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내 발의 등불>(성경 중 가장 긴 章이기에,설교문도 깁니다.)
(시 119:1~176)
1). 서론: 우리 인생은 길 위의 여정입니다. 그 길에는 어둠도 있고, 돌부리도 있고, 예상치 못한 폭풍도 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단 하나의 등불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시편 119편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긴 章입니다. 시인은 인생의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며 살았습니다. 그에게 말씀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생명, 길, 위로, 방패, 빛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시편 119편을 통해, “말씀으로 사는 인생, 말씀으로 세워지는 신앙”의 은혜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2). 본론(Text): 시편 중 최장편이며, 성경 전체에서도 최장 장에 속합니다. 본문 시의 저자로는 1). 다윗(왕 위에 등극하기 전), 2). 에스라, 3). 마카비시대 인물 등이 추측되나 분명한 것은 잘 알 수 없습니다. 본문 시의 저자는 오랜 세월을 통해 율법 때문에 핍박을 받게 되고, 핍박 중에서도 율법을 고수한 인물로 보이므로 바벨론 포로기를 겪은 에스라가 저자로 가장 적격자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시에 나타나는 율법의 용어 8 語(또는 9 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율법: 좁게는 모세 5경을 가리키고, 넓게는 율법 전체를 가리키는 대표적 낱말입니다. (2). 말씀: 하나님의 하신 말씀, 또는 그것을 쓴 기록을 의미합니다. (3). 증거: 하나님의 계명을 증언하는 면에서 그의 성격과 뜻을 밝히는 것을 뜻합니다. (4) 도: 행위를 연결하는 선으로 표시되는 길입니다. (5): 법도: 사람의 행위를 지도하기 위해 주는 교훈입니다. (6): 율례: 하나님의 성문을, 법칙을 지칭합니다. (7): 계명: “법도”와 동의어이며, 더욱 넓은 뜻을 지닙니다.( 8): 판단: 재판, 재판의 판결 등을 말합니다. (9): 규례: “판단”과 같은 말입니다.
3). 본론(Context): 시 본문은 시편 중에서만 아니라, 성서 전체 중에서 특수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1). 그 내용은 율법(우리 Christian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음)을 찬양한 시이며, (2). 성서에서 가장 많은 절 수를 가졌으며(176절), (3). 본문 시의 문학적인 특색으로 히브리서가 잘 쓰고 있는 알파벳식 시의 형식을 취했는데, 히브리 자모 22자로 시작하는 8줄의 시가 연속되어 있으며, (4). 내용은 율법을 말하지만 “율법”을 8 내지, 9가지 다른 말-법, 증거, 도, 법도, 규례, 율례, 계명, 판단, 길, 그리고 약속, 말씀 등으로 표시하여 하나님 말씀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5). 본문 시 속에는 인간이 이 땅 위에서 경험할 수 있는 온갖 기쁘고, 즐겁고, 괴롭고, 수치스러운 희비애락(喜悲哀樂) 등의 경험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교훈하고 있는 삶의 철학(지혜)을 가르치는 내용이 있고, (6). 본문 시는 어느 특정한 시 형태에 속하지 아니하고 히브리 시의 모든 형태가 이 본문 시(한편) 속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형식과 내용이 복잡한 시이기 때문에, 본문 시는 과연 이스라엘 종교문학 중에서 특별한 존재로 찬란한 빛을 발하는 작품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과 그 말씀, 그 교훈, 그 은총, 그 섭리, 그 판단, 그 경고, 그 약속, 그 지시와 인생 안내의 말씀은 단순히 이스라엘 종교사회에서만 적용될 말씀들이라기보다는 전 인류 공동체, 어떤 시대, 어떤 민족에게도 다 같이 유익한 말씀이 되는 내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폰라트(von Rad)는 본문 시를 “지혜 문학적인 오색찬란한 잠언의 목걸이” 같다고 했고 키텔(Kittel)은 “교훈의 시” , 궁켈(Gunkel)은 “종합 시” , 또 다이슬러는 “명시 선집”이라는 말로 각각 그 다양한 성격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시가 가진 교훈의 내용은 너무 깊고 광범하기에 한두 마디 말로써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으나, 우리는 본문 시를 서두에 소개한 105절 말씀에서 명상할 수 있음이 우선 본문 시를 읽는 사람이 1차적으로 집중적 생각할 일이 라고 생각합니다. 이 105절 말씀은 여기 본문 시에 나타난 내용이 우리 인생이 걸어가는 길에 빛을 비추어 주는 “등불”의 역할을 한다고 본 것입니다. 캄캄한 길이나 어느 동굴을 지나는 사람의 손에 들려진 등불 한 개가 얼마나 크고 귀한 역할을 하는 것인지 이 등불을 어두운 밤에 사용해 본 사람이면 다 알 수 있습니다.
