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박물관열람실(72)

40. [설교 예화]:<관 속에서 나온 사나이>(‘나의 투병기’)/김정준 목사님

solomong 2025. 7. 4. 10:12

 

40. [설교 예화]:<관 속에서 나온 사나이>(‘나의 투병기’)/김정준 목사님

 

경건한 신학자였던 김정준 목사님은 1914년 11월 6일 경남 동래군 <구포>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기독교가정에서 성장하여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 때, 그간 고학으로 얻은 폐결핵에 걸렸습니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에 유학하여, 靑山학원 신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경동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그는 경주 불국사 역전의 구정교회 목사로 1942년에 청빙을 받아서 2년간 목회하였습니다. 1945년 8월 경북 김천의 황금동교회에 전임하여 목회에 열중하던 중, 이듬해 結核이 심하여 마산 국립요양원에 입원하여 진단결과가 <말기>증세로 3개월 밖에 살 수가 없다는 時限附 인생이 되었습니다.

한쪽 폐를 절단하고, 또 남은 것도 절반을 잘라내고, 마산 요양소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죽을 날만 가다리는 병동」문간에 누워 있었습니다. 문간 침대는 시체처리의 편의를 위해 다 죽어가는 사람에게만 주는 자리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산 결핵 요양원의 <죽음의 병동>이란 6병동에서 절망을 안고 時限附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6병동의 환자는 살아 퇴원하는 사람이 거의 없고 대부분 죽어 무덤으로 가기 때문에 붙이어진 이름입니다.

 

목사님은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렇게 일제강점기시대에 심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예수 믿는 일만은 포기하지 않았는데, 그리고 정말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했는데, 중병으로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떠나 젊은 30대 꽃다운 나이에 죽음을 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는 가지고 다니던 성경을 더 이상 읽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찬송도 부르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포기하려고 하였습니다.

하루는 병실로 나비가 날아 들어왔습니다. 나비는 나가지 못하고 창문에서 파드득거립니다. 그것을 바라보니 불쌍하고 자기의 신세 같아 붙잡아 밖으로 날려 보내려고 했지만, 나비는 잡히지 않으려고 파드득거리다가 오히려 날개가 더 傷處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모습을 보면서, 자기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나비가 들어 올 때는 열린 창을 통하여 병실 안으로 들어 왔지만, 나가려고 하면서 유리에 부딪쳐서 퍼덕거리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병으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고, 나비는 날개가 조금씩 찢어지면서 죽어가고 있는 것이 흡사하였습니다. 목사님은 나비를 살리기로 하였습니다. 자신은 희망이 없지만, 나비만이라도 밝은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나비는 어떤 위험이라도 닥친 듯이 아까보다 더 퍼덕거리면서 창 위로 날아올랐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는 동안 나비는 더욱 날개가 찢어졌습니다. 결국 나비는 더 이상 날아오를 수 없게 지쳤습니다. 목사님은 그제야 나비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창 밖에다 나비를 내 놓았더니,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목사님은 나비가 부러웠습니다. 자유롭게 밝은 세계로 날아가 자유를 만끽하는 나비처럼 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김 목사님은 자신도 지금 어리석은 나비처럼 하나님의 도움을 모르고 원망만하고 있다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목사님은 던졌던 성경과 찬송을 집어 들고, 悔改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찾아 왔습니다.

 

목사님은 그때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찬송을 부르면서 함께 있는 환자들을 위로하였습니다. 목사님을 찾는 사람들이 점점 늘었습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모여 찬송을 부르며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곳을 지나가던 의사가 들어와 찬송을 부르지 말라고 하면서 꾸지람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결핵환자들이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이는 수가 늘어 병실에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릴공간을 찾게 되었습니다. 병원장의 허락을 받고 예배를 드릴 예배당을 마련하여, 결핵 환자들에게 예배를 인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좌우에 결핵 환자로 가득합니다. 매일 아침 사람들이 죽어 나갑니다. 김 목사님도 終點을 향하여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나아가던, 어느 날 그는 절규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하셨습니까. 주의 일하겠다는데 왜 이렇게 하십니까.”

그 때 다음과 같은 주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네가 여기에 온 목적이 있다. 병에 걸렸기 때문에 온 것만 아니다. 사람들을 돌보라.” 김 목사님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決心을 하게 됩니다. 생명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실 분도 하나님이시니, 醫師가 내린 시한부인 3개월을 사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얼마가 되든지 하나님의 時限으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렇다! 이제 나의 남은 생애는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전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나의 인생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그래서 김 목사님은 그들을 돌보아 주기 시작합니다. 자기보다 더 힘든 환자의 수발을 도왔습니다. 음식을 먹여주고 대소변을 받아주고, 물수건으로 닦아주었습니다. 특히 하루 세 번씩 성경을 읽어주고,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며 천국을 가르쳤고 때로는 임종예배를 드렸습니다. 醫師들은 목사님에게 단 하루라도 더 살려면 힘을 아끼라 충고했지만,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 생각하고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폐병 아닌 사람은 이런 폐병의 사람들을 돌볼 수 없습니다. 간호사들이 있긴 해도 이들과 함께 할 수는 없습니다. ‘나를 폐병에 걸리게 하여 폐병 걸린 사람들을 돌보게 하셨구나.’ 그는 이들을 돌보면서 기도하는 중에 「목숨이 붙어 있는, 남은 시간 동안 성경을 읽다가 가리라」는 각오로, 신구약 성경을 通讀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시편 1편에서 150편까지 전부 탐독하여 전부 암송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으면 죽으리라 그러기를 3년간 하였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병이 점점 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6병동에서, 5병동으로 4병동으로, 3병동으로, 2병동으로, 종내 1병동으로 昇級하여 退院하게 되었습니다. 퇴원하여 ‘관속에서 나온 사나이’로 자처하며, 남은 폐 1/4만 가지고 30 여 년간 여생을 살았습니다.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대학교에서 시편 연구로 신학박사, 연세대학교 교수, 한국 신학대학교 학장 등으로 봉직하시다가, 67세로 천국으로 옮겨 가셨습니다.

*퇴원 후의 餘談으로, ‘어떻게 그렇게 기적적으로 살아나셨느냐’ 질문하면, ‘약 중의 약을 다 먹었으니 병이 안 낫겠느냐’고 답하셨고, ‘그 약이 무슨 약이냐’하면, <신약과 구약이야!>라고 대답하며 껄껄 웃으시면서, “重病에 고생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신약과 구약>으로 주님께 치료 받으시라!” 라고 설교하셨답니다. <죽어도 산다는 믿음>이었습니다.

 

2019. 4. 22. 山下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