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올해만 참으소서!
(본문: 눅 13:6~9, 마 21:18-21)
1). 서론: 유명한 영국의 사상가 카알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은 “보라! 지금 새날이 오고 있다.”라고 그의 역사관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할 때는 새해엔 좀 다른 세상과, 다른 삶으로 살아 보길 희망하고 기대합니다. 또한 역사의 전환기에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달라지는 '환경'을 바라고 기다립니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기다림엔 애틋하고, 설레기도 하며, 지루하기도 하면서, 초조하고 긴장되기도 합니다.
하여간, 지금 우리는 2022년의 마지막 달력 한 장을 남긴 묵은해의 시점에 당도하였으며, 2023년이란 새해를 맞이하는 送舊迎新의 경계선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 신자는 주변의 변화보다는 먼저 내가 '새사람'이 되어 주변을 변화시킬 수 있는 더 적극적 사고(思考)를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묵은해를 어떤 심정으로 마무리 여하에 따라서 신년(가까이 오는 새해)이 어떤 출발을 하느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지막 한 달을 청산과 정리를 잘하여 풍성한 열매 맺는 삶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2). 본문의 이해(Text): ①. 본문의 요지-눅 13장은 주로 ‘회개’를 재촉하는 교훈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또한 비유 형식을 취하여 교훈하고 있습니다, 마 21:18-21과 막 11:12-14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과 병행하지만, 내용은 전혀 다르며, 그 취지는 같습니다. 즉, 회개를 촉구하시고 하나님께서 인종하시는 것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②.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무화과는 심은 지 3년이 되면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필자는 지난 봄철 군위 시장에서 무화과나무 苗木을 사서 텃밭에 심었더니, 이번 여름에 3년이 아니라, 당장 세 송이 열매가 맺어서 따먹은 적이 있습니다. 비유 전체적으로 볼 때, 주인은 하나님, 과원은 이스라엘, 그리스도는 과원 지기, 3년은 이스라엘이 은혜받을 기간, 올해는 그리스도께서 인종하면서 열매 맺기를 고대하는 시한부(時限附)입니다.
③.“주인이여 금년 (올해)에도 그대로 두소서!”-이스라엘을 위한 그리스도의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소돔 성을 위한 아브라함의 간절한 기도(창 18:22-32)를 반영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기도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완고한 마음 밭에 은혜의 거름을 주시고, 그들의 멸망을 원치 않으시고 회개하기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벧후 3:9) 그러나 끝내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마 23:37) -2번 반복하여 예루살렘을 부른 것은 주님의 격정(激情) 정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는 긍휼히 여기시어 통곡하며 애정 어린 심정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 교권자들의 죄악이 예루살렘에서 감행되었기 때문입니다.
3). 본론(Context):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13장 6절~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새사람이 되는 선행 조건으로 '회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원 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3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올해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그냥 두고),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니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3년 동안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주인은 과원 지기에게 찍어 버리라고 하였으나, <올해만 참아 달라>는 과원 지기의 시한부 유예기간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 우니라"(마 3:10, 눅3:9)는 세례요한의 절박감을 예고한 말씀을 깊이 묵상해 봐야 할 것입니다. "금년만 참으소서!"와 "도끼가 뿌리에 놓였다.”라는 것은 한시적이요, 시한부 인생을 비유한 말씀입니다. 집행유예를 받은 인생을 말합니다.
그래서 ‘가까이 오는 금년’(2022=새해)이 내 인생살이가 열매를 반드시 결실해야만 내 인생의 앞날이 희망차게 전개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찍어 버리겠다는 주인의 결단적인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새겨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대로 살면 안 된다고 하는 자타(自他)가 인정할 만한 사람이 되어 새해부터 마음을 굳게 먹고, 새롭게 살기를 결심해 보자는 것입니다.
얼마 전 <건물 붕괴>와 <해상 파선 사고> 때, 구사일생으로 생환한 사람들은 이 시한부 인생과 유예 받은 인생살이를 절감했을 것입니다. 밝아오는 새해가 다 희망차고 행복하기를 빌고 있습니다만, 그것을 누가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는 심정으로 영육(靈肉)의 생명이 건강하게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 가는 2019년의 한 달도 못 되는 세월 속에서 저마다의 悔悟에 찬 반성과 새로움을 위한 결심을 해야 할 시점에 놓여있습니다. 이 시점이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岐路)에 선 時限으로 생각하고 한번 결단해 보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라고 하였습니다. 사울(바울의 회개 전의 이름)은 본래 유대 율법주의에 심취한 사람으로 살기가 등등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주의자들을 잡아 죽이겠다고 다메섹 도상을 줄달음치던 그때, 그리스도의 강렬한 빛 앞에서 그는 엎드러졌습니다. 사울은 그 자리, 그 시간이 새사람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참 만난 사람들은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산에는 산 도적이 있고, 시중(市中)에는 세리가 있다.”라고 당시 유대 격언이 있었다고 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관의 사람을 그리 좋게 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참 만난 세리장 삭개오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자기 집에 영접하고 한밤을 같이 지내면서 전반적인 자기 인생 문제를 털어놓았을 것이고, 이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이 있었을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삭개오는 그리스도를 참 만남(encounter) 사건의 주인공이었던 것입니다.