캄캄한 밤 길이나, 동굴을 갈 때면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은 작은 등불에 의하여 쉽게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등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의 율법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인생의 행로를 걸어가는 발의 등불이요, 그 길을 비추어 주는 빛이라 하겠습니다. 범위를 넓혀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이 세상의 어두운 길, 또한 처음 가는 길, 또는 위험한 길, 무엇이 한 발자국 앞에 놓여 있는지 알 수 없는 불안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 안전한 걸음을 걷고 정확하게 자기의 가는 길을 알고 갈 수 있도록 빛을 준다는 것은, 예수님이 “나는 세상의 빛이라.”함에서 우리 인생이 걸어가야 할 길과 가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 것을 가르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율법의 말씀들이 어떻게 인생을 안내하는가를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예를 본문 시편에서 살펴봄으로 알 수 있습니다. (1). 어떤 사람이 복 받은 사람인가에 대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진심으로 그 말씀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1절) (2). 무엇이 젊은이가 깨끗한 삶을 살게 하는 표준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가르치는 대로 삼가 행하는 것입니다. 청년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깨끗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9절) (3). 우리 인생이 항상 사모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그것은 주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20절)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피곤을 느낄 정도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123절) 하나님의 말씀에서 구원을 사모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174절)
(4). 우리 영혼이 “진토에 붙었다.” 할 정도로 인간이 심한 괴로움을 느낄 때도 내게 용기를 주어 소생케 하는 힘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온다고 했습니다. (25절) 내 영혼이 눌림을 당해도 주의 말씀이 나를 소생케 함을 느끼는 즐거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8절) (5). 우리 마음이 탐욕으로 향하지 아니하는 길은 다만 주의 말씀으로 우리 마음의 방향을 돌리는 것입니다. (30절) 하나님 말씀의 교훈을 듣고 이를 지키고 행하여 즐거워함에서 우리는 인간이 유혹하는 모든 탐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34~35) 하나님 말씀에만 눈을 돌리고 있는 사람은 헛된 것에 눈을 돌리지 아니합니다.
(6). 우리가 믿고 의지할 것이 무엇일까요? 세상 재물, 권력, 명예 등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42절) 우리가 하나님 말씀의 진실과 그 능력을 믿고 의지할 때, 우리를 해치는 사람들이 아무리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해도, 우리는 든든히 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리에서 떠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7). 자유가 어디서 올 것입니까? 역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이 말씀을 즐거워하여 지킬 때, 그 말씀이 주는 자유를 우리는 누릴 수 있습니다. 말씀대로 말하는 사람,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자유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비록 감옥 속에 있어도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고 사랑하고 즐거워하면, 그는 영혼의 자유를 호흡하는 사람입니다.
(8). 우리가 원치 않는 고난이 닥칠 때,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일까요? 남을 원망하고 세상을 비관할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소망을 주십니다. (49절)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고난 중에서 위로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50절) 고통을 당할 때 괴로우나, 하나님은 이 고통을 통하여 우리를 거룩하고 선하게 훈련하게 하십니다. 그러하기에 괴롬을 당하기 전에는 어느 것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 못했지만, 괴롬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올바른 판단을 합니다. 그러므로 괴롬을 당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릇 행하지 않게 합니다. (67절)
(9). 우리의 노래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사랑?, 청춘?, 명예?, 행운? 등등의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본문의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은 나그네로 살아가는 자기 자신의 노래가 된다고 했습니다. (54절) (10). 우리 인간이 자랑할 수 있는 소유가 무엇입니까? 본문의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것이 자기 자신의 소유가 된다고 했습니다. (56절) 우리는 가진 것과 못 가진 것을 물량적으로 계산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이 말씀을 지킨 것을 진실로 소유로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요(富饒)를 소유하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상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갈 길을 밝혀 주는 등불입니다. 상기 열 가지 외에도 더 많은 보화를 찾을 수 있습니다. 본문 시편은 교회에서 신도들이 함께 읽고 “영혼의 보화” 찾기를 말씀 속에서 시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읽는 사람에게 감명된 구절들은 곧 우리 영혼의 보화가 되는 것입니다.
