뒤덮이게 됩니다. 內向的인 힘이 나무의 뿌리와 몸통 같다면, 外向的인 힘은 가지와 잎, 과실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두 가지가 다 있어야 나무가 생존할 수 있듯이, 외향적인 성격은 외부의 가치에 더 치중하는 사람으로, 항상 외부의 인정을 갈구하게 됩니다. 외부 세계의 인정과 찬사가 끊어져 인정받지 못했을 때, 그들은 삶의 意志를 잃게 됩니다. 내향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세계의 省察을 통해서 에너지를 얻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것보다 균형을 잘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또한 만약 이 근심 걱정을 인정하고 受容(Acceptance)하면, 더 이상 아픔은 인간을 괴롭히지 못할뿐더러 인생을 풍부하게 만드는 자원이 되어 준다고들 하지만, 만약 우리 인간이 그 아픔을 인정하지 않고 벗어나려고만 애쓴다면, 근심은 더욱 가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아픔이 자기로부터 원인이 된 것이 아니라, 타자로부터 기인된 것이라면 자기 최면과, 자기 컨트롤만으로 걱정을 덜어내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필자가 인간의 ‘근심 정서’에 대한 심리학적인 논리로 설명해 보았지만, <근심이여 안녕!>의 경지에 도달하기엔 너무나 벅찬 인생살이기에, 그것은 바울이 말하는 대로 ‘세상근심’에 대한 설명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신앙적인 회심>으로 跳躍하기에 근원적 해결책이라고, 사도 바울이 선언하는 이유입니다. 즉, 그리스도께 대한 근본적인 마음의 고침이어야하지, 뉘우치는 後悔는 잠시 동안 세상 사람들에 대한 단지 마음고침에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직이 우리 주님께서도,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라고 말씀 하셨던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가슴 아픈 근심 걱정을 다 치루고 난 이후의 신앙고백으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수사도 베드로 역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라.”(벧전5:7)이라고 고진감래 이후에, 그의 신앙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모든 일이 다 잘되면 땅의 것만 생각하지, 하늘의 것을 생각하기가 어렵습니다. 건강할 때는 자신만을 믿고 살지만, 몸져눕게 될 때에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비로소 모든 것을 이루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에게로 돌아오게 됩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실망하고서야 영원히 변치 않는 친구인 예수 그리스도와 진정으로 사귀게 됩니다. 危機는 인간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하는 안내자요, 근심은 기독자의 신앙 순례 길의 푸른 신호등입니다.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살기를 바라기보다 근심 걱정이 있을 때, 좌절하지 않고 더욱 담대하게 기도하는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한 마리의 새, 한 포기의 들꽃까지도 돌아보시는 하나님을 믿을 진데(마6:26-28 참조), 우리는 근심,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만이 근심과 염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함께 <근심이여 안녕!> 합시다.

 

4. 결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 사람들 간에 화목을 위해 순교까지 한 바울은 하나님의 창조적 사랑이 인간들을 흑암과 자기 고집에서 빛과 사랑으로 인도하는 것을 보고서 크게 만족하고 감격하였던 것입니다. 한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는 하늘의 즐거움이었습니다.(눅15:7) 그 즐거움이 바울의 고난과 노력의 결과이었습니다. 그 즐거움의 對照가 焦燥로서(고후2:13), 그가 마케도니아에 당도했을 때, ‘디도’가 아직 나타나지 않음으로 마음으로는 勞心焦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디도’가 돌아와서 바울에게 한 보고는 ⑴. 고린도교회 내 분위기는 여전히 바울을 사랑하고 사모한다는 것이요, ⑵. 그간 자기들의 잘못에 대해서 뉘우치는 마음으로 ‘애통’해 하고 있다는 것이요, ⑶. 바울의 교훈을 실행하고 그의 대적들을 막으려는데 열심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탕자가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 온 段階도 동경, 회개, 아버지의 뜻을 순종할 결심과 같이(눅15:17-19), 고린도교회의 반대자들과 교인들도 이와 같았습니다.

 

인간의 근심엔 2가지 종류로 분류할 수 있는데, 하나는 은혜로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요, 다른 하나는 ‘잘못에 대한 근본적 뉘우침이 없이, 그대로 영적 사망에 이르게 되는 세상 근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하는 자리로 이끄는 깊은 뉘우침이기 때문에, 그것은 최후에 구원의 선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근심이 우리 마음에 스며들 때는 바로 危機가 왔다는 신호로 알고,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안내자로, 신앙 순례 길의 푸른 신호등으로 인식하면서, <근심이여 안녕!>을 순간순간 결단하면서 살아갑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