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상한 갈대(2)
(본문: 마 12:20~21)
1). 서론: 지난 과거 생활을 자기 기억 속에서 한가히 더듬어 볼 수 있는 사람은 아직도 행복이 남아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가장 불행한 사람은 남 못지않은 과거가 있는데도 그 과거를 생각해 볼 겨를이나 힘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미래를 꿈꾸고 미래에 생겨질 수 있는 일에 대한 비전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직도 행복을 찾을 수 있게 하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내일이나 모래라는 미래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오늘 이 순간에 괴로움을 느끼고 신음하는 사람은 미래에 올 수 있는 행복마저도 빼앗긴 사람입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이 바로 이런 불행과 비극에 울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에서 포로가 되어서 잡혀간 자기 백성들에게 자기가 본 默視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사상을 가장 많이 한 예언자인데, 그 메시아는 '여호와의 종'으로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현실의 비애에서 위대한 꿈을 꾸는 사람입니다. 그 꿈은 단순한 공상의 산물이 아니고, 그 현실이란 캄캄한 칠야(漆夜) 다음에 밝아지고야 마는 미래를 보는 사람입니다. 이사야 42:1-4에서는 오시는 구세주를 “종”으로 묘사했으나, 본문에서는 주님의 제자 마태는 그 꿈이 현실화로 되어 있는 “메시아”를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구속의 대업을 성취하실 것을 증언하면서, ‘상한 갈대처럼 연약한 인생들’을 버리지 않고 구원하신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단편 소설가 O. Henry의 <마지막 잎 새(The Last Leaf )>는 그가 1905년 쓴 작품으로 휴머니즘이 물씬 풍기는 작품입니다. 뉴욕 가난한 화가들이 모여 사는 ‘그리니치’의 아파트에 사는 무명의 여류화가인 ‘존시’는 심한 폐렴이 걸려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삶에 대한 희망을 잃고 친구의 격려도 아랑곳없이 창문 너머로 보이는 담쟁이덩굴 잎이 다 떨어질 때, 자기의 생명도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집에 사는 친절한 노화가(老畵家)가 나뭇잎 그림 하나를 그려서, 진짜 나뭇잎처럼 보이게 하여 ‘존시’가 삶에 대한 희망을 소유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우리 주님은 메시아로서, 상한 갈대와 같은 인생들이 절망 속에서 허덕일 때,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시어 구원하신다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묵상코자 합니다.
2). 본문의 이해(Text): “상한 갈대”-우선 ‘갈대’라는 말이 나오니 Pascal의 “생각하는 갈대”를 상기하게 됩니다. Pascal 그의 저서 <팡새>에서, “인간은 하나의 갈대에 불과하다. 자연 중에서 가장 연약한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고 했습니다. 구약성서에서는 갈대란 “연약한 것”을 상징했습니다. (왕상 14:15, 왕하 18:21, 겔 29:6) 약한 인생을 상징함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고 고민하는 사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 고치는 문제>로 바리새인들의 모략을 받으시고, 일단 피하시는 자세를 취하셨습니다만, 이는 무제한 후퇴를 하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의 때가 이르기 전에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시려는 생각이셨습니다. 구약의 이사야는 오실 메시아를 “종”으로 묘사했으나, 마태는 오신 메시아는 고난을 통해 구속의 대업을 성취하시리라는 의미로, 상한 갈대처럼 ‘연약한 인생들’을 버리지 않고 구원하신다는 뜻으로 증언한 것입니다.
3). 본론(Context): 보통 불신자와 신앙자의 차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미국의 철학자 에머슨(Emerson)은 “믿음은 종달새의 알에서 종달새 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현실의 어두운 밤이 영원한 밤으로 계속될 것이 아니고, 반드시 아침이 밝아 올 것을 믿고 말한 이사야의 노래였습니다. 어두움에서 어두움만 보지 않고, 어두움에서 아침 빛을 바라보는 것은 하나의 모험입니다.