* 이상과 같이 장문의 본문 시편을 좀 더 이해하기 쉽도록 해석했습니다. 이제 본문 말씀 중에서 설교의 제목이 되는 본문 105절은 <인생이란 도상(途上)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내 발의 등불”이란 제목으로 본문 시를 <오늘날 본문의 의미>로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내 발의 길을 밝히시는 말씀의 빛(시편 119:105)으로 말입니다. (이하 설교문은 타인이 쓴 것을 본인이 자구 수정 및 내용 분류를 해 보았습니다.)
A). 주의 말씀은 제 발의 등이요 제 길에 빛: 시편 기자의 이 고백은 한 줄의 시가 아니라, 어둠의 세계를 밝히는 하늘의 등불이며, 흔들리는 인생을 붙드는 언약의 손길입니다. 우리는 길 위에 서 있습니다. 누구나 걷고 있으나, 누구도 스스로 길의 끝을 다 알지 못합니다. 낮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마음의 깊은 곳은 종종 캄캄하고, 웃는 얼굴 아래서도 방향을 잃은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인가를 따라 삽니다. 더 나은 내일이라는 이름의 기대를 따라 살고, 다른 사람의 시선이라는 이름의 거울을 따라 살며, 내 마음의 소리라는 이름의 파도에 몸을 의지하고 흘러갑니다. 그러나 파도는 길이 아니고, 거울은 빛이 아니며, 기대는 등불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바람과 같아서 붙잡는 순간 미끄러지고, 의지하는 순간 변합니다. 그러므로 신자(信者)에게 가장 절실한 은혜는 “길을 바르게 걷는 힘”입니다. 그 힘은 결심에서 나오지 않고, 경험에서도 오지 않으며, 지식의 축적에서도 완성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빛, 곧 말씀의 빛에서 옵니다.
시편 119편은 말씀을 사랑하는 영혼의 긴 숨결입니다. 그 긴 시 속에서 105절은 마치 가장 깊은 밤에 켜지는 작은 등불처럼 선명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여기서 ‘등’은 멀리 비추는 탐조등이 아니라, 손에 들고 한 걸음 앞을 비추는 등불의 이미지가 더 가깝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한 번에 다 보여주시지 않는 은혜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요구합니다. “주님, 제 인생의 지도를 다 펼쳐 보여 주십시오. 어디로 가야 합니까. 몇 년 뒤는 어떻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많은 경우, 지도 대신 등불을 주십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지도만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 없이도 길을 갈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등불을 받으면 걸음마다 주님께 가까이 가야 합니다. 지도는 독립을 부추기고, 등불은 의존을 배우게 합니다. 하나님은 자녀를 독립된 신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붙들린 자녀로 빚으십니다. 그래서 말씀의 빛은 ‘내가 통제하는 미래’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현재’의 선물합니다.
B). 말씀 빛의 역할: 단지 정보의 밝음이 아니라, 생명의 방향을 결정하는 밝음입니다. 빛은 대상을 드러냅니다. 동시에 길을 구분합니다. 어둠 속에서는 낭떠러지와 평지가 비슷해 보이지만, 빛이 빛나면 위험이 드러나고, 안전한 길이 분명해 집니다. 말씀은 우리의 현실을 그렇게 드러내십니다. 우리 자신을 드러내고, 죄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드러냅니다. 그러니 말씀의 빛은 때로는 눈부십니다.
숨겨 놓았던 자기 의가 들통나고, 포장해 두었던 상처가 밝혀지며, 미루어 둔 회개의 자리로 우리를 끌고 갑니다. 그러나 그 눈부심은 우리를 수치로 몰아넣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빛입니다. 수술실의 강한 조명이 상처를 드러내는 이유는 정죄가 아니라 치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러합니다. 빛이 들어올 때 우리는 처음엔 불편하지만, 결국 살아납니다.
