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사랑의 강권
(본문: 고후5:13-14)
1. 서론: 오래 전에 筆者가 詩作 연습한 것을 적어 봅니다.<나를 사로잡은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습니다.”(고후 5:13~14)/“아련한 그 옛날 어느 해/당신과 처음 만났던 그때가 생각납니다./너무나 두렵고 떨리어 마루방에 뒹굴던/눈물로 뒤범벅된 첫 대면이었습니다./그제야 당신과 함께 좁은 길을 걸으며/때로는 원망으로 얼룩진 삶일지라도/당신의 사랑에 휘감겨 감읍하면서/내 삶을 바쳐도 다 갚을 수 없는 시간들입니다.
그동안 내 마음을 이렇게 빼앗은 분이 없었습니다./이처럼 행복하게 온 마음을 가득히 채우는 이가 없었습니다./때론 내가 바보가 되었는가 싶기도 하지만/언제부터인지 당신을 생각하는 일이 즐겁기만 합니다./문득 문득 당신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내 마음은 온통 당신으로 채워졌으면 합니다./이제도 파도처럼 물밀듯이 밀려오는/당신의 사랑이기에/내가 당신을 믿는 것보다/당신이 나를 믿어 주는 그런 머슴이 되고 싶습니다."
순진했던 젊은 날에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했던 기록입니다. 인생 석양 길에 들어선 지금의 마음에 이런 天眞爛漫한 고백이 그립기만 합니다. 하여, 바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사랑의 강권>을 묵상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바울은 生과 死의 두 벽(壁) 사이에 ‘끼여서’ 꼼짝 달싹도 못하는 정황일지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면 生死를 초월하겠다는 그의 생생한 신앙고백을 같이 묵상해 보기로 합시다.
2. 본론-Text: ①. 5:13- “미쳤어도"(ἐξέστησεν) -이것은 정신이 이상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온전한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도취된 상태(황홀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사랑에 흠뻑 빠져서 마치 미친 사람처럼 오직 예수 사랑의 복음만을 전하며 살았다는 고백입니다.
그 좋은 가문, 문벌 그리고 권세 저버리고, 그리스도에게 충성하여 가는 곳 마다 고난이요, 사경을 헤매는 전도자의 생을 보고, 고린도교회 내의 특히 유대주의자들이 조롱하며 바울을 ‘미쳤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회개한 후부터, 그리스도 예수님께 열광적인 태도에 총독 베스도도 미쳤다고 할만도 했습니다.(행26:24)
②. “정신이 온전하여도”-절제한 마음의 상태를 뜻합니다. 節制는 그리스 문화에서 4대 미덕(지혜, 정의, 용기, 절제) 중에 하나였습니다. 바울자신이 절제할 때는 고린도교회를 위하고, 그의 전도가 그들에게 거리낌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③.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강권하심’(συνέχει)이란 낱말의 뜻은 σύν(같이)과 ὔχω(가진다)의 합성어로써, “박두 한다”, “억압 한다”, “강요 한다”의 뜻이며, 制御, 驅使의 의미로도 해석되는데, 馬夫가 말을 자기 듯대로 몰고 가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고, 바다의 풍랑이 엄습해 오는 광경도 연상됩니다.
이처럼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박두해 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빌 1:23에도 이 낱말이 나오는데, 이 때의 <강권하심>이란 뜻은 삶과 죽음이란 두 벽 사이에 ‘끼여서’ 꼼짝 달싹도 못하는 모양을 표현하는 정황을 말하는 것으로, 바울의 다메섹 이후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고 부르짖은 생생한 신앙고백이라고 하겠습니다.
3. 본론-Context: 바울은 매우 드라마틱한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의 출생은 학문의 도시인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으며(행22:4), 가정배경은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의 베냐민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고,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었으며(빌3:5), 교육은 가말리엘 문하생의 긍지를 가졌으며(행22:3), 명예로는 로마시민권의 소유자이었습니다.(행22:25)
그래서 산헤드린 공회(로마 제국은 많은 占領地域을 쉽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점령지의 상황에 맞게 그곳에 지방 自治政府를 허용하였는데, 이러한 로마의 정책에 편승한 유대인들의 자치기관이 바로 “산헤드린 공회”이었음.)와 대제사장의 권력을 등에 업고(행9:1-2) 교회를 핍박했던 청년이었음에도, 다메섹 도상의 悔心을 통해서 ‘오직 예수께 잡힌바 된’(빌 3:12),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도로서 극적인 대반전의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런데 본문말씀의 흐름 속에는 고린도교회 내의 특히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을 향한 조롱과 비난이 쏟아져 미쳤다는 말까지 듣게 된 모양입니다. 일직이 바울이 그리스도께 열광적인 태도에 총독 베스도도 ‘미쳤다’고 했으니 말입니다.(행26:24)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흠뻑 빠진 표현으로,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고 고백했습니다.
