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구약설교마당

84. 평화의 기원

solomong 2026. 7. 4. 10:36

 

 

84. 평화의 기원

(시120: 1~7)

 

1). 서론: 우리는 평화를 원하지만, 세상은 오히려 갈등과 거짓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누군가는 온라인 악성 댓글 때문에 마음이 무너지고, 누군가는 가까운 사람의 거짓된 말로 인해 깊은 상처를 입습니다. 시편 120편은 바로 이런 현실 속에서 <나님께 부르짖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오늘 말씀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중 첫 번째 시편으로, 거짓과 미움 속에서 오직 하나님께 구원과 평화를 간구하는 탄원을 담고 있습니다.

 

2). 본론(Text): 시편 120~134편의 15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A song of Degrees)라는 표제가 붙은 것이며, 그 뜻은 ‘올라가는’것이므로 ”올라가는 노래“(A song of Ascents), 또는 ”계단의 노래“(A song Steps)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대체로 다윗의 작품이나 혹은 솔로몬, 혹은 귀환 때의 것으로 봅니다. 표제의 뜻은 3대 절기 때 성전에 올라가던 순례자의 노래로 봅니다. 혹은 성전 내의 부인의 뜰에서 남자의 뜰에 이르는 15계단을 오르면서 부른 노래란 설도 있습니다. 본편은 원래 ”이리 사이의 양“ 같은 시인의 구출을 기원하는 개인적인 시였으나 이것이 민족 전체에 적용된 것입니다.

 

3). 본론(Context): 시 120편에서 134편까지의 시들은 그 제목에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들로서, 실상은 “성전에 올라가면서 부른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물론 저자의 제목이 아니고 편자의 제목입니다. 이 15개의 시들이 한때 독립된 시집으로 전해진 것 같습니다. “올라간다”라는 원어는 “발자국같이” 반복한다는 뜻이라고도 하여 “어떤 말과 구절들을 반복하는 시들이라.”라고도 해석합니다.

 

또 어떤 해석에는 이 15개의 시는 성전 뜰 여자들의 자리에서 이스라엘의 자리까지 열다섯 발자국을 옮겨 놓았는데, 그때 한 편의 시를 한 발자국마다 옮길 때마다 부르는 것이라 하기도 합니다. (유대인 ‘미쉬나’ 책에서) 고대 해석에는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할 때 부른 노래”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122편과 134편에는 “성전”이란 말이 나오니 포로시대 이전 또는 이후 시대의 작품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대체로 순례자들이 각지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갈 때 부른 찬송이라 함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루살렘 축제와 관련된 시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주석 학자들이 본문 시 120편을 감사 시로 보지만, 사실은 “탄식 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본문 시인은 감사의 심정보다 괴로움을 더 노출 시키고 있습니다. 우선 “내가 환란 중에”(1절) 라고 함이 “원수들로 말미암은 고통”을 말하는 동사에서 온 명사입니다. (시 18:6, 66:14, 107:2 참고) 그리고 본문 시인의 고난은 원수들의 “거짓된 입술과 사악한 혀”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2절) 권력이 횡포 하는 시대에는 바른말을 하는 사람보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 출세가 빠르고 사악하게 수단을 부리고 아첨하는 입술을 가진 사람이 권좌(權座)에 직결되어 세도와 영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것은 모든 권력이 거짓과 속임수 없이는 그 자신의 지반을 굳힐 수도 그 권좌를 오래 계속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시인의 고통은 바로 허위, 사기, 아첨, 모략, 중상과 같은 혀의 재간을 부리는 사람 때문에 당하는 고통인 것 같습니다. 그 고통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에 머물지 아니하고 그 생명의 위험을 느끼는 상태임을 2절에 알려주고 있습니다. 본문 시인 그 사악한 혀의 장난으로 받는 피해와 상처가 너무 심하므로 무엇으로 그 거짓된 혀에 보복할 것인가를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시인은 현재 자기의 처한 환경 그것이 즐거운 그곳이 아니라, 화를 입게 된 곳임을 솔직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5절) 그 장소로 “메섹”과 “게달”을 언급했는데, 이 두 장소가 어떤 곳이며 시인은 왜 여기 왔느냐 말입니다. “메섹”은 주민 또는 어떤 나라를 지칭하는 것 같으나 성서에 나온 다른 예들(창 10:2 ; 대상 1:5 ; 겔 38:2)을 참고한다면, 이곳은 흑해(黑海) 근처에 있는 아나톨리아 동편에 있는 곳입니다.

 

메섹은 야벳의 아들로서 야만족들이 사는 곳에 살았습니다. “게달”은 이스라엘의 둘째 아들로서(창 25:13) 수리아- 아라비아 지역에 살고 있었던 아랍 족속의 선조 중 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두 지역은 서로 상거(相距)를 가진 곳이지만, 본문 시편 5절의 언급을 보면, “메섹에 유한다”와 “게달 인의 장막에 거주한다”라는 서로 평행이 되며, 따라서 같은 곳을 말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지명을 지역명으로 읽기보다, 상징적으로 읽어서 본문 시인이 이방 사람들 사이에 거하면서 예루살렘 축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한 일 때문에 그의 신앙을 이해하지 못한 주위 사람들이 본문 시인을 몹시 괴롭힌 것으로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본문 시인이 어떤 디아스포라의 지역에 거하면서 그와 함께 사는 이방인들로부터 핍박받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본문 시 마지막 절에 시인 자신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지만, 그의 주변 이방 사람들은 항상 적대시하고 전쟁상태로 몰아넣고 있음을 상상케 합니다.