C). “내 발”과 “내 길" 이 라는 표현: 발은 인생의 가장 낮은 지점입니다. 화려한 생각이나 고상한 감정이 아니라, 땅을 디디는 실제 걸음입니다. 신앙이란 하늘만 바라보는 몽상이 아니라, 오늘의 땅을 어떻게 디디느냐의 문제입니다. 직장과 가정, 관계와 언어, 돈과 시간, 분노와 욕망, 외로움과 두려움 속에서 우리는 실제로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 위에만 빛을 비추시지 않고, 걸어가는 발밑의 길에도 빛을 두십니다.
거창한 계획만이 아니라, 사소해 보이는 선택 하나에도 말씀은 빛이 됩니다. 오늘 누구에게 어떤 말투로 말할지,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을 택할지, 마음에 남은 미움을 품을지 내려놓을지, 고통 가운데서도 예배의 자리를 지킬지, 이런 발의 문제 여하에 말씀이 등불이 됩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신앙을 공중에 매달아 두지 않으시고, 삶의 바닥에 내려 심으십니다.
D: 어두움을 밝히는 빛의 역활: 먼저 우리가 왜 어둠에 있는지 정직하게 보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어둠은 오직 무지의 상태가 아니라, 죄의 상태입니다. 사람은 정보가 부족해서 길을 잃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있기 때문에 길을 잃습니다. 지식이 많아도 탐욕에 끌려가고, 경험이 많아도 교만에 넘어지고, 성취가 커도 불안에 잠식됩니다. 죄는 눈을 흐리게 하고, 욕망은 방향을 비틀며, 두려움은 걸음을 망가뜨립니다.
그래서 인간이 스스로 자기 길의 빛이 되려고 할수록, 결국 더 깊은 어둠에 빠집니다. 자기 의의 등불은 바람에 꺼지고, 세상의 성공은 밤을 이기지 못하며, 감정의 불꽃은 잠깐 타올랐다가 재가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의 등불은 단지 ‘유익한 조언’이 아니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은혜의 수단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강조하는 바처럼, 하나님은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말씀으로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빛을 명하셨고, 빛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역사에서도 빛을 명하십니다. 복음은 “자기 노력으로 밝히는 등불”이 아니라 “하나님이 켜 주시는 빛”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말씀 앞에 설 때 가장 먼저 배워야 할 태도는 겸손입니다. 말씀은 우리가 다루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를 다루는 주권의 칼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재단하기 전에, 말씀이 우리를 재단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이용해 내 뜻을 강화하기 전에, 말씀이 내 뜻을 꺾어 그리스도께 굴복하게 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는 내 계획을 돕는 보조가 아니라, 내 존재를 새롭게 빚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말씀의 빛이 길을 밝힌다는 것은, 결국 그 빛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의 모든 빛은 한 분의 빛을 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십니다. 그분이 오심으로 어둠이 물러가고, 그분을 따르는 자는 생명의 빛을 얻습니다.
그러니 시편 119편의 말씀 사랑은 단지 율법주의적인 열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갈망의 길입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이유는 말씀 자체가 아름다워서이기도 하지만, 그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의 음성이 들리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단지 ‘성경이 말하는 대상’이 아니라, ‘성경을 열어 우리를 살리시는 역동적 주체’이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빛을 받는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빛 아래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 아래로 들어오면, 길이 단지 안전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길의 목적이 바뀝니다. 우리는 행복을 위해 걷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기 위해 걷는 사람들입니다. 이 빛은 우리에게 무엇을 비추어 줍니까. 먼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비춥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깊은 혼란은 ‘길을 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가볍게 여겨서’ 생깁니다. 하나님이 크고 두렵고도 달콤한 분이라는 사실이 마음에서 지워지면, 사람은 작은 것에 휘둘립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비춥니다. 거룩함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는 거룩한 무게입니다. 그 거룩 앞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동시에 배웁니다. 하나는 경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친구이시되, 결코 가벼운 동료가 아니십니다. 다른 하나는 위로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에, 그분의 약속은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사람의 사랑은 변해도 하나님의 언약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흔들려도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함의 빛은 우리를 떨게 하면서도 붙듭니다.
