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약설교마당(135)

40. ​믿음이 곧 삶이다.

solomong 2025. 1. 27. 10:40

 

40. ​믿음이 곧 삶이다.

(본문: 히11:17-19)

 

1). 서론: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로 바친다는 풍속은 고대문헌에서 보면 중동일대에 흔히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암몬족의 신인 ‘몰록’에게 어린 아들을 인신제사로 바치는 잔인한 의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동양에도 이러한 풍습이 있었고 원시종교에는 거의 어디나 있는 현상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고전에 속하는 <심청전>도 그 서술의 초점은 비록 달리하고 있지만, 배경엔 이러한 풍습이 전제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엔 이와 같은 因習을 그 자체로 두지 않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서술함으로써 신앙문제로 轉換되었습니다.

 

특히 히브리서 기자는 ‘신의 진노를 막기 위해서 아이를 제물로 바친다.’는 원시종교, 즉 공포에 의한 숙명적인 굴종의 이야기가 아니라, 또한 창세기의 22:1.이하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라고 되어있는데,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잡아 제물로 바치려는 뜻이 강열하게 비쳐진다면, 히브리서 본문엔 아브라함의 믿음을 Test하는 이야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주어진 현실의 삶 속엔 큰 시련이 닥쳤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시련에 절대로 체념치 않고, “죽어도 산다.”, 죽은 이를 하나님은 다시 살릴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이 곧 삶>이란 것을 본문을 통해서 묵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2). 본론(Text): ①. 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히브리서 본문 11:17.은 중요하고도 새로운 해석을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본문 속에는 2번이나 이삭을 약속받은 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벌써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살리자는 축복과 사랑과 미래의 하나님이지, 과거를 묻는 진노와 징벌, 복수의 하나님이 아님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神의 진노를 막기 위해서 아이를 바친다는 원시종교, 즉 공포에 의한 숙명적인 굴종의 이야기가 아니라, 믿음을 試金하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②. 11:18-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창세기 21:12의 인용이며, 히11:17의 “약속을 받은 자로되”를 설명한 것입니다.

 

③. 11: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창세기 기사엔 본문의 이런 말씀의 주해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의 목에 칼을 대어 제물로 바치려고 한 것은 이삭이 죽어도 다시 살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기에 하는 말입니다. 우선 이삭이 났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불가능을 가능케 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다시 살줄을 믿었을 때, 그의 기적적인 回生을 참작했을 것이고, 또한 이 사건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그림자이기도 하며, 이삭이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을 올라간 것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 산으로 가신 그림자이기도 한 것입니다.

 

3). 본론(Context):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인다는 것은 단지 아비 됨을 그치는 것이 아니라, 人倫大事가 문어지는 행위가 됩니다. 이삭의 등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업혀져 있기에, 그것은 바로 이삭을 통해서 인류의 새로운 미래가 약속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이면 절대로 안 되는 것이 이삭의 생명이었습니다. 이삭은 단순한 하나의 생명, 단순한 아브라함의 혈육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와 하나님의 경륜이 그 등에 업혀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아이를 죽이는 것은 이스라엘을 죽이는 것이며, 歷史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을 저항하는 것이 됩니다.

 

아브라함 삶의 시련이 가혹한 것은 외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의 처절한 삶속에서라도 하나님을 믿고 명령에 순종을 했습니다. 종교개혁자 M. Luther는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과 두 종을 데리고 떠날 때, 특히 어머니 되는 사라는 집안에서 죽었다.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있었다. 아브라함은 만일 그것이 테스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시련이 아니었을 것이다. 테스트 동안에는 그것이 테스트인 줄 모르는 것이 시련이다.라고 했습니다.

 

하여간, 아브라함은 숙명적인 강요에 복종하면서도, 비록 강요받은 의지에 의해 제 자식을 죽이려하면서도 하나님은 이 죽음에서 그를 살릴 것이라는 믿음을 끝끝내 안고 있었습니다. 외적으로 보기엔 이루어진 아무런 근거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죽은 생명을 다시 살려서 그의 약속을 꼭 이룰 것이라는 믿음을 행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히브리서 저자의 믿음에 대한 이해가 이 해석에서 분명히 들어나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1:1.이하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주목할 것은 그 짧은 말씀 속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말씀이 4번이나 나오며, 약속한 것을 비록 그들은 받지 못했고 자기가 사는 동안에는 구체적인 것을 보지 못했다는 표현이 그 전체에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조상들은 바로 그것을 바라보고 즐거워했습니다. 즉 믿음은 希望, 아직 오지 않은 것, 또는 보이지 않는 것에 그 뿌리를 박고 있다는 히브리서 저자의 기본적인 입장이 여기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것과 관련시켜 볼 때, 만일에 아브라함이 지금의 그 외아들을 약속 자체로 생각했더라면, 그의 믿음은 희망이나 보이지 않는 것에 거점을 두지 않고, 보이는 것, 잡히는 것으로 바꾸어 버릴 수도 있었다고 생각해 봅니다. 만일에 보이는 것, 현상적인 것에 절대적인 것을 직결시키면 그 보이는 것이 없어짐과 동시에 그 믿음도 거점을 잃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의 구체적이고 보이는 이삭을 죽이기로 결심했을 때에도, 그는 약속에 대한 그의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 때 그는 비로소 믿음을 行動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죽음 속에서도 새로운 생명이 탄생되리라는 믿음, 창조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잡혀진 불굴의 믿음이었습니다. “죽어도 산다! 보이지 않아도 보인다! 저도 이긴다!”이런 逆理的인 믿음이 참 믿음의 힘이었던 것입니다. 믿음에는 諦念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自明해 진 것입니다. 믿음에는 체념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내세우는 삶의 자세엔 간혹 체념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이미 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행위가 아니라, 희망사항인 <될 것에의 自己를 投身>하는 것입니다.

