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아버지 보고 싶으면 나는 우짜라 카노!"/ 망내 딸 美敬 이야기
1974년 그렇게 꿈꾸어 오던 도미 유학의 길! 현실화 되는 날이었다. 그간 유학 수속의 고된 세월도, 사랑하는 나의 가족-고생을 감수하면서 내조해 온 사랑하는 아내, 귀여운 내 새끼들-맏딸 愛敬(12살), 아들 聖民(9살), 막내 딸 美敬(5살) 이렇게 글썽이는 눈물을 서로 마주 보면서 잠시간 이별의 김포 공항의 그날은 야속하기만 하였다.
뒤 돌아 보면 더 눈물이 앞을 가려서 눈물을 머금고, 그냥 비행기 트랩(Trap)을 다 올라가서, 환송 전망대(옛날엔 비행기 나르는 것까지 볼 수 있는 환송 전망대가 있었다.)쪽을 향하여, 사랑하는 내 가족들에게 손을 흔들고 비행기 안으로 나는 매정하게 들어가고 말았다. 미국 서부 San francisco 항만 도시 유명한 '버클리대학교' 인근에 동산 위 정말 좋게 자리 잡은 태평양 신학교(Pacific School of Religion) 기숙사 Benton Hall 2층에 무사히 나는 안착하였다.
제일 먼저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고, 정신없이 입학 수속을 마친 어느 날 나는 아내로부터 반가운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 속엔 구구한 사연이 많지만, 내 가슴을 파고드는 한 구절-"아버지 보고 싶으면 나는 우짜라 카노!"(대구 사투리)라는 우리 집 야지랑 단지 막내 딸 美敬(5살)이가 공항 전망대에서 내가 탄 비행기를 보다가, 비행기가 시야에서 사라져 구름 속으로 없어지니, 언니, 오빠도 울지만, 막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두 다리를 펴고, 떼를 쓰는 투정 자세로 "아버지 보고 싶으면 나는 우짜라 카노!"하면서 울더란 것이다.
나는 이 편지를 받고서 눈물을 글썽이면서, 읽고 또 읽고, 그날 밤은 아내와 자식들 생각에 밤잠을 설치었다. 신혼 때,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맏딸을 낳아서 딸의 재롱부리는 재미에 세월 가는 줄 몰랐다. 한참 말을 배울 때, "이건은, 저건은"('이것은 이름이 무엇인가, 저것은 무엇인가'라는 뜻) 하면서 엄마에게 물어 올 때, 귀찮을 정도였다고 한다. 한번은 날계란을 들고 깨어서 먹고자 하는 것을 아내가 "생거다"라고 하였였다.
그 후로는 계란만 보면 '생거' 달라고 떼를 썼다고 한다. 이를테면 계란의 이름이 '생거'라는 것이다. 지금도 맏딸을 보면, '생거'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둘째 아들 놈은 장로회 신학대학의 졸업반 때인 1965년 11월 22일(미국 케네디 대통령이 ‘달라스’에서 저격당하던 날) 새벽에 아내로부터 '아들'을 낳았다고 기쁜 소식의 전화를 받았다.
나는 그렇게 미 국민의 숭앙의 대상이었던 케네디 대통령이 죽는 날에, 하나님은 아들을 주신 이유를 두고두고 내 마음 속에만 담고 있었다. 이놈이 정말 잘 생기고 너무나 귀여웠다. 대구제일교회 전도사로 사택에 살고 있었기에 사택 내 교역자는 물론이고, 맏딸 애경이가 동생을 유모차에 태워서 교회당 뜰 내를 끌고 다닐 때, 교인들마다 "그 놈 잘 생겼다."고 다 한마디 할 정도였다. 그래서 당시 담임목사였던 이상근 목사님께서 이름을 '聖民'이라고 지어 주셨다.
이놈은 '제일유치원'(제일교회 소속)에 다니면서, 유치원 노래 중, '유치원'이란 발음(發音)을 '은치원'이라고 하면서 노래를 불렀고, 초등학교 입학하고서, 길거리에서 동무들과 놀다가, 내가 귀가하는 길거리에서 만나면, 친구들에게 "우리 아버지 얼마나 좋다고~!" 고개를 저으면서 친구들 앞에서 흥이 나서 우쭐거리었다. 그리고는 집에 와서 엄마에게는 '밥 달라고' 하는 말을 줄여서 "밥는"('밥은', 이라고 발음해야 하는데)이라고 말을 했다.
