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박물관열람실(72)

39. 윤치호의 꿈과 "샤론의 꽃"

solomong 2025. 6. 28. 10:24

39. 윤치호의 꿈과 "샤론의 꽃"

충남 아산출생으로 구한말 정치가요 계몽운동가 윤치호(1865~1945)는 1881년 신사유람단을 수행하여 일본에서 2년간 체류하였습니다. 이때 그는 한민족 최초로 영어를 배웠습니다. 귀국 후 초대 주한 미국 공사 푸트의 통역으로 일했으며 부친이 갑신정변에 연루되자 중국 상해로 피신하였습니다. 유치호는 그곳의 선교 학교인 중서서원에서 수학하였고 성경을 읽고 회심하여 기독교로 개종하였습니다.

1888년 그는 미국 유학길에 올라 벤더빌트 대학과 에모리 대학(Emory University)에서 공부하였습니다. 5년간의 수학 끝에 마침내 에모리 대학을 졸업하여 윤치호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 대학의 졸업자가 되었습니다.놀랍게도 그는 미국에서 저축한 거금 200불을 한국 선교를 위해 메모리 대학의 총장 위렌 캔들러(Warren Candler) 박사에게 기부 전달하였습니다.

당시 위렌 총장은 코카콜라 회사의 설립자인 아사 캔들러 회장의 동생이었습니다. 이 가문도 한국선교에 재정적으로 기여하였습니다. 유학 기간 동안 윤치호는 민주주의와 과학 기술의 중요성에 대해 깨달았고 미몽의 조선 사회를 깨우는데 있어 교육과 선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함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귀국 후에는 서재필, 이상재와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국민 계몽 운동에 힘썼습니다.

서른에 관직에 올라 천안의 군수로 근무한 후 외부협판까지 관직에 올랐습니다. 또 사회 개화를 위해 신분 철패, 참정권 보장 등을 주장하였고 현대식 교육을 위해 안창호의 평양 대성학교의 교장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윤치호 본인이 직접 송도고등학교의 전신인 한영서원을 설립하여 가르쳤습니다. 특히그는 미국의 유명한 농학자 조지 워싱턴 카버 박사에게 영향 받아 실업교육을 강조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윤치호는 정동제일교회 장로로 또 세계 주일 학교 한국 지회장으로 봉사하였습니다. 그는 미국 선교사들에게 다방면으로 협력했으나 종종 민족주의적인 사고로써 그들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이 왜 마음을 열지 않느냐고 불평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선교사 자신들이 먼저 자택 거실에서 한국인을 대접 않는 태도부터 버려야 할 것이다."(윤치호 일기 1897년 6월 31일)라고 했습니다.

윤치호는 일본과 러시아, 그리고 모국 조선도 거침없이 질타하였습니다. 그는 "저주 받을 일본 놈들"이라고 일기에 썼고 "거만하고 무식한 러시아"라고 평하였습니다. 또 조선 민족도 자립 의식이 결핍되었다고 비판하였습니다. 구한말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윤치호는 결국 현실주의자의 길을 택해 친일로 비판받기도 하나 사실 아래와 같이 다면적인 관점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땅을 팔아 독립운동에 자금을 대주는 것보다 일본인 손에 땅이 넘어가지않도록 지키는 것이 애국이다."라고 했습니다. 윤치호는 천대받던 장님 점쟁이 백사겸을 구도의 길로 이끌며 신분을 뛰어넘는 신앙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또 1907년 나라 사랑의 노래, 즉 '애국가'를 작사하여 '무궁화'(Rose of Sharon), 즉 신앙적인 "샤론의 꽃"이 삼천리에 피기를 소망하였습니다.

한일합병 이후 윤치호는 데라우치 총독 실해 모의 사건으로 4년간 무고한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분명 그가 추구했던 새로운 교육,새로운 정부, 새로운 신앙의 꿈은 당시 시대상에서는 선구적인 것이었습니다. (김동주 저, "기독교로 보는 세계역사" 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