이 모험은 한 위대한 인물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입니다. 역사상 새로운 시대가 만들어지는 경위는 언제나 이런 인물로 새 역사가 되었습니다. 출애굽은 모세를 통해서 되었고, 중세의 여명의 아침으로 밝아진 종교개혁도 루터란 인물로 되었고, 영국의 타락한 사회혁명을 통해서 일어나지 않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낸 것도 죤 웨슬레(John Wesley)의 복음 운동으로 말미암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어두운 현실을 빛나는 미래로 만들 수 있는 한 인물,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분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란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상한 갈대일까요? 갈대는 약한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요단강 강변에 지금도 높이 4m나 되는 것으로 옛날에는 상자나 자, 화살 같은 것을 만들어 썼다고 합니다. 이것은 無力하고 나약한 인간성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런 약하고 믿을 수 없는 인간이라도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여호와의 종은 그것을 꺾어 못쓰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연약하고 의지할 곳이 없는 인간이라도 하나님은 그를 꺾지 않으시고, 그를 잘라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저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주님의 도움이 없이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고 하는 고백을 하기까지는, 사실 인간은 무력하기 짝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서 상한 갈대를 마구 짓밟아 버리려고, 정면으로 도전한 전형적인 세 사람은 철학자 니체("하나님은 죽었다"), 사회과학자 Karl Marx (유물주의자, "종교는 아편이다.”), 나치 독재자 히틀러("광기 어린 그의 인종론")이었습니다. 철학자 니체는 "약자를 돌보아 주는 것은 악이라.”라고 말하면서, "너희가 길을 지나다가 나이 많거나, 병들어 보행도 잘못하는 사람을 보면 그를 도와주지 말고, 그를 넘어뜨려 이런 약자와 병자가 하루속히 사회에서 없어지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사는 사회가 건전한 사회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Karl Marx의 사고는 성경에 대한 튀빙겐의 바우어(F. C. Bauer)의 불신앙적인 분석에 영향을 받아 성경 말씀을 인간의 상상 물로 간주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신앙이 없던 데다가, 이렇게 무신론적 신학 사상에 접한 마르크스는 기독교의 敵對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그는 헤겔의 변증법(dialectic), 곧 모든 사물은 모순적인 국면 간의 충돌로 야기되는 지속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는 사상에, 포이엘바흐의 유물론(materialism), 곧 물리적인 조건들을 관념의 상위에 두는(material conditions above ideas) 사상을 결합해서 자기 것으로 주장했습니다. 이 3가지 사상적 기본 골격이 마르크스에서 발견되니, 성경의 그릇된 이해와 변증법과 유물론 등이 그것입니다.
아돌프 히틀러의 거짓 인종 이론은 1). 세계의 모든 문명은 혼혈로 인하여 와해와 쇠약의 길을 걷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독일 민족의 제일 목표는 인종순결(人種純潔)이라고 하였습니다. 2). 인종에 대한 히틀러의 제2의 개념은 소위 '아리안 인종 또는 북방 인종'이 다른 모든 인종보다 뛰어난다는 것입니다. 그의 <나의 투쟁>이란 책에서 '문화의 창조자'와 '문화의 파괴자' 두 종류의 인종으로 구별하였습니다. 아리안 인종은 '우수한 문화 창조자'이고, 아리안 인종은 장신, 금발, 수구(여윈 몸), 碧眼(검은자위의 파란 눈), 당당한 골격 등 독일인이 적격하다고 하였고, '문화의 파괴자'는 유대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은 세계 지배를 꿈꾸는 기생충이라 하였고, 소위 유대민족의 선민사상에 교만으로 심취한 민족이라고 했습니다. 1933년 4월 7일 非 아리안 법을 제정하여 공직에서 추방(조부모 계통을 비 아리안 인종)하기로 하였고, 1935년 9월 '반 유대법'을 통과하여 소위 '뉘른베르그법'(비독일 혈통이란 이유로 공민권 박탈), 3). 약육강식의 사상에 근거하여 독일에서 1년에 1백만 명 출생자 중에서 병약한 자부터 70만 명을 제거하면 국력이 증대한다고 하였습니다. 1939년 전 독일 내의 '정신병자를 죽여 말살하라.'라고 명령하여 6만 명을 안락사란 명목으로 죽였습니다. 4). 그리스도 교도는 모든 약한 자, 저급한 자에게 편드는 종교다. 5). 그리스도교의 "인류 평등사상은 무능한 자, 병자, 범죄자, 약자가 보호받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했습니다.