말씀은 또한 우리 자신을 비춥니다. 우리는 자주 자신을 오해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을 과소평가합니다. 과대평가하는 사람은 교만으로 무너지고, 과소평가하는 사람은 절망으로 주저앉습니다. 말씀의 빛은 두 극단을 동시에 깨뜨립니다. 말씀은 우리를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교만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동시에 말씀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값 주고 사신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절망도 설 자리가 없습니다. 죄인임을 아는 겸손과, 사랑받는 자임을 아는 담대함이 함께 서는 자리, 그 자리가 복음의 자리입니다. 말씀의 빛은 우리를 그 자리로 데려갑니다. 말씀은 또한 ‘길’을 비춥니다. 성도에게 길은 단지 직업의 경로, 재정의 경로, 관계의 경로가 아닙니다. 길은 순례의 길입니다. 하늘 본향을 향해 걷는 길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빛은 때로는 세상의 상식과 다른 방향을 보여줍니다.
E). 믿음의 본질: 세상은 더 많이 가지라고 하지만, 말씀은 만족을 가르칩니다. 세상은 복수하라고 하지만, 말씀은 용서를 명합니다. 세상은 자신을 드러내라고 하지만, 말씀은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고 합니다. 세상은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으라고 하지만,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최우선으로 세웁니다. 이때 성도의 마음에 질문이 생깁니다. “정말 이 길이 맞습니까. 이렇게 살면 손해 아닙니까.”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믿음의 본질을 배웁니다.
믿음은 상황이 밝아서 걷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빛이기에 걷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말씀을 더 확실한 것으로 붙들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면, 그 말씀이 우리의 현실보다 우리의 감정보다 더 견고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말씀은 “내 길을” 밝히십니다. 말씀은 우리 각자의 상황과 자리 속에서 구체적으로 역사합니다.
어떤 분에게는 병상의 어둠 속에서 한 구절이 등불이 됩니다. 어떤 분에게는 자녀 문제로 눈물 흘리는 밤에 한 약속이 길을 냅니다. 어떤 분에게는 죄책감에 눌려 숨을 못 쉬던 시간에 복음의 선언이 숨길을 엽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일반적인 교훈’으로만 주지 않으시고, ‘살아 있는 음성’으로 적용해 주십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조명하실 때, 글자는 단지 글자가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내적 증거이며, 은혜의 적용입니다.
개혁주의 전통이 말하듯, 성령은 말씀과 분리되어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말씀을 떠난 신비는 위험하고, 성령을 배제한 성경 읽기는 메마릅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밝혀 주실 때, 말씀은 빛이 되어 발에 닿고 길을 비춥니다. 그러나 우리는 솔직히 고백해야 합니다. 말씀의 빛이 늘 우리에게 환히 비추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말씀을 펴도 마음이 무겁고, 읽어도 무미건조하며, 들어도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때 사탄은 속삭입니다. “소용없다. 너는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를 잊었다.” 그러나 그 속삭임은 거짓입니다. 등불은 때로 작은 불꽃이지만, 작은 불꽃이 어둠을 이깁니다. 말씀의 능력은 우리의 감정의 온도 여하에 있지 않습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씨앗은 땅속에서 당장 보이지 않아도 자라고, 물은 바위틈에서도 길을 내며, 빛은 아주 작은 틈이라도 비집고 들어갑니다. 그러니 말씀 앞에서 중요한 것은 감각이 아니라 신실함입니다. 오늘도 등불을 들고 한 걸음 걷는 것, 그것이 믿음의 걸음입니다.
예화를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어느 마을에 산길이 하나 있었는데, 밤이 되면 길이 너무 어두워 사람들이 자주 넘어졌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불평했습니다. “왜 길에 불이 없느냐. 왜 이렇게 위험하냐.” 그래서 마을 회의 끝에 큰 등대를 세우자고 했습니다. 돈을 모아 언덕 위에 아주 밝은 조명을 달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의 넘어짐이 크게 줄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언덕 위의 빛은 멀리는 비췄지만, 발밑의 돌멩이와 뿌리, 작은 홈까지는 밝혀 주지 못했습니다.
