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탄제” 詩 감상과 성탄절 메세지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가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젋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 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김종길(1926~ )시인은 경북 안동 출생이며,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한 영문학자이다. 경북대와 고려대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1955년 현대문학에 <성탄제>를 발표하여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그의 시제(詩題)는 일상생활 주변에서 얻어지는 열띤 감정이나 감상이 아니라, 주지적 및 문명 비판적 시풍을 이루고 있다.
경북 안동은 유가적(儒家的)인 문화전통이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 볼 수도 있고,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 이란 시어(詩語) 속에서도 엄부자모(嚴父慈母)로 대변하는 유교적 전통을 함축해 주고 있다. 어린 시절 병든 자신을 위해 눈 속을 헤쳐 산수유 열매를 따 오신 아버지를 회상하는 면에서 부모의 은덕을 효로 보답해야 한다는 효제(孝悌)의 원리를 떠오르게 한다.
그래서 이 시는 서른 살 중년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성탄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성탄절의 주체인 <하나님의 사랑>의 의미를 빌려오고 있다. 이 시의 구조는 유년시절의 경험과 어른이 된 화자(話者)의 체험,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그것은 시인이 ‘산수유 열매’와 ‘눈’을 대비시켜 시각적 이미지를 제시함으로써 어린 시절의 가장 인상적인 모습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고차원적인 시적 장치로 볼 수 있다. 또한 이 시의 표현에 있어 색체적인 시각은 ‘어두운 방’과 ‘바알간 숯불’, ‘흰 눈’과 ‘붉은 산수유 열매’를 대비시키고 있고, 시어(詩語)의 상징성은 열병에서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산수유 열매’와 ‘아버지 사랑의 행위’인 자식을 위해서는 어떠한 어려움도 감수하겠다는 부성애 이다.
그리고 흰 ‘눈’은 고난과 역경을 의미하며, ‘성탄제’는 그 고난과 고뇌를 어두운 밤 같은 현실 존재를 열매를 따와서 죽어가는 생명을 구원한(소생시킨 것) 차원에서는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래서 구세주의 탄생일인 성탄제를 연상시키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성의 혈연적인 사랑을 인류애의 보편적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 함축되어 있다.
붉은 산수유 열매에서 감동 되었던 그 사실이 부모와 자식 간의 끈끈한 애정으로 유지되는 되는 것으로 부각되고 있다. 또한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라는 의미의 상징, 현대 물질문명의 이기 속에서 따스한 인간애를 찾아 볼 수 없는 삭막한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어느 문인은 “사나이 30대에 자살 하고 싶은 충동을 못 느끼면 바보이고, 정말로 자살하면 천치바보이다.”라는 말을 어느 글귀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30대는 인생 아픔의 극치를 맛보는 시절이다.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직장생활에 충실해야 구조조정 대상에서 제외되고, 자기 나름대로 입지(立志)하여 피눈물 나는 노력이 요구되는 30대이다. 마치 닳아 없어지는 비누처럼 정렬이 소모되는 때이다. 노력여하에 따라서 40대에 그 열매를 딸 수 있느냐, 없느냐인데, 40대에 출세가도를 달리느냐, 아니면 인생 뒤안길에 낙후 되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인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맥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가.’의 상징성은 붉은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붉은 보혈과 그 피가 신앙적으로 지금도 내 혈맥 속에 흐르는가의 자문자답해 보는, 즉 아버지의 사랑의 영원성! 환언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신앙의 안목 하에서 맥맥이 흐르는가를 자가 진단을 해 보아야 할 기독자들의 반성의 대목이다.

메세지: 진정 성탄절은 피상적인 선물 교환, 축하인사, 네온사인 찬란한 쇼 윈도우, 교회마다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츄리 등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 시끌벅적한 파티나 상가를 메우는 인파 속에 몰입되는 기분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본래적인 한국적인 정서로 부자자효(夫慈子孝)의 윤리관의 탈선에 대한 재음미와 가족 간의 사랑, 이웃 특히 불우한 이웃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관계 및 하나님 사랑에 대한 감읍에 있는 것이다.
필자의 아버지는 일본 제국주의시대 서울 배제고보 3학년 때, 광주학생 사건에 연루되어 퇴학을 당하시고, 소백산 하 조그마한 마을에 낙향하시어 민족의 슬픔을 삼키면서, 한(恨)의 세월을 보내셨다. 늦여름 어느 날 오후, 어린 나는 낮잠을 자고나니 날이 어두워져 울고 있었다. 그 때 아버지께서 무슨 연고인지는 모르나 우는 나를 달래다가 화를 내시고 내 뺨을 한번 쥐어박고는 밖으로 나가시었다. 얼마 지난 뒤, 아버지는 붉은 사과를 가져다 주시면서 나를 부여잡고 한참 우시는 아버지를 지금도 생생하게 감촉(感觸)되는 것 같다.
김종길 시인의 부정(父情)은 구원적(救援的)인 것이라면, 필자의 아버지는 당신 자신이 살던 세상을 한탄하시면서, 자고 일어나서 어두워서 운것 뿐인데, 당신의 한이 우는 아들인 나에게 '새우 등 터지는 격'으로 전이(轉移)되었지만, 결국 필자의 어린 날의 부정(父情)은 붉은 사과와 아버지의 눈물로 이어진 속죄적(贖罪的)인 사랑이었다고 생각되어진다. 어려움을 구원해 주는 부성애나, 당신의 잘못을 뇌우치는 속죄하는 부성애도, 다만 그리울 뿐이다.
결론적으로, 성탄이란 인류를 사랑하사 하나님 자신의 독생자를 인간들에게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크나 큰 사랑이 가시적으로 구현되는 사건이 현실에 재현 되어야 한다. 2000여 년 전 로마제국의 변방, 유대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말씀이 육신이 된(로고스) 이 사건은 전 인류의 운명을 결정지운 위대한 하나님의 인류구원 드라마의 출발점이 된 것을 명심하고 감사해야 하겠다.
그리고 지금의 도시 상가, 대로변의 소란스러움과 교회의 케롤송 축하잔치 대신에, 무엇보다도 차디찬 북서풍이 불고 흰 눈이 내리는 어두운 밤 속에서 적막하고 흑암이 드리운 가냘프고 고독한 군상(群像)들에게 애정 어린 따스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헌혈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필을 놓는다. 끝.
'11. 박물관열람실(72)' 카테고리의 다른 글
| 68. [송년 성서 말씀 명상]: 순례의 여행길 (3) | 2025.12.27 |
|---|---|
| 67. [크리스마스 메시지]: 동심(童心)의 성탄절 (2) | 2025.12.24 |
| 65. [성서 말씀 명상]: 외로움과 홀로움 (1) | 2025.12.15 |
| 64. [성서 말씀 명상]: 자화상 다듬기 (3) | 2025.12.12 |
| 63. <성서 말씀 명상>: 역설의 복음 (2) | 2025.1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