<강권하심>(συνέχει, compels, controls)이란 의미는 σύν(같이)과 ὔχω(가진다)의 합성어로써, “박두 한다”, “억압 한다”, “강요 한다”는 낱말의 뜻이며, 制御, 驅使의 의미로도 해석되는데, 馬夫가 말을 자기 뜻대로 몰고 가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고, 바다의 풍랑이 엄습해 오는 광경도 연상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이 박두해 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빌 1:23에도 이 낱말이 나오는데, 이 때의 <강권하심>이란 뜻은 삶과 죽음이란 두 벽 사이에 ‘끼여서’ 꼼짝 달싹도 못하는 모양을 표현하는 정황을 말하는 것으로, 바울의 다메섹 이후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고 부르짖은 생생한 신앙고백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는 살아도 만일에 죽게 되어도 모두가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이란 것입니다.
진실로 그러합니다.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 때는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에게 돌로 맞아 사경에 헤매기도 하였고(행14:19), 제2차 전도여행 시는 빌립보에서 매 맞고 투옥되기도 했으며(행16:19-40), 3차 전도여행 시에는 에베소에서 아데미 우상숭배자들의 난동으로 죽을 뻔도 했습니다.(행19:23-41)
그리고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매를 맞고 고소를 당하여 여러 번 재판을 받고, 가이사랴에서 2년간 미결수로 감옥생활을 하고, 로마로 호송되다가 죽을 뻔도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 3년간 감옥생활을 했으나, 네로 황제의 재판으로 풀려났습니다. 이 외에도, 바울은 고린도후서11:24-38에 기록된 대로 27가지의 고난과 위협을 당했으나, 줄곧 복음을 전했습니다. 종내 그리스도를 위한 장렬한 순교의 피를 쏟았지만, 하는 말입니다.
바울의 이런 열정은 그리스도 사랑의 강권에 사로잡혀서 捕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사랑의 힘이 자신을 지배하여 이끌었다는 강한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거부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의 삶을 이끌어 왔다는 간증입니다. 아주 꼼짝 못하게 붙잡힌바 되어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복음을 전하며 살아왔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사랑의 강권>은 우리가 살아갈 原動力을 제공해 주는 것이 됩니다. 옛날 중국 전국시대 위나라에서는 전쟁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는데, 그 이유는 오기(吳起)라는 덕망이 많은 장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吳起 장군은 어느 날 한 병사가 다리에 난 종기가 곪아 잘 걷지 못하자, 손수 종기를 짜준 다음, 자기 입으로 누런 고름을 빨아 주었다고 합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병졸들은 吳起 장군의 사랑에 감동하여 죽도록 충성하여 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주님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죽기까지 사랑한 분이셨습니다. 또한 속죄의 대업을 완성키 위해서 무덤까지 내려가신 주님을 하나님의 영원한 승리와 소망의 징표로 다시금 부활의 생명을 부여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센트 헤래나 섬에서 프랑스 국민이 주는 독배를 마시면서, “나사렛 예수여! 그대는 영원한 승리자요, 나는 영원한 패배자이다.”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셔서 복음을 위해 살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힌 자들은 더 이상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야합니다. 이제부터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느끼며, 그 강권적인 사랑의 捕虜가 되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어저께 잠간 미국 아들 집에 다녀오기로 하고 갔던 제 친구가 제게 전화해 오기를, “요사이 한국교회의 문제를 일으키는 목사들에게는, 천국이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요.”라는 씁쓸한 푸념을 전해왔습니다. 문제를 야기한 명성교회와 그 외 목사들의 초미의 관심사는 세상 재물과 명예이지, 천국도, 주님 <사랑의 강권>의 영역도 마다하고, 스스로 탈출한 자들이란 뜻으로 제게 한탄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난 날의 그 功績은 다 살라먹고, 불신사회엔 악취의 연기만 자욱케 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국의 교회와 성도들이여! 주님의 종들이여! 우리들 정신 바짝 차려야 하겠습니다. 지금의 긴장되는 조국의 정치상황에 근신하며 합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급박히 변해가는 조국의 현실을 경성된 마음으로 勞心焦思 주님 <사랑의 강권> 하에 붙잡히기를 갈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심 할 수없는 國情이기에, 헛된 일에 사로잡힐 때가 아니잖습니까!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를 가슴과 삶속에서 되씹어야 할 때가 아닙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는 이 고백은 새로 탄생된 우리 삶의 주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고백하는 것에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주님 <사랑의 강권>의 사로잡힌 우리들은 위의 말씀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 모두 이렇게 살아가도록 노력 합시다!
4. 결론: 바울은 그 좋은 가문, 문벌, 명예 그리고 권세를 저버리고,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께 줄 항복을 하고 충성하기로 다짐하여 가는 곳 마다 고난이요, 사경을 헤매는 전도자의 波瀾萬丈한 대역전의 생애를 보내었습니다. 고린도교회 내의 특히 유대주의자들이 조롱하여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도취된 상태이었습니다.
바울의 이런 열정은 그리스도 사랑의 강권에 사로잡혀서 완전히捕虜가 되었기에 그러했습니다. 그 사랑의 힘은 바울을 지배하여 이끌었다는 강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거부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불가항력적으로 밀려오는 파도처럼 엄습해 왔기에, 삶의 原動力과 主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보답의 길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셔서 복음을 위해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힌 우리들이라면, 더 이상 자신을 위하여 살지 말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들도 다시금 태어나서 그 강권적인 사랑의 捕虜가 된 것을 感泣하면서,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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