지금도 나는 이놈 어릴 때를 생각하면서, 아내에게 아침밥을 달라고 하는 말을 "밥는"이라고 말하면, 아내는 웃으면서 아침 식사를 차린다. 막내 딸 이야기 중에, 위의 맏딸, 아들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들이 자라날 때는 내가 젊을 때였기에, 가정 형편과 더불어 고생하면서 성장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고, 그러나 이놈들 키우는 재미로 고생을 고생인줄 모르고서 우리 내외는 살았다는 것을 말함이다.
허나, 막내 딸 美敬이가 자랄 때는 담임목사, 신학교 교수, 대학 교수 생활을 할 때 이었기에 비교적 여유가 있을 때로 이놈은 언니, 오빠보다 호강하면서 성장했다. 초등학교도 사립학교인 대구 ‘영신'학교에 다녔으며,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피아노 개인 교습을 받으면서 고 2학년 때까지 근 10여년을 배워서 거의 전문가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 부모는 대학의 전공과목을 피아노 기악과에 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어릴 때부터 자기 주관이 분명했다.
과묵한 편이였고, 한번 자기 뜻을 말하면 유창하게 늘어놓는 편이었다. 어릴 때, 피아노 교습 선생님의 말로는, "美敬이 속에는 '영감' 들어앉았다."고 할 정도였다. 그래서 우리 내외가 막내 고3 때, 피아노를 전공하라고 하니까, "평생 피아노 앞에서 따분하게 박자만 세는 그런 인생을 어찌 살라고 합니까."하면서 결국 불문과(佛文科)에 입학을 했다.
이놈에게 용돈을 주면, 군것질은 초콜릿 '스니커즈'와 맛있는 과자 '버터 와플'만 사먹었고, 그것도 집에 가지고 와서, 언니, 오빠와 나누어 먹지 않고, '저 혼자' 몰래 야금야금 먹곤 했다. 이를테면 막내의 보편성인 부모의 과잉보호와 사랑 때문에,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가 강했다. 그래서 항상 언니 오빠와 우애(友愛)있게 살라고 했고, 지금도 언니가 목사 부인인고로 언니를 좀 생각하고 도우라고, 우리 내외는 자주 말하곤 한다.
그리고 막내는 우리 집 3남매 중, 가장 공부를 잘했다. 하기야 큰 딸은 예민해서 첼로 레슨을 받으면서 사범대학에서 첼로(Cello)를 전공했고, 아들놈은 정의감이 강해서 사회학을 전공했다. 막내는 대학 불문학과에서 늘 톱(Top)을 하기에, 졸업 후, 프랑스 파리의 '에스모드'(Esmod) 패션디자인 학교에 3년간 유학을 시켰던 것이다. 아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장남 아들인데 하면서 불만...) 결혼 후에 일본 동경에 며느리와 가겠다는 것을 가는 여비 주선 밖에 못해 주었고('계명대 사태'로 어려웠던 때이었음.),동경서 고학으로 공부했다.
지금도 우리 내외는 가슴이 저리어 온다. 막내딸은 그래서인지 지금 외손녀 '서린'이 외동딸을 끔찍이 생각하면서 키우는 것 같다. 외손녀 초등학교 때는 남편을 두고서 뉴질랜드까지 따라가서 영어공부 시킬 정도로 극성스러웠던 것은 어찌 그의 탓 만이리오! 우리 내외가 그를 그렇게 키웠으니, 그도 그의 딸을 그렇게 키운다고 생각해 본다.
지금은 "아버지 보고 싶으면 나는 우짜라 카노!"가 내리 사랑으로 자기 딸 사랑에 여념이 없는 것 같다. 우리가 그렇게 본을 보였으니, 그도 당연한 것이리라. 아마 "아버지 보고 싶으면 나는 우짜라 카노! " 이 말을 처음 했던 그 때처럼, 내가 직접 듣지 못하는, 그 어느 날 내 죽음 앞에서 또 한 번 "아버지 보고 싶으면 나는 우짜라 카노!" 라고 하면서 대성통곡 할 것이다.( 오늘은( 2023. 4. 25 )우리 결혼 62주년 기념일이기에 막내딸 이야기를 올려 봅니다-1961.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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