그때 한 노인이 말했습니다. “길 전체를 한 번에 밝히려 하지 말고, 각자 손에 등불을 들고 걸어가세.” 사람들은 작은 등불을 들기 시작했고, 길은 달라졌습니다. 넘어짐이 줄고, 서로의 걸음을 보며 도우며, 빛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때로 ‘언덕 위의 거대한 조명’이 아니라, ‘손에 쥔 등불’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일의 모든 정보를 주지 않으시지만, 오늘 순종하게 하는 빛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빛을 들고 걷는 자에게, 길은 조금씩 분명해집니다. 이 등불은 작아 보이지만, 하나님의 진리로 타오르는 불꽃입니다.
말씀의 빛을 실제로 누리려면, 우리는 어떤 태도로 말씀을 대해야 합니까. 먼저 말씀을 ‘듣는 자리’와 ‘읽는 자리’를 생명처럼 지켜야 합니다. 빛이 방 안에 들어오려면 창문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말씀의 통로를 닫아 두고 “왜 어둡지요”라고 묻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예배의 말씀 선포는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큰 은혜의 통로입니다. 가정과 개인의 성경 읽기는 그 은혜를 일상으로 끌어오는 통로입니다. 우리는 기분이 내킬 때만 빛을 켜지 않습니다. 밤이 오면 켭니다. 영혼의 밤은 예고 없이 옵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말씀의 등불을 준비하는 사람만이 밤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말씀을 ‘내 생각을 증명하는 도구’로 삼지 말고, ‘하나님의 생각을 배우는 학교’로 받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미 결론을 정해 놓고 성경을 찾습니다. 그러면 말씀은 빛이 아니라 손전등이 되어, 내가 원하는 것만 비추는 도구로 전락합니다. 그러나 말씀의 빛은 우리가 원하는 것만 비추지 않습니다. 우리의 숨은 동기를 비추고, 우리의 고집을 비추며, 우리의 우상을 비춥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F). 복음-십자가의 피: “주님,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보다 먼저, “주님,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주님은 무엇을 사랑하시며 무엇을 미워하십니까. 주님은 이 말씀으로 제 마음을 어디로 이끌어 가십니까.”입니다.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조금씩 낮아지고, 조금씩 순종하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을 읽을 때, 반드시 복음의 중심으로 가야 합니다. 시편 119편의 ‘율례, 법도, 계명’은 우리를 그리스도 없이 스스로 의롭게 만들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법 앞에서 우리는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붙듭니다. 법은 우리의 병을 보여주고, 복음은 우리의 치료를 제공합니다. 법은 우리가 왜 길을 잃었는지 드러내고, 복음은 길 되신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빛을 누린다는 것은, 결국 매일 그리스도를 더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말씀 앞에서 꺾일 때, 그것은 패배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내가 오늘 말씀 앞에서 위로받을 때, 그것은 감상에 젖는 시간이 아니라, 십자가의 피가 내 영혼에 다시 발리는 시간입니다. 이 빛은 또한 공동체 안에서 더 밝아집니다. 등불을 든 한 사람이 길을 비추는 것과, 많은 사람의 등불이 함께 비추는 것은 다릅니다. 교회는 말씀의 빛이 모이는 자리입니다.
