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산을 바라보는 애련(愛戀)한 시선
(시121:1~8)
1). 서론: 불신자들인 자기들 나름으로, <산을 바라보는 애련한 시선>은 고대 지위 고하를 불문하고 이방인과 예루살렘의 불신자들이 산이나 높은 언덕 위에 세운 제사 장소인 산당(山堂-산신당의 준말)을 단순히 산속에 있는 “작은 건물”만이 아니라, 푸른 나무 아래 세워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는 자연물의 신성함과 인간이 만든 제사 시설이 결합 된 사이비 종교 공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 시편 121편의 산은 일차적으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의 산들, 곧 시온산을 가리키며, 순례자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의 방향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신학적으로는 우상, 세상 권력, 인간의 힘처럼 도움을 기대하게 만드는 세속적 의지처를 상징하며, 본문 시인은 그 산이 아니라,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도움이 온다고 고백합니다. 본문의 시인이 ‘산을 바라보는 애련한 시선’을 현대적 우리들의 교훈으로 묵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2). 본론(Text): 121편 본문 시는 가장 아름다운 순례자의 노래로 예루살렘에 접근한 그들이 예루살렘과 성전이 서 있는 산들이 보일 때, 부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 거룩한 산들처럼 부동부식(不動不息)의 자세로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한 내용입니다.
3). 본론(Context): 본문 시는 인간이 어떤 환경이든지 물어야 할 위대한 질문 하나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내 도움이 어디서 올 것인가?”라고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자주적이기를 바라고 남의 힘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삶을 수치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존은 결코 우리 힘과 재간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철학자, 어떤 권력자, 어떤 재력가, 어떤 사업가, 또 어떤 기술자라도 그의 중심에서 이따금 들리는 소리는 이것입니다.
“내가 어디서 도움을 받을 것인가?” 또는 “무엇이 나를 도와줄 것인가?” 또는 “누가 나를 도와줄 것인가?” 특수층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실력이 있으니까 이런 도움의 요청을 해야 할 필요가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있다고 해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하는 말로써 자기가 자기를 돕는 자라고 장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 민중은 반드시 구걸하는 정신 때문만이 아니라, 오늘의 사람 자체가 여러 가지로 모순과 불합리성을 가지고 있기에 도움을 구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입니다. 더욱이 불신과 불안의 세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간절한 심정으로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 것인가?” 하고 막연하게 기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문 시편 121편은 가장 애창되고 애독되는 시의 하나입니다.
그 이유는 본문 시가 제시하고 있는 첫 구절의 질문 한마디가 누구에게나 실감이 나는 물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물음이 실감 난다는 말은, 누구나 자기 삶의 순간에서 이 물음을 자기도 모르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물음은 지식을 위한 물음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적인 실존이 이 물음 속에 반영되고 있는 하나의 소원이요 호소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 것인가?”
이스라엘 백성의 삶은 항상 불안하고 괴로웠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역사적 현실이 항상 “나의 도움은?” 하는 물음을 할 수 있는 현실이었습니다. 특히 본문 시를 포로 시대의 산물이라 한다면, 이 물음의 정당성을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기 나라는 망하고, 남의 나라에 사로잡혀 가서 중노동과 노예 생활에 지친 그 수난의 백성들이”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 것인가?”함은 당연한 질문이었습니다.
이 물음 속에는 개인적인 해방의 소원은 물론, 민족적 해방의 염원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시인이 그가 구하는 도움과 소원을 산을 쳐다보고 발표했다고 함에 어떤 의미를 지닌 것 같습니다. 3일간 특급열차를 타고 달려도 산이 보이지 않던 캐나다 중부지방 신도들은 이 시를 읽을 때 실감을 느끼지 아니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같이 산이 사방으로 둘러싸인 곳에 사는 신도들은 “눈을 들어 산을 볼 때마다 내 도움이 어디서 올 것인가?” 하여 산 그것에서 도움이 온다고 기대함보다 도움을 청하고 있는 인간의 간절한 심정을 날마다 쳐다보며 말 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산만은 알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산(山)에 대하여 대부분의 주석 가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과 생활에 깊은 관련이 있는 시온산으로 생각합니다. 시온산 그 자체보다도 야웨 하나님의 성전이 있어서 보호와 축복을 주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이 산은 하나님의 상징이고, 실상 “하나님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1절의 물음에 대한 답으로 “천지를 지으신 야웨 하나님”에게서 내 도움이 온다고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산을 보는 눈”을 알려 줍니다. 그것은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아니라, 이 산을 만드신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보는 눈입니다. 산을 보는 눈은 야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는 것임을 이 시 전체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래 본문 시인이 처음에 던진 질문, “어디서 나의 도움이 올까?” 하는 물음에 대하여 “야웨 하나님, 천지를 지으신 그분에게서 내 도움이 온다.”라는 1절 하반 절의 답을 확대하여 2~8절까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 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시입니다. 본문 시는 하나님의 본질이 이스라엘에 국한된 신이 아니고, 117편 시에서 밝힌 대로 야웨는 만민의 하나님이므로, 여기에 설명되어있는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산처럼 쳐다볼 수 있는 믿음직한 신(神)임을 알려 줍니다. 여기 소개되는 하나님은 어떤 사정에 의지하여 인간이라도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시고 보살피시고 관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하시는 소극적인 말에서 보여주는 적극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 자신이 실족하지도 않게 하시고, 우리 인간을 지키시기 위하여 항상 깨어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절대로 주무시거나 졸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이심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3~4절) 그리고 그가 하시는 적극적인 일은 인간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여기 본문 시에는 “지킨다.”라는 말이 6회나 사용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어떤 어려움에서도 도움을 받는 길은 하나님이 인간을 지켜 주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지켜 주시기 때문에, 이 세상 아무것도 인간을 해롭게 할 수 없습니다.
