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성서 말씀 명상>: 순간의 유혹
(마26: 38~43)
1). 서언: 저의 은사이셨던 靜流 이상근 목사님께서 "순교자로 일시에 죽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쉬울 수가 있다. 그러나 일평생을 주님을 위해서 순간순간 수많은 유혹을 물리치고, 신앙의 선택과 결단하면서 志操를 지키며 살기란 참으로 어럽다."라고 늘 말씀하신 것이 기억이 납니다. 인터넷 상에 어느 무명 시인이 쓴 <無言의 기다림>(고고한 가치관을 견지하겠다는 지조)이란 시가 퍽 마음에 들어서 아래 적어 봅니다.
절벽 사이에 한 그루 해당화
누구에게 꺽일세라 온몸에 가시로 드리우고
황홀한 향기로 외로운 나그네 발길을 멈추네.
실바람에 꺾일 것 같은 가냘픈 몸매
누구에게도 꺾기지 아니 하려고
가시로 도도함을 지키네.
만인의 사랑을 받기 위함인가
그 누구에게도 소유됨을 싫어함이었던가
날카로운 절벽사이에 홀로 핀 한 그루 해당화.
벗도 동반자도 없이 긴긴 세월에 휘어져 가는 허리
그러한 자신을 의식 하지 아니하고
언젠가 올 '님'을 맞기 위해 꽃봉오리 맺는구나!
오늘의 시대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의 지조를 지키면서 살기란 참으로 어려운 세대 속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중요한 문제는 그것이 한 순간, 한 찰라에 그 인격체의 결단 여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2). 본론: 이제 본문 성서말씀, 예수님의 경우를 명상해 봅시다."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39절) 예수님께 찾아든 순간적인 사탄의 유혹이었습니다. 안 죽게 할 수 없는지를 예수님의 인성적 차원에서 찾아든 유혹이었습니다. 일찌기 12살 때, 성전에서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2:49)라고 말씀도 하셨으며, 세례요한에게 의를 이루기 위해 세례를 베풀라고 할 정도로 겸허하셨습니다.
갖가지 병든 자와 불쌍한 인생군상들을 위해 희생적 헌신의 생애를 보내셨기도 했습니다. 누가 내형제 자매냐,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숙청하기도 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보시면서,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는 마음도 가지셨습니다. 온 동네가 예수님을 미쳤다고 할 정도로 하늘나라와 인간 구원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셨습니다. 주님 당신 자신을 파는 제자 '가롯 유다'를 끝끝내 회개시키기 위해 인내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모습에 비하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만하시거든 고난의 잔을 안 마실수 없겠습니까?>라는 주님의 인성적인 면이 우리 성정과 똑 같이 '좋은 길', '넓고 험하지 않은 길', '자기 자신에 이익이 된 것', '살고자 하는 욕구', 욕망이 순간에 나타난 주님의 인간 실존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이러한 순간의 유혹이 있었거늘, 우리들이야 오죽 하겠습니까?
예수 믿어서 세례도 받고, 중생한 체험도 있었으며, 신실한 평신도, 집사, 권사 ,장로가 되어 그 정열을 감당 할 수 없어, 신학교로 가서 목사의 소명을 받기도 하고, 희생적인 교회봉사, 사회봉사가 무수한 세월 속에 해 오기도 합니다. 이러했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상의 전국 교회, 교계가 빗어지는 이야기 꺼리는 수도 없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순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인간 본래의 저류하는 유익, 쾌감,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본문에 "시험(유혹, Temptation)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군 제대를 하고 26세에, 대구제일교회 전도사로 바쁜 시간을 보낼 때 였습니다. 이상근 목사님은 자주 병환으로, 서울 장로회 신학대학에 강의차 출타하시고 계시지 않을 때는 전도사인 제가 교인 심방, 새벽기도회, 삼일 기도회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중에 저의 부친께서는 일찍 돌아가시고, 한의사이신 할아버지 슬하에서 성장하게 되었고, 제 몫의 재산(전답)을 할아버지 명의하에 두시고, 제 앞으로 등기를 하지 않고 그냥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소문에 들려 오는 고향 소식은 삼촌이 조상 봉제사 드리는 명목으로(저는 어리고 기독교 전도사였기에) 옥답을 전부 가로채서 등기해 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삼촌이 교회사택에 찾아왔습니다. "유산은 전부 조상을 잘 모시라는 의미로 장자, 장손에게 물려지는데, 너는 예수를 믿어 제사를 지내지 않으니, 내가 제사를 드리기 때문에 유산을 빨리 등기하라고 정부 당국이 독촉하기에 내 이름으로 우선했다. 그래서 네가 예수 안 믿으면, 유산도 네 이름으로 등기할 것이며, 대학 등록금도 주겠다.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옆에 가족들은 살짝 와서 "예수 안 믿는다고, 말로만 하고, 재산 정리가 되면, 예수를 믿으면 되지 않겠느냐? 당분간 모든 것을 정리하고, 삼촌 말대로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유혹의 순간이었습니다. 삼촌은 빨리 답하라고 재촉을 하였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하면서 저의 사택 뒤 이상근 목사님 사택으로 가서 이 목사님께 상의를 했습니다. 이 목사님의 말씀이 "양 전도사, 아직 젊어서 그런데, 그 전답 나중에 목회 할 때도 대단히 유익할 것입니다. 조상들께 추도예배로 드린다고 하고, 그 재산 받으시오!" 라고 했습니다.