 

필자는 1996년 당시 <계명대학 사유화> 문제로 ‘계명대 사태’가 야기 되어, 결국 그 이후 파면징계를 받고서 법정으로 많은 소송들이 비화 되었는데, 그 중 가장 최근인 2015년 6월에 ‘계명대학 설립과 사유화에 대한 산증인’이라고 대법원에 증거자료로 제출한 바가 있었습니다.(사건:2015재다845, 교수지위확인) 이를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유화에 대한 유일의 산 증인>: 원고는 대구의 경대사대 부속고등학교 제1학년생으로서(1954년-계명대학이 설립되기 1년 전), 대구제일교회의 출석교인으로, 고등부 학생회 회원이었습니다.

 

당시 경북노회에서 대구의 각 교회에 알려서 계명대학을 설립키 위하여, 현재의 대구시 남구 대명동 2139번지 소재의 허허벌판 땅(전 계명대학 본관 장소)에 가서, 대학건물을 건축하기 위한 정지작업(整地作業)을 젊은이들로 하여금 해달라는 공문이 왔고, 교회는 이를 우리 고등부 학생회에 전달해 왔었습니다. 그리하여 원고도 교회에서 부여하는 괭이와 삽을 메고 현장에 당도하여, 열심히 친구들과 더불어 땀 흘리며 작업을 하였습니다. 그 때에 한 가지 사실을 안 것은 작업을 하다가 땅 속에서 항아리들을 발굴할 수 있었습니다.

 

이상히 여겨서 당시 경북노회 설립위원회의 책임자들에게 ‘이것이 옛날 유물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책임자들이 답변하기를 ‘유물이 아니라, 이 땅은 일제 강점기시대의 일본인들의 공동묘지 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세히 살펴보니, 그 항아리 속에서 죽은 사람들의 뼈들을 발견 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어린 저희 학생들과 청년들의 땀방울이 떨어진 그 터전 위에 현 계명대학교가 설립된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며, 원고는 이 사실에 대해 감히 나서서, 제가 계명대학교는 미국 주한 선교회와 경북 일원의 교인들이 설립했다는 산 증인이라고 외치는 바입니다.

 

그 이후에, ‘어린 고등학생인 <산 증인>이, 이제 커서 계명대학교 교수가 되었으니, 계명대학 설립과 사유화의 산 증인으로서, <계명대학교 역사바로세우기>를 위하고, 또한 이를 만천하에 극명하게 천명하기 위해서, 제 연구실에서 1996년 5월 17일부터 12일간 삭발단식으로, 재학생 약2,700여명이 사유화 반대 시위가 일어났고, 그리하여 ‘계명대 사태’가 발생하여, 결국 원고는 신일희 총장에 의해서 징계 파면되었습니다.라고 참고자료를 제출한 바 있었습니다.

 

계명대학교 설립에 어린 고등학생의 땀방울도 한몫을 하여서 계명대학교가 설립되었다는 역사적 산 증인인데, 교수가 되어 연구실에 평안히 앉아서 연구하며, 학생들을 가르쳐서 당시(1996년) 부교수 급여가 한 달에 500만원을 받으며 好衣好食하는 것이 하나님과 세상 앞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계명대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에 첫 蜂起의 旗幟를 흔들었던 것입니다. 그간 23년이란 세월 속에 ‘교수연금’도 없는 필자의 삶은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 필자의 위와 같은 삶은 소위 신앙적 蠻勇(만용)이 아니라, 신앙의 한 存在樣式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곧 삶인 것입니다. 삶은 신진대사의 반복이듯이 믿음도 바로 계속적인 脫出의 현실인 것입니다. 부단히 잡힌 자리에서 탈출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어떤 固定된 것에 집착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현실적 삶>에 있으면서도 그것에서 계속 탈출하려고 하는 행위로써 그 행위는 마침내 상황을 변화시키고 맙니다.

 

子息을 죽여야 하는 <결정적> 상황을 극복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위가 삶을 창조한 새로운 상황을 가능케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 삶의 시련이야기는 <우리가 하나님께 믿음으로 정성을 보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이라도 하나님께 드릴 용의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자기의 출세나 부모 혹은 사랑하는 애인도 떠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존 번연’은 신앙적인 문제로 옥중생활 중에도, 만일 자기가 사형을 당한다면 그 처자들, 특히 어린 소경 딸을 어찌할 것이냐고 고민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이 유명한 말, “나에게 가장 귀중한 우상을 버리고 당신만 섬기게 하소서!”라고 했다고 합니다. 믿음은 곧 삶이요. 시련의 삶속에서도 하나님을 믿음이어야 한다는 소중한 교훈을 배울 뿐만 아니라, 죽어도 산다는 믿음과 호된 시련의 삶속에라도 신앙을 지켜나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4). 결론: 우리는 흔히 믿음을 현실도피나 체념과 혼돈할 때가 많습니다. 산다는 것은 자연적인 생의 연속을 뜻하지 않고, ‘인간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종교적인 특수 행위이전에 인간의 고유한 存在樣式(Being mode)인 것입니다. ‘먹어야 산다.’는 말과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말을 동시적입니다. 이 말은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말과 본질상 같은 존재적 양식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결코 은둔의 거사도 소위 성자도 아니라, 그는 너무나 인간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인간적인 제한성과 삶의 일상성은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의 제한성, 불안, 비겁, 본능과 그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 사이에는 연속선이 없었으며, 그것은 그대로의 모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하다가도 불안해하면서, 변증법적 굴곡을 그으면서도 끝끝내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를 이 모순 속에서 절망이나 좌절하지 않게 한 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으며, 이 믿음이 곧 삶이란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의 삶이 곧 믿음이어야 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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