광기에 찬 히틀러는 이에 대한 반론으로 하나님의 천지 창조론(The Creation)과 하나님 우주의 섭리론(The Providence)에 도전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을 6백만 명이나 학살했습니다. 빅토르 프랭클(V. Frankl)은 <의미를 위한 인간의 탐색>이란 책의 결론에서 혹독한 히틀러의 아우슈비츠 집단수용소에서 3년간 고생하다가 2차 대전이 끝나고, 귀향길에 "이 세상의 모진 고생과 체험을 다 했지만, 그래도 오직 두렵고 사랑과 경이에 찬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라고 술회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은 히틀러의 광기에서 나온 해괴한 발상으로, 그의 역사의 종언과 더불어 막이 내려졌습니다. 니체, Karl Marx, 히틀러의 이런 생각은 상한 갈대를 짓밟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그 택하신 종(메시아)은 상한 갈대라도 꺾지 않으시는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우리는 다 상한 갈대입니다. 우선 육체적으로 연약한 존재입니다.
조금만 과로하면 피곤하고 온갖 병으로 고생하게 되며, 개인차는 있어도 연세가 들면 노쇠해지는 연약한 그릇입니다. 인간의 정신도 얼마나 약한지 모릅니다. 얼른 보면 의지가 굳은 정신력이 강한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것도 상대적인 이야기이고 절대적이진 않습니다. 영성(靈性)은 더구나 약합니다. 다윗 같은 성군(聖君)도 넘어질 때도 있고, 베드로 같은 주님의 수제자도 주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은 인간의 영성이 얼마나 약한 것인가를 말해 줍니다.
그러나 사색가 파스칼의 <팡세>의 명상록 서두에 나오는 말은 "인간은 하나의 갈대이다. 모든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이 작은 인간을 죽이기 위해서는 온 우주가 다 무장할 필요는 없다. 다만 한 방울의 물로써도 족히 그를 죽일 수가 있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파스칼은 생각하는 힘, 사고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기에 사람이 사람다운 점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서 진리를 찾아서 분별할 수 있는 갈대, 약해 보이면서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를 때 강한 인간의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상하긴 했지만, 갈대이지 상한 잡초는 아닙니다. 갈대는 약하지만, 무엇인가 지닌 식물입니다.
인간은 약한 존재이지만 파스칼은 다시 말하기를, "인간에게 위대한 점이 있다면, 자기의 처참한 모습을 아는 점에서 위대하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참모습을 모르는데, 고민이 있고 비극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약한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감격할 때, 하나님 앞에 겸허한 자세로 설 때, 참 자기를 알며, 주님 능력의 장중(掌中)에 잡힌 바 되어, 약하지만 강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J. Calvin의 <기독교강요> 제1권 '하나님의 지식, 창조자'에서 "우리 자신의 (실존에 대한) 지식(앎)이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없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우리 자신의 지식도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불트만(R. Bultmann)도 역시 이와 비슷한 말을 그의 신학에서 피력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우리 자신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면 안 되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 말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쌓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후 4:8)라고 했습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9~10)라고 했습니다. 상한 갈대 같으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강한 신념의 개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옳습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 하시니라.”(요 13:1)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를 끝까지 돌보시고 십자가의 한편 강도를 "…오늘 나와 같이 낙원(樂園)에 있으리라"라고 하시며, 간음죄로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하셨습니다. 완전히 상한 갈대이지만 이런 갈대를 꺾지 않고,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당신 사랑의 품 안으로 안아 주시는 것에 기독교 신앙의 감격이 있습니다. 여기에 약하지만 강한 면이 있습니다. “삭개오야”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이 기쁜 소식이란 것은 상한 갈대와 같은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 계시고, 손만 대면 꺾어지고 말 것이지만 이것들을 꺾지 않고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4). 결론: 우리는 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그 깊고 두터운 사랑, 그 뜨거운 사랑과 인자하심이 우리 자신이 돌보심을 받고 있음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바로 이 순간도 憐愍에 찬 눈길로 매일 매시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잊지 맙시다. 이는 괴로운 현실을 타개하여 빛나는 미래를 찾아가는 길인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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