“낮의 해와 밤의 달”도 해치지 못한다는 것은 여기 중동지방에서 볼 수 있는 위험들입니다. (왕하4:19, 사49:10) 이러한 안도(安堵)의 삶을 7절에 솔직하게 말을 합니다. “야웨가 너를 모든 재앙에서 지켜 주시고 네 몸을 지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몸”의 원어는 “영혼”이라고 번역되는 경우가 많지만, 여기서는 “몸”, 즉 인간 전 실존(實存)을 하나님이 보호해 주심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경험에서는 이런 철저한 도움은커녕 하나님은 조금도 인간을 돌보시지 않고 위험 아래 앉히시고, 인간 스스로가 자연의 힘, 원수의 힘, 병마, 약한 권력, 모든 물질의 힘으로 고난 속에서 헤매게 하시고 일평생 “쨍하고 해 뜰 날을” 보지 못하고 우울과 불만, 원한과 저주 속에 살아가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실제적 경험과는 이 시가 너무 거리가 있지 앉습니까? 여전히 인간은 “내 도움이 어디서 오겠느냐?” 하면서 먼 산만 쳐다보고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이러한 반론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시인은 자기의 신앙을 말합니다. 실제적인 인생 경험은 그러한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고 해도, 자기가 믿는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시는 분이요. 나를 해치는 것에서 지켜 보호하시는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실제로 성서가 가르치는 하나님은 인간과 자연과 역사를 지배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기적과 이적을 인간을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은 이 보호와 지켜 주심을 받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와 같은 사람은 여러 가지 종류의 고난과 죽음의 경우를 여러 차례 겪었지만, 아직도 살아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선포하기 위하여 살아 있습니다.”(시 118:17 참고) 문제는 도움을 받는 인간의 사정보다도 도우시는 하나님의 사정입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할 때, 그는 누구나 지켜 보호하십니다. 다만 누구를 택하여 돌보시는가? 이것은 우리 인간이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여! 나를 이 환란과 죽음의 직전에서 돌보아 주시고 지켜 주시옵소서”라고 간구할 의무는 우리의 할 일입니다.
* 이상과 같이 본문 시를 좀 더 쉬게 풀이해 보았습니다. 본문 시인이 <산을 바라보는 애련한 시선>의 내용을 현대적 의미의 교훈으로 되새겨 보기로 합시다. 여기서 ‘산’은 세상의 모든 위대하고 뛰어난 것들을 의미합니다. Calvin의 주석에서는 산을 ‘세상 세력’이라고 해석했으며 박윤선 주석에서도 ‘산같이 큰 세상 세력’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문 시인은 “내가 어렵고 힘들 때 세상의 모든 위대하고 뛰어난 것에 손을 내밀어 보았지만 나를 돕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라고 말입니다. 성경의 위인들도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이 많았고 우리도 그렇습니다. 힘들고 어려울수록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뢰해야 합니다. 주께서 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21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표제어가 붙은 시편 중 하나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기마다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순례의 길을 떠날 때, 그 여정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위험과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변함 없는 보호와 신뢰 속에서 부르던 찬송이었습니다. 험준한 산길과 예측 불가능한 위험이 도사리는 그 길 위에서, 순례자들은 이 노래를 통해 자신의 시선을 창조주 하나님께 고정했습니다.
오늘날, 복잡하고 험난한 인생이라는 순례길을 걷는 우리에게 이 시편은 변치 않는 위로와 소망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이 순례자의 노래에 귀 기울이며, 우리의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지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절망과 소망의 시선: 본문 시편 기자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1절) 라고 노래합니다. 여기서 '산'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 그것은 문자 그대로 순례의 여정 가운데 앞을 가로막는 거대하고 험준한 장애물, 즉 인간의 힘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거대한 문제와 도전을 상징합니다.