이 목사님 사택에서 저의 사택으로 몇분 안 걸리는 그 순간에, 요한복음 1장 20절에 세레 요한이 증언하기를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럼 엘리야냐, 아니라, 그럼 선지자냐, 아니라, 나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다."라는 말씀이 저의 뇌리에 스쳐갔습니다. 그래서 삼촌에게 "no" 했습니다. "나는 재산 때문에 예수 안 믿겠다고 "no" 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삼촌은 그 재산을 자식들의 등살에 다 팔아 없애고, 나중에 자살한 시신을 찾아서 계명대 교수 때, 제가 장례를 해 드렸습니다만, 그 no! 이후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어떻게 많이 내리는지 이루 형언할 수 없었고, 미국유학하고 교수 목사까지 되었던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순간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확신적인 결단을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요구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세례요한이 하나의 진실-<광야의 소리>를 긍정하기 위해서 수 많은 否定- "아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운 간단하지만 실제는 참 어럽습니다. 세례요한의 인기가 하늘에 닿을 정도로, 유대 사회에 야단이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동안 선지자가 없었다가, 광야에 나타난 세례요한 삶의 모습에, 군중들이 "오실 그리스도"다, 엘리야다,선지자다! 구구했습니다.
그때, 말 한마디만 살짝 돌려서 "내가 그리스도다 하기엔 너무하다면, 엘리야나, 선지자라."라고 하면 인기 절정에, 출세가도가 훤한데, <광야의 소리>로, 헤롯에게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것은 인륜적으로 잘못되었소!"라는 "아니요." 그 한마디에 요한의 목은 이슬로 살아졌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 문제가 무엇입니까! 순간의 유혹인 "예와 아니요"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서 일어나는 <스캔들>입니다.
예수님 한분을 긍정하기 위해, 수 많은 순간의 유혹을 부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참다운 신앙을 위해서는 수 많은 비신앙적인 요소를 일단은 부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진실을 위해서, 수 많은 유혹의 순간을 no! no!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순간의 유혹을 극복한 것은 본문에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순간의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순간의 유혹을 승리한 예수님의 방법은 <"내 뜻대로 마시옵고,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라는 것이었습니다. "내 뜻은, 내가 원하는 것은 쉬운 길입니다. 아바지의 뜻은 고난의 길입니다. 그 고난의 길을 택하셨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순간의 유혹>의 극복은 결국 聖化의 과정 속에서, 인생고를 통한 자기통제, 자기절제를 하는 것입니다. Self-Control은 이를테면, 내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삶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세 글자가 우리 신앙과 순간의 유혹에 승리케 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나'라는 말입니다.
Paul Tillich라는 신학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를 존재의 용기(Courage To Be)라고 했습니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를 無化(Nothingness, Nonexistence) 시키려는 유혹, 위기, 위험, 악의 엄습 등등의 것이 순건순간마다 도전해 온다는 것이고, 그래서 내 인간 존재의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존재 그 자체>(Being Itself), 우리 존재의 근원이시고, 하나님은 우리 삶의 <기초, 터전>(Ground Being)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관심을 갖고,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를 앙모해야 하고, 우리 삶의 그 분을 기초로, 터전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삶 속에는 수많은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先行되어야 한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이고, 순간의 유혹을 극복하고 참 신앙을 견지하는 삶의 태도이다." 라고 했습니다. P. Tillich는 이런 신학적 어려운 용어로 설명했지만, 간단히 말하면 예수님의 방법을 해석한 것에 불과합니다.
"아버지여! 할만 하시거든 이 고난의 잔을 마시지 않을 수 없습니까?"에서, '결국 그러나 나의 원대로, 내 의지대로,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예수님은 결단하셨습니다. 여기에 <그러나>가 신앙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실제생활에서 이 말을 자주 쓰는 사람은 참 신앙자 입니다.
여러분이 시장이나, 백화점에 가면 사고 싶고, 가지고 싶은 욕구가 순간 순간 일어납니다. 그것을 見物生心이라고 하지요! 재물을 보면 취하고 싶은 견물생심, 명예를 보면 견물생심, 권력을 보면 견물생심, 지식을 보면 견물생심, 그렇기에 믿음의 조상이라고하던 아브라함도 100세에 얻은 이삭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흐릿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심리학자들은 인간과 환경적 요인 가운데서 인간의 모든 행동과정에서 <이익과 손해>를 항상 계산하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만을 자유롭게 선택하는데, 이 상관관계는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이 각각 50%씩 작용한다고 했습니다. 가치관에 따라서 유전이 강할 수도, 환경요인으로 유전을 극복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S. Freud 정신분석학자는 인격체의 구조를 무의식 세계의 Id(잠재된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本能의 원리), 현실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Ego(自我-現實의 원리), 양심, 가치관, 신앙을 지배하는 Superego(超自我, 도덕의 원리)로 구분하여 인간의 정신 구조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범죄자는 Id의 욕구가 강해서이고, 자실자는 초자아가 자아를 압박하는데서 발생하고, 종종 한국교회는 초자아(Superego)가 Ego보다 약하여 발생하는 현실이라고 분석해 봅니다.
3).결론: <순간의 유혹>은 결국 聖化의 과정 속에서, 자기통제, 자기절제로 극복되는 것입니다. 절제(Self-Control)는 이를테면, 내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삶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대한 세글자가 우리 신앙과 순간의 유혹에 승리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러나>라는 말입니다. Paul Tillich가 말한 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존재의 용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한 것은 기독교 신앙이고, 순간의 유혹을 극복하는 비결인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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