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고뇌를 통한 생의 환희, 찬물 맛을 아는가?
(가슴으로 배우는 진실)-25.번 삭제 후, 수정한 글-
1945년 해방 직후, 말라리아 ‘병’(모기로 전염되는 병)이 농촌 마을엔 환경적 요인으로 자주 찾아왔습니다. 열이 40도 전후를 넘나들고, 그럴 때면 헛소리를 하고, 산 것인지 죽은 것인지 모를 정도로 삶이 가물가물해졌습니다. 어머니는 옆에 앉아서 이마에 물수건으로 열을 식히면서, 너무나 애석해서 그런지 “차라리 내가 아프고, 네가 나았으면 좋겠다.”라는 음성이 가물거리는 중에 들려왔습니다.
아무리 모성애적 사랑이라고 하나, 어머니가 필자의 ‘병’을 대신 아파 줄 수는 없습니다. 병만이 아니라 인생의 삶 전체가 다 그렇습니다. 각자의 인생은 자기가 살수 밖에 없습니다. 남의 인생을 흉내는 낼 수 있어도, 오래 갈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실존(實存)입니다. 젊은 당신들, 앞길이 양양하고 장래가 말리 같은 희망차고 미래에 대한 아롱진 꿈속에 현재를 사는 그대들이여!
필자가 그대들에게 바라는 것은 ‘너무 쉬운 길로만 가려고 하지 말고, 고난과 도전에 항거할 줄 아는 젊은이, 거센 폭풍우 속에서도 견딜 수 있는 강인한 심신을 소유한 젊은이, 승리에 겸허하고, 패배자에 대한 가긍히 여길 줄 아는 젊은이, 남을 지배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지배할 수 있는 당신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또한 빌고 있습니다.
이 세상 철리(哲理)를 머리로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알기를 바랍니다. 한밤중에 열이 38~40도 사이를 오르내릴 때, 흰 사기그릇 사발에 가득히 떠다 주는 그 찬물 맛, 요사이 펩시콜라, 코카콜라에 길들인 당신들은 혹여 그 한밤중의 찬 물맛을 모를지 몰라도, 찬물 맛은 바로 이때가 가장 제맛을 알 때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인생의 고개 언덕이 고달프고 인생 고를 통해서 비로소 ‘철’이 들기 시작하고, 그를 때, 인생은 참으로 살맛이 난다는 말일입니다. 인생을 알고, 세상을 알고, 자기가 추구하는 진리 그 자체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아픔을 통해서 그 사랑의 정체를 알듯이 말입니다. 설교하는 젊은 목사님들! 성서 주석(Text)도 잘하고, 성서 주석한 것을 현대인들에게 교훈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면서(Context), 예화도 적절히 잘합니다. 즉 실존적 해석을 잘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감동이 없다면, 왜 그렇지요. 어느 시인은 말하기를,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많은 도시를 거닐어 보아야 하고, 죽은 사람과 한밤을 지새워 봐야 한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는 부족하다.”라고 말한 글귀가 생각이 납니다. 무슨 말입니까. 시인의 시는 그만큼 고뇌와 아픔의 삶 속에서 시가 탄생 된다는 것입니다. 젊은 목사님들! 당신네 설교에 영감이 있습니까. 보통 주석, 해석, 설교학의 원리 및 기교는 잘 되었음에도 왜 그런지 감동이 없다면, 그 이유를 압니까. 왜 그런 줄 압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아픔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으로, 성서 주석이나 해석을 잘못해서가 아닙니다. 당신들이 그 옛날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던 야곱의 벧엘의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이 인생 고를 아나요? 알기 위해서 사서라도 아파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아픔 말입니다. 그것 없이는 울리는 꽹과리 소리밖에 나지 않습니다. 교인들이 목사님의 설교엔 은혜가 없다는 소리는 바로 필자가 말하는 고뇌의 심연을 모르고 수박 겉핥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슬픔은 마음속 어딘가에 아련하고 아스라한 아픔을 탄생시킵니다. 하지만, 고뇌를 통해 삶의 환희를 맛보게 됩니다. 마치 이열치열(以熱治熱)처럼, 힘은 힘으로 물리친다는 이치와 같이, 슬픔과 아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리에 내리 쏟아부어서, 그 슬픔과 아픔이 잉태하여 소망과 환희의 노래를 부르게 함은 그 힘이 내재(內在)하기 때문입니다. 따스한 사랑의 그리움에 지친 자는 그 대상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여간한 고통과 아픔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소리 내어 울면 안 됩니다. 그것은 심약(心弱)의 유혹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속으로 울어야 합니다. 남몰래 흘리는 눈물입니다. 필자는 11살 때(초등학교 3학년), 아침 학교 가는 길거리에서, 짐수레(구루마)에 실려서 가마니에 덮어진 아버지의 시신(屍身)의 영상이 30대까지 아른거리면서 필자를 괴롭혔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된 후에는 그 영상이 지금까지 주님의 고난의 길(Via Dolorosa), 그 영상으로 승화 되어 아른거립니다.
슬픔과 아픔은 슬픔과 아픔에 침잠(沈潛)될 때만, 극복됩니다. 빅톨 프랭클(V. E. Frankl)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인하여 독일 나지(Nazi)들에게 박해를 받고, 집단수용소에서, 사랑하는 부모 처자가 죽음의 가스실로 들어갈 때, 그때의 마음은 ‘평온’했다고 나중에 그의 저서에서 피력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포기(give up)하는 심정일 때만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프랭클은 그의 이론인 로고데라피(logotherapy)에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각자의 변경할 수 없는 운명이 있지만, 마음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 슬픔과 아픔의 실존에서 환희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꿈을 먹고 사는 사람일수록, 사실로 그 삶은 비참할 정도로의 고통과 고뇌가 따르고, 고뇌에 찌들다 보면, 고뇌를 통한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환희의 감격을 맛볼 수 있습니다. 천재 화가 ‘반 고호’는 하나의 진실을 찾기 위해 정신이 미칠 정도로 몸부림쳤기에 위대한 예술이 탄생 되었던 것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또에프스키는 시베리아 형장의 사형을 면제받고 난 그 후의 생의 감격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현재 내 인생이 아무리 고달프고 괴롭더라도, 시베리아 영하 50도의 매섭게도 추운 날씨 속에서 형장의 기둥에 매달렸던 그때를 생각한다면, 지금 살아 있는 이 하나로 감격스럽다.”라고 했습니다. 별스러운 일이 아닌데도 감사하고 감격하며, 예전엔 그냥 스쳐 지나갔던 아름다운 순간들이 못내 아쉬워 땅을 치며 후회도 하면서, 지금에야 오랜 고뇌! 삶의 철리(哲理) 좀 깨친 듯, 힘찬 걸음으로 신나게 달려서 오직 한 길을 걸으며, 신선한 맑은 공기를 호흡하면서, 마음껏 숨 쉬고 있음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일의 주역들이 될 그대 젊은이들이여! 돌아갈 수 없기에 추억은 아름답고, 때로는 답답하다 못해 가슴이 아리도록 그리움이 베어내는 것이지만, 고뇌를 통한 생의 환희를 새로운 눈으로 인생의 의미와 그대들의 일(Work)에서, 특히 신춘(新春)에 더욱 감지되기를 빌면서, 청년심리학을 전공한 필자이기에 이 새봄의 출발선에 서서 당신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여기까지 써 왔습니다. 새봄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기원합니다. 끝.
2023. 3. 23.
山下연구소장: 양 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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