설교를 통해, 성도의 교제를 통해, 권면을 통해, 우리는 서로의 길을 돕습니다. 누군가가 낙심할 때, 다른 성도가 말씀으로 등을 대어 줍니다. 누군가가 유혹 앞에서 흔들릴 때, 다른 성도가 말씀으로 경계선을 그어 줍니다. 하나님은 개인주의적 신앙이 아니라, 몸 된 교회 안에서 자라게 하십니다. 그래서 말씀의 빛을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를 사랑하게 됩니다. 교회를 떠나면서도 “말씀은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리고 그 몸 안의 사랑으로 이끄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G). 다양하게 빛나는 하나님의 말씀: 이제 우리의 현실로 더 가까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성도들의 길은 어떤 어둠을 만납니까. 첫째로, 선택의 어둠을 만납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시대입니다. 정보는 넘치는데 지혜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지혜는 정보의 양이 아니라, 하나님 경외에서 시작합니다. 말씀이 빛이 되면, 우리는 선택의 기준이 바뀝니다. 무엇이 더 편한가가 아니라, 무엇이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를 묻게 됩니다. 무엇이 더 유리한가가 아니라, 무엇이 더 거룩한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 기준은 세상에서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십자가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미련하다고 하지만, 성도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임을 압니다. 그래서 성도는 손해처럼 보이는 순종을 택할 수 있습니다. 그 순종은 결국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시는 자리로 이어집니다. 둘째로, 고난의 어둠을 만납니다. 고난은 길을 가립니다. 고통이 크면 시야가 좁아집니다. 그러나 말씀은 고난 한복판에서 더 밝혀 줍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고난을 제거하는 주문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하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고난을 낭비하지 않으십니다. 말씀은 말합니다. “고난은 우연이 아니며,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섭리의 교리입니다. 섭리는 냉혹한 운명이 아니라, 아버지의 손길입니다. 우리는 때로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 섭리의 중심에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어두운 사건, 곧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가장 밝은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작은 십자가들도 헛되게 하지 않으십니다. 말씀의 빛은 고난의 의미를 완전하게 해명해 주지 않을 때도 있지만,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선하심을 붙들게 합니다. 그 붙듦이야말로 우리가 넘어지지 않게 하는 등불입니다. 셋째로, 죄책감과 유혹의 어둠을 만납니다. 우리는 넘어집니다. 때로는 같은 자리에서 또 넘어집니다. 그때 우리는 자신을 미워하거나, 아예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말씀의 빛은 두 길을 모두 막습니다. 자기혐오의 길도, 방종의 길도 막습니다.
그리고 회개의 길을 밝힙니다. 회개는 자기 스스로 때려눕히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가는 행위입니다. 돌아갈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길을 내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돌아올 길”입니다. 부활은 “다시 걸을 힘”입니다. 성도는 넘어졌을 때,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붙들어야 합니다. 말씀의 빛은 이렇게 속삭입니다. “너의 의는 네가 아니다. 네 의는 그리스도다. 그러니 일어나라. 다시 빛 가운데로 걸어오라.” 이 복음의 선언이 우리 발에 등불이 됩니다.
말씀의 빛이 우리 삶에 실제로 비치면, 어떤 열매가 맺힙니까. 마음에 평강(平康)이 생깁니다. 평강(平康)함은 문제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확신에서 오는 안정입니다. 또한 분별력이 자랍니다. 무엇을 사랑해야 하고,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 선명해집니다. 그리고 인내가 생깁니다. 길이 멀어도, 오늘 한 걸음을 걷는 힘이 생깁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이 자랍니다. 빛 가운데 거하면, 우리는 서로를 더 잘 보게 됩니다. 그리고 더 잘 품게 됩니다.
말씀은 우리를 진리로만 세우지 않고,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합니다. 진리 없는 사랑은 흐려지고, 사랑 없는 진리는 차가워집니다. 말씀은 둘을 함께 붙듭니다. 이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 앞에서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많은 확신의 감정이 아니라, 더 깊은 말씀의 빛입니다. 내 마음이 흔들릴 때도 흔들리지 않는 빛, 내 앞날이 어두울 때도 꺼지지 않는 빛, 내 죄가 나를 고소할 때도 나를 살리는 빛, 그 빛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4). 결론: 그 말씀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의 기도는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주님, 제 길을 바꾸기 전에 제 눈을 밝혀 주옵소서. 제 상황을 바꾸기 전에 제 마음을 말씀으로 비추어 주옵소서. 제 발이 빠르기 전에 제 걸음이 바르도록 말씀의 등불을 들게 하옵소서.” 혹시 지금 여러분의 길이 너무 어두워 한 발도 내딛기 어렵습니까? 말씀을 붙드십시오. 길이 전부 보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부를 요구하시지 않고, 오늘의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등불을 들고 오늘 한 걸음을 떼십시오.
그 걸음이 내일의 길을 부르고, 내일의 길이 또 다음 걸음을 부를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참으로 제 발에 등이었고, 제 길의 빛이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 고백의 끝에서 우리는 자신을 자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우리를 끝까지 비추신 주님의 신실함으로, 우리를 위해 어둠 속으로 들어오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오늘도 살고, 주님의 빛으로 오늘도 걷고, 주님의 은혜로 오늘도 승리하시는 우리가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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