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신학이론마당(75)

55. 소명의 4단계(출 3:1-12)

solomong 2025. 6. 26. 11:38
 

55. ​소명의 4단계(출 3:1-12)

 

1. 서론: 구약성서를 보면, 무대는 언제나 역사의 한복판이었습니다. 구약은 구체적으로는 이스라엘 역사가 바로 하나님의 활동의 場所이었습니다. 거기엔 聖. 俗의 구별은 물론, 靈. 肉이란 구별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윤리나 도덕 또는 신앙이라는 특정한 범주만이 하나님의 영역이 아니라, 전쟁, 승리, 패배의 場도,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일하시는 現場이었습니다. 구약성서에서는 어떤 사건에, 언제나 중심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登用되고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은 4가지 단계를 밟아 나갔습니다. 1). 血氣的인 義憤에서 궐기했다가 철저한 체념에 빠집니다. 2). 그러한 그들이 神秘한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 3). 그러한 경험 다음에 ‘거룩한 것’을 경험합니다. 4). 그러한 경지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명령을 받습니다. 이런 단계를 ①. 체념-②. 신비한 경험(신앙적 경험) -③. 하나님의 至聖所에 서게 됩니다. -④. 召命을 받습니다.

2. 본론: 제1단계:먼저 모세의 경우를 봅시다. 모세는 애급에서 혹사를 당하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사랑의 義憤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혹사시키는 애급 軍을 그대로 보아 넘길 수 없어서 혈기로써 그를 죽입니다. 그것이 폭로되어 그는 도망쳐서 미디안에 이르러, 아내를 얻고 자식을 두고, 양이나 치는 체념의 생활에 정좌했습니다. 엘리야의 경우를 봅시다. 엘리야는 異邦神인 바알종교의 팽창에 분노하여 마침내 바알 종교의 司祭 450명과 싸워 이기고, 혈기로 그들을 모두 한칼에 죽여 버립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이세벨’이란 異邦에서 온 女王이 그 앙갚음을 선언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超人 같은 그의 氣槪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고양이를 본 쥐처럼 광야로 한 없이 도망치다가 ‘로뎀나무’ 아래 쓰러진 채, 기진하여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신약에서도 이와 비슷한 예를 볼 수 있습니다. 바울과 베드로 경우입니다. 바울은 자기 나름의 義憤에서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일선에 나셨습니다.

베드로는 막8장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게 되리라는 선언을 듣게 됩니다. 베드로는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결사반대하다가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라는 단호한 책망을 듣습니다. 여기에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이것은 하나의 血氣的 義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모세, 엘리야, 바울, 베드로 등은 공통적으로 ‘혈기로 의분’을 표출했습니다. 성서는 이것을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말씀하나,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소명을 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하감하실 때,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 수 있지! 義를 추구하니, 잘 갈고 닦으면 나의 그릇이 되겠구나!”, “물에 물탄 것처럼, 불의를 보고도 못 본척하는 구나!”, ‘행동하는 양심이 못되면, 불의 편에 있는 법이야!’하는 마음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도 “너희들은 팔팔하구나! 조금 연마하면, 쓸모 있는 나의 道具가 되겠구나!”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제2단계:모세는 어느 날 호렙산 가까이에서 양 떼를 먹이다가 신비한 경험을 합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기에 가까이 가 보았더니, 불은 붙어도 나무는 타지 않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종교적 신비한 경험입니다. 엘리야는 크고 강한 바람이 山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광경과 지진이 지축을 흔드는 것 같은 신비한 경험을 합니다. 바울은 그가 다메섹으로 향하는 도증에, ‘갑자기 하늘에서 환한 빛이 그에게 두루 비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신비한 경험입니다.

베드로는 변화산상에서 예수님의 변모, 엘리야, 모세의 출현 등은 신비한 경험을 했습니다. 이와 같은 기적의 경험은, 오늘날도 우리 신앙생활, 삶 전체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 온 것을 합리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들도 있겠으나, 기적으로 믿는 신자들도 많습니다. 그 많은 전쟁과 위기 때의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긴 것은 우연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거기엔 필연적인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자들 중에는 특수한 신비한 경험을 하는 이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잘못하면, 이러한 신비한 경험이 잘못에로 이끌려 갈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 ‘초자연적’ 경험을 한자가 그것을 마치 자기 소유가 된 것으로 착각하는 그 例입니다. 가령 어떤 신자가 산중 기도원에 들어가서 나무뿌리를 뽑는 심정으로 열심히 기도하고, 집회에 참석하여 어떤 특수한 경험을 하고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신비한 경험을 받은바 은혜대로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입신한 무당처럼, 자신이 어떤 신통력을 지녔다고 믿고, 그것을 거룩한 이름을 빌려서, 헌금 명목으로, 금전 거래가 되는, 인간적 수단으로 전락한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손에 들어 온 것은 잘못하면 부패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괴테의 말처럼, “사람의 손에 들어오는 것 치고 썩지 않는 것이 없다.”고 했지만, 거룩한 은사도 잘못하면 비 신앙적인 습관으로 변하기 쉽습니다.