둘째, 고대 근동의 종교적 배경에서 '산'은 신들이 거주한다고 여겨졌던 우상 숭배의 산당(山堂)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산을 향해 눈을 든다는 것은, 압도적인 문제 앞에서 절망하거나 혹은 세상의 강력해 보이는 존재에게서 헛된 도움을 구하려는 인간의 연약한 본성을 드러내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상치 못한 질병, 재정적 어려움, 깨어진 관계 등 거대한 '산'이 우리 앞을 가로막을 때, 우리의 시선은 어디로 향합니까? 문제의 크기에 압도되어 절망하거나, 세상이 제공하는 불확실한 해결책에 기웃거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시편 시인의 첫 고백은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들의 정체를 정직하게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에서 '산'처럼 느껴지는 가장 큰 어려움이나 도전은 무엇이겠습니까?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우리의 시선과 마음은 가장 먼저 어디로 향합니까? 세상의 힘이나 방법(산)에서 도움을 구하려 했던 경험이 있다면,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우리의 눈이 머무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의지하게 마련입니다. 본문 시인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선을 산에 둔 채 절망하거나 헛된 기대를 하는 대신, 더 근원적인 질문으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2. 근본을 향한 질의: 산을 바라보던 시선은 곧바로 자기 자신을 향한 깊은 질의로 이어집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1절 하반)이 질의는 단순한 의심이나 체념의 탄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헛된 우상과 유한한 세상의 힘이 결코 참된 도움이 될 수 없음을 깨달은 영혼이, 진정한 도움의 근본을 찾기 위해 부르짖는 간절한 외침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겸허히 인정하고, 절대적이며 신실한 존재에게 의지하려는 신앙의 첫걸음이 바로 이 정직한 질의에서 시작됩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이 질의를 회피하려 합니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거나, 질의의 끝에서 마주할지 모를 침묵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참된 도움의 근본을 향해 마음을 여는 이 질의야말로, 가장 위대한 응답을 향해 나아가는 문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삶의 문제 앞에서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라고 정직하게 질문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 질문을 회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질문을 던질 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어떤 기대와 두려움이 공존합니까? 이 간절한 영혼의 질의에, 시편 기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명확하고 확신에 찬 대답을 선포합니다.
3. 유일한 해답: 본문 시인의 고백은 극적인 전환을 이룹니다. 그의 시선은 더 이상 문제의 상징인 '산'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의 시선은 산을 포함한 '천지', 즉 온 우주를 지으신 창조주 여호와께로 향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더 강력한 대상을 찾는 것을 넘어, 문제와 해결의 차원을 완전히 바꾸는 신앙의 도약입니다. 도움이 피조물인 '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에서부터 온다는 이 고백이야말로 모든 두려움을 이기는 능력의 원천입니다.
왜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이 되신다는 사실이 궁극적인 위로가 될까요? 그분은 우리가 마주한 '산'을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크기와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시며, 그것을 옮기거나 길을 내실 힘을 가지신 유일한 분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그분의 능력과 지혜에 비하면 우리가 겪는 어떤 '산'도 다룰 수 없는 문제는 없습니다. 이 진리야말로 우리를 문제의 중압감에서 자유롭게 하여 참된 평안으로 인도하는 열쇠입니다.
이 위대한 신앙 고백을 오늘 우리들의 고백으로 만들어 보았으면 합니다. 1. 창조주를 신뢰하기: 당신은 당신의 '산'보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더 크심을 진정으로 믿고 있습니까? 그 믿음이 당신의 태도와 결정에 어떻게 영향을 미칩니까? 2. 구체적인 도움 구하기: 지금 하나님께 간구하고 싶은 도움은 무엇입니까?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구체적으로 기도해봅시다. 이 고백은 단지 지적인 동의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이 진리를 붙들고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결단으로 이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도움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4). 결론: 창조주 하나님께로 향한 시선으로 살아가기: 본문 시편의 묵상은 우리에게 명확한 삶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문제의 산들을 바라보며 절망하거나 헛된 도움을 구하는 대신, 그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는 삶이 되도록 합시다.
문제의 크기에 압도당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지으신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능력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순례의 여정 가운데 어떤 거대한 산을 마주하더라도, 우리의 도움이 어디서 오는지를 기억합시다. 우리의 도움은 저 거대한 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산을 만드신 창조주 여호와,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산을 바라보는 애련한 시선>은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명심합시다. 끝.
2026. 7. 15.
山下연구소: 양 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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