'만남'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피상적 만남(meet)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이고, 참 만남(encounter)은 내 계획의 일환을 송두리째 뒤엎고, 생의 깊은 곳에서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어느 청년이 대구에서 서울까지 기차여행을 하는데, 옆 좌석에 어느 아리따운 처녀가 앉아 있었다고 합시다. 서로 대화하던 중, 청년은 서울행을 포기하고 '대전'의 처녀 집에 가기 위해 도중에 下車를 했습니다. 대화를 서로 하는 중에 인생관, 종교관, 기타에 관한 생각이 접근하여, 결혼을 약속할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계획의 일환이 아닌 갑작스러운 진지한 '만남'이 새로운 사건을 유발한 것을 의미합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일본 동경에 미국의 폭격이 극심해 갑자기 길 가던 사람들이 방공호 속에 황급히 피신하게 되었는데, 마침 거기에 두 젊은 남녀가 응급해서 서로 부둥켜안고 살려 달라고 절규했습니다. 폭격이 끝나고 두 사람은 서로 부끄러웠으나, 생의 깊은 곳에 만나서 폭격에서 살아난 것을 감격하면서 서로 이야기하는 중에서 의미 있는 만남이기에 서로 인생의 반려자가 되기로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세리장 삭개오도 이런 그리스도와 '참 만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서 삭개오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새 사람에는 '지·정·의·지'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주님께 아뢰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4배나 갚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눅 19:8). 새 사람에는 그의 전 인격이 눈에 보이게 행동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라고 선언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그녀의 인생은 쾌락만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해 오던 자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참 만났습니다. 멀리서 십자가상에서 고통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눈물지었으며, 새벽 미명에 주님의 무덤을 찾아가는 새로운 삶으로서 그녀의 새로운 가치관을 추구한 모습이었습니다.
성 어거스틴이 14살에 사생아를 낳기까지 허랑방탕했습니다. 신앙도 이단 사설에 현혹되어 마니교(拜火敎)에 맹종했습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30년 가까이 자식을 위해서 기도를 했습니다. 인생 40이 되어 어느 날 마당에서 노는 어린아이들의 노래 가사에 긴 그의 인생의 고뇌에서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의 노래 가사는 바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처럼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롬 13:12).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바울은 개가를 불렀던 것입니다(갈 2:20).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경지를 새사람이라고 합니다. 새사람에는 이처럼 <고통스러운 탄생>이 필요합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옵니다. 한 생명의 탄생엔 반드시 아픔을 치러야만 됩니다. 새사람은 산부인과 병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지·정·의·지의 변화에서 오는 새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 새 사람의 탄생에는 생의 희망이 있습니다. 삶에 관한 진지함이 있습니다. 그만큼 새사람의 어깨는 무거운 사명과 책임이 있습니다. 내 종적(蹤迹) 여하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됩니다.
지금 강원도 지방엔 흰 눈이 와서 쌓여있다고 합니다. 아무도 걸어보지 않은 흰 눈길을 걸어간다고 생각해 봅시다. 내가 밟은 대로 발자국이 그대로 남을 것입니다. 예쁜 발자국, 험상궂은 발자국의 흔적을 남길 것입니다. 인생의 흔적도 그대로 하나님 앞에 가져갈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던지 그대로 되리라.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새해엔 새 사람의 흔적을 예쁘게 남기는 그런 우리가 되도록 합시다. 그 예쁜 흔적을 하나님 앞에 가져갑시다.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지덕을 겸비하고 무술이 뛰어난 젊은 장수였으나, 젊어서부터 술을 잘 먹고 기생집에 잘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색에 빠지면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꿈꿀 수 없기에, 그의 어머니가 김유신 장군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주색을 금하도록 간절히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김유신 장군은 어머니의 하신 말씀을 깊이 명심하고 그다음부터는 그 술집에 가지 않기로 결심을 단단히 하였습니다.
얼마 후 전쟁터에 나가서 승전하고 피곤한 몸을 말에 의탁하여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원래 영리한 말이라 으레 이럴 때면 집에 가지 아니하고 술집에 가려니 하고 늘 가던 기생집으로 갔습니다. 말이 기생집 앞에 와서 몸을 흔들면서 신호를 보냈습니다. 김유신이 눈을 떠보니 바로 기생집 앞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유신 장군은 결심이 굳은 사람이라 허리에 찼던 칼로 자기의 사랑하는 말의 목을 쳐서 떨어뜨리고 걸어서 집으로 갔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여 위대한 인물이 된 사람들은 모두 위대한 결심과 결단의 사람들이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새로운 반성과 결심을 하고서, 과수원에 열매를 맺게 하려면 잘라버릴 것은 잘라 버리고 또 두루 파고 거름을 주어야 하는 이 두 가지를 우리가 해야 합니다. 잘못된 생각을 잘라버려야 합니다. 잘못된 말을 잘라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신앙에 거름을 주어 열매 맺게 해야 하겠습니다.
4). 결론: "주여! 금년만 참아주소서! 마지막 남은 한 달을 悔悟에 찬 반성과 새로움을 다짐하면서, <다가오는 금년(새해)>은 그리스도인답게 살겠습니다.”라고 기도하면서, 집행유예 받은 인생살이라고 생각도 하면서, 도끼가 뿌리에 놓였다는 절박한 짧은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주께서 옳다고 인정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여 結實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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