 

본문 시의 중요성은 이 마지막 절에 있습니다. 본문 시인은 평화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지만, 저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더욱 대립하고 싸움을 걸고 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이웃에 평화를 애호하는 사람을 둔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항상 시비와 싸움을 거는 사람과는 살기가 힘이 듭니다. 이것은 개인만이 아니라 국가의 사정에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같이 사상적 이념적으로 분단 된 상태에서는 이 평화의 노력과 이에 반대하는 전쟁하려는 대립이 남북의 휴전선에서 과거 30여 년간 계속 존재하고 더욱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이 본문 시를 이해함에 도움을 줍니다. 남한은 평화를 원하지만, 북한은 전쟁을 원합니다. 이 모순과 대립의 30년 역사가 흘러간 한반도의 실정이기에, 우리 한국 사람이 이 본문 시편 120편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본문 시인의 말에 공감을 가집니다.

 

“나는 평화를 미워하는 자와 오래 살아왔다. 나는 평화를 말하지만, 저들은 전쟁을 말한다.” 이러한 대립 관계는 95편 시인에게서도 보았습니다. “나는 사랑하나, 저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한다........저희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는다”(시95:45) 이 120편의 모순 현상은 참 크리스천들이 악(惡)을 즐기는 사람들에게서 당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신자들은 그를 미워하는 사람과 더불어 평화를 갖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무서워할 줄 모르는 악인들은 우리가 평화를 사랑하는 그 일 때문에 더 심한 분노와 적개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성 프란시스의 기도와 찬송과 같이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싸움이 있는 곳에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하는 기도를 항상 드려야 합니다. 본문 시인의 “나는 평화를 말한다.” 의 원문을 “나는 평화이다.”(I am peace)라고 한 것은 아주 의미가 큽니다. 우리는 평화를 가지는 자이기에 전(前)에 평화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평화와 나를 동격으로 만들어야만 평화운동을 할 수 있고 평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아무리 적이 나와 더불어 싸우려 한 대도 나는 평화 그것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그 적군의 싸움에서 진다고 해도”내가 평화라“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게 해야 합니다.

 

* 이상과 같이 본문을 쉽게 풀이해 보았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볼 때>, 본문 시편인 120편에서 134편까지, 15편의 시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로, 그 첫 번째 노래인 오늘 본문 시편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멀리해야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멀리해야 한다는 말은 신앙인의 정결(淨潔)을 의미합니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란 중국어의 뜻은 ‘먹을 가까이하면 흑이 된다’라는 뜻으로, 죄를 가까이하면 죄악에 물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죄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 마땅하며, 하나님을 가까이하려면 먼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죄를 멀리한 후에 성전에 올라가는 것이 당연한 순서라는 것입니다. 본문 2절에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라고 본문 시인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한마디로 거짓을 멀리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거짓에 포위되어 살아가면서 우리도 거짓에 물들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거짓에 많이 물들어서 거짓을 좋아하고 거짓을 삶의 적극적인 도구로 이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거짓을 싫어하면서도 거짓을 행하는 연약한 모습도 보입니다.

 

혹자는 많은 사람의 생각에 나는 거짓을 해도 되지만, 나에게는 거짓을 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짓은 마귀에게 속한 것이고, 정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거짓을 멀리하고 정직의 가치관을 몸에 익히고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을 닮아가는 신앙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본문 시편 5절에 메섹과 게달의 장막에 머무는 것이 화라고 했습니다. 메섹과 게달의 장막에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화가 점점 커지게 됩니다. 그러니 그 자리는 빨리 일어나야 하고 멀리하는 것이 지혜로운 신앙자입니다. 시편 1편에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했지요. 그리스도인이 머물 자리가 아니라면 빨리 일어서야 하고 멀리하는 믿음의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본문 6~7절에 메섹이나 게달 같이 다투기를 좋아하므로, 화평을 미워하는 백성과 같이 오래 거하는 것이 큰 화근이 되는 것이고, 본문 시인이 화평하게 말하여도 악인들은 호전적인 자세였으니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주려고 오셨고, 우리 안에 서로 화평을 이루러 오셨으며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려고 오신 평강(平康)의 왕이시지요. 교회와 가정이 싸우려는 사람으로 가득 차는 것이 아니라, 화평케 하는 사람으로 채워질 때 화평케 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며, 평화(平和)로운 세상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4). 결론: 시편 120편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의 첫 관문인 이유는 영적 의미가 깊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예배의 자리, 즉 하나님이 계신 예루살렘 시온산으로 올라가기로 결단하는 시점은 '내가 사는 이 세상이 메섹과 게달 같이 거짓과 폭력으로 가득 차 있음을 깨달을 때'입니다.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세상이 주는 거짓 평화의 환상에서 깨어날 때 비로소 참된 평화(샬롬)를 향한 순례의 걸음이 시작됩니다. 이 시는 우리에게 세상의 언어(거짓, 모략, 다툼)를 버리고 하나님의 언어(진실, 평화, 기도)를 택하며, 거룩한 나그네의 삶을 기꺼이 감내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끝.

 

2026. 7. 4.

山下연구원: 양 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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