그것이 참 신비한 경험이라면, 오히려 나의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나는 한계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됨과 동시에, 신비한 경험! 그것은 나의 초라함을 발견하고, 겸허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흥사들! ‘반말’하면서 호령하는 자세에서, 권위주의로 지향하면, 오래 지속 못하고, 썩기 마련입니다.)

제3단계:모세는 신성한 경험을 합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의 신을 벗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평소의 생활과는 구별된 절대의 경지입니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을 끊고 절대자인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地平線上에 垂直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는 성서적으로, 이런 것을 ‘至聖所’의 경험입니다.(새로운 立場에 서라!)

엘리야는 세미한 소리를 듣습니다. 이것은 바로 거룩한 경험, 절대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는 얼굴을 들지 못하고 얼굴을 가렸습니다. ‘지성소’의 경험입니다. 바울은 강한 빛이 비춰서, 땅에 엎드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것은 ‘지성소’의 경험입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과 邂逅相逢하는 순간입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이다.” 바울은 예수님을 절대자로 만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베드로의 ‘지성소’의 경험입니다. 절대자를 ‘지성소’에서 만나는 경험은, 신앙이란 것은 바로 이 같은 궁극적인 절대자 앞에 선 삶이란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늘이 무너져도, 내 생명이 끊어져도, 한 번에 千萬金이 생기는 일이라도 이것만은 절대로 否定하거나, 침범할 수 없다는 절대자 앞에 선 심정의 생활입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리스도요, 하나님이라고 하면서도, 그 거룩한 이름을 자기의 이기적인 이익에 이용하는 것은 비 신앙적인 것입니다. ‘지성소’는 어디까지나 복종의 대상이지 이용의 대상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혹여 ‘지성소’의 경험을 이미 자기에게 속해버린 것으로 알고, 자기 뜻과 일치해버리면, 결국 我執과 獨善을 낳게 되어 또 하나의 偶像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경험이 신앙의 유일한 것이다. 그것 아니면 안 된다.”에 빠집니다.

제4단계(마지막 단계):모세나 엘리야 또는 바울, 베드로의 지성소의 경험, 즉,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단순한 종교적 경험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늘과 彼岸의 세계를 계시하는 것도 아니며, 또 ‘존 번연’이 말하는 ‘천로역정’속의 환상 같은 것도 아닙니다. 진실로 그것은 이 역사적 현실인 地平線上에서 지금 도탄에 빠져 신음하는 민중의 아픈 소리입니다. 모세가 들은 소리는 바로 애급의 손아귀에서 신음하는 同族의 소리였습니다.

모세는 그들의 소리에 호응하여 그들을 해방하겠다고 결의했던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뜻은 모세나 엘리야 또한 바울, 베드로가 섰던 그 상황과 그리고 그것에 대한 저들의 內的 소리와 遊離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가령, 모세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 소리는 그의 내적 고민과 무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버리고 온 자기 민족의 수난의 환경과 소리를 알고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눈을 가렸으며, 귀를 막고서, “나는 못해!” 미디안의 외로운 나그네로써, 양떼나 몰고 다녔습니다.

이런 모세를 하나님은 그를 불러서 逃避에서 벗어나서, 동족을 救出하라는 決斷을 촉구했던 것입니다. 사실이지, 모세는 애급사건을 잊고, “다 틀렸다.”고 했지만 자기 良心의 소리는 멈출 수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차제에 절대의 음성인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그것은 명령이었습니다. 이에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召命이었던 것입니다.

엘리야의 경우=바알(이세벨)에게 志操를 지키는 자가 7,000=남은 자가 있으니 계속 용기백배하라는 명령이었고, 바울에게는 “이방인을 위한 나의 택한 그릇이라.”고 하셨고, 베드로는, “여기가 좋아오니...초막 운운 하니까!” 주님께서 ‘아니다, 저 山下에는 고통당하는 군상들이 있지 아니하냐!’는 뜻으로, 山下하시어서 벙어리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는 역사를 했던 것입니다.

 

3. 결론: 召命의 마지막 길은 종내 주님의 뒤를 따르는 길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고난의 길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이태리의 성 프란시스의 기도처럼, 주님의 道具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외에도 신비한 체험을 많이 했지만, 그의 결의는 ‘오직 十字架외에는 아무것도 알려하지 않았다’고 했으며,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했던 것입니다. 소명 받은 모든 성직자는 이런 길을 가야만 사명을 다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들 다 이런 ‘소명자’(使命者)가 다 되도록 하십시다! 끝.

2010. 5. 6.

山下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