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눈물의 사람
(본문: 고후2:1-4)
1. 서론: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때에 설립하였으며(행4:15), 고린도전서는 특별히 교회 내 파쟁을 해결키 위해서 쓴 것이며, 고린도후서는 유대주의자들이 교회 안에서 득세하여 바울의 사도직을 반대하면서 교회를 어지럽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급하여 중간 방문을 하였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디도’를 보내어 사태 수습과 예루살렘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헌금 수집을 위해서 파송하여 사태 수습의 급한 불은 끈 상태에서 본 고린도후서를 쓴 것입니다.
바울은 반대자들에게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변명과 영광스러움을 자랑도 해보고, 또한 화해를 호소하기도 하고, 격한 감정의 공격도 해 보다가, 마지막 방법으로 본문의 말씀처럼 ‘눈물의 사람’이 되어, 넘치는 사랑으로 다독거렸던 것입니다. 괴테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한 것처럼, 바울은 문제 해결을 위해서 그간 근심에 찬 여러 밤을 눈물로 지새운 가운데서 고뇌에 찬 <눈물의 사람>! 바울의 면모를 우리는 엿보게 됩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의 주제는 ‘환란’(고난)이라고 하겠습니다. 매화는 추운 겨울의 고통을 겪어야 맑은 향기를 발하고, 사람은 고난을 극복해야 氣槪가 나타나는 법입니다. 그 고난을 극복한 바울인지라, 우리는 그의 인간됨과 하나님의 종의 眞面目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그의 心琴에서 우러나오는 고백, 가리지 않는 인간성, 선명한 판단, 과격한 감정과, 사도직에 대한 투사적인 死守, 최종적으로 선택한 ‘눈물의 사람’으로 문제를 해결한 바울의 모습을 묵상했으면 합니다.
2. 본론(Text): ①. 고린도후서를 쓴 동기와 사정-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쓰게 동기는 특히 고린도교회 내의 파쟁을 무마하기 위함이었고, 디모데를 보내면서 그를 정중히 영접해 줄 것을 부탁했지만(고전16:10-11), 별스런 성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고린도전서를 보낸 후에, 교회 내 사정은 더 악화되어 유대주의자들이 득세하여 거만을 부리면서, 바울을 반대하고 교회를 혼란케 하였습니다.
이런 사정으로, 바울은 급히 고린도를 중간에 방문하였지만, 방문 여행은 실패로 돌아갔고, 교회는 더욱 혼란의 와중에 바울은 모욕만 받고 에베소로 귀환하게 되었습니다.(고후2:5-11) 바울은 다급한 나머지 디모데보다는 담대하고 정치적 수완이 좋은 ‘디도’를 고린도로 보내어 계속 사태수습과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을 위한 헌금 수집을 위해서 파송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오매간 디도의 복명을 기다리다가 초조한 바울은 에베소에서 마게도냐의 빌립보에 가서야 디도를 만나 일단 사태수습이 잘된 뜻한 좋은 소식을 듣고(고후7:5-7), 본 고린도후서를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본 고린도후서는 바울 자신보다 한 걸음 앞서 디도 편으로 보내졌고(고후8:16-24), 뒤 따라 간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하였을 때에는(3번째 방문) 여러 난관이 해결되고 3개월간 체재하면서(행19:21, 20:3), 안정된 마음으로 로마행을 준비하면서, 그 웅대한 로마서를 저술했던 것입니다.
②. 고린도후서의 특징-본서는 전서에 비해서 질서정연한 논조를 갖추지 못하고 복잡성을 띄고 있습니다. 마치 길도 없는 숲속을 헤치면서 들어가는 것 같은 감을 느끼게 된다고 여러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본서는 바울의 주관적인 정서 감정이 엉켜있어서 적나라한 그의 인간성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는 바울의 흉금을 활짝 열고 고백하는 自敍傳과 같습니다.
그러면 왜 고린도후서가 비조직적이요, 주관적이요, 격정의 정서가 담긴 그 이유는 나변에 있게 된 것일까요. 바울의 사도직을 否定하는 반대세력인 유대주의자들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와 유사점을 갖고 있는 갈라디아서에서 그 원인을 類推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었으나”(갈1:13-14), 라는 사유입니다.
유대교권자들로부터 그 권력의 힘을 등에 업고, 열성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괴수가 變節하여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니, 可笑롭기 그지없다는 것이 바울 반대자들의 비난과 조소의 원인이었다고 필자는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반대자들에게 사도직에 대한 변명과 영광스러움을 자랑도 하고, 또한 화해를 호소도 해보고, 격한 감정의 공격도 해 보다가, 마지막 본문의 말씀처럼 ‘눈물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③. 고후2:4- “내가 큰 환란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고린도교회 내의 바울의 반대자들에게 최후로 <눈물로 호소>한 것은 사랑의 발로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의 통일성 문제(10장-13장이 1장-9장 보다 앞서 보낸 편지라고 하는 것으로, 고후2:4이 ‘중간서신’이 있었다는 그 근거라는 것과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 중간에 보낸 것으로 분실되었다는 설)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단지 고린도교회 내의 바울의 반대자들을 설득하는 마지막 방법이 <눈물의 사람>이었다는 것만 언급하고자 합니다.
실로 바울은 눈물의 사람이었습니다.(행20:19, 31, 빌3:18) 당시 희랍의 스토아 철학에서는 눈물을 약자의 상징으로 보고 賤視하였지만, J. Calvin은 “그러나 마음의 부드러움을 보여주는 바울의 눈물은 스토아인들의 강철 같은 마음의 강도보다 더 영웅적인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사랑의 눈물 때문에 좋은 결과와 피차간의 기쁨을 기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고후1:11, 14, 3:3, 4:14, 6:11, 7:2-14, 16 등)
3. 본론(Context): 고린도후서는 激浪이 휘몰아치는 뜻한 바울의 정서 감정이 요동쳐서, 그 주제가 ‘환란’(고난) 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만, 이는 고린도교회 내의 반대세력인 유대인 거짓교사들(고후11:22)의 바울에 대한 사도직 부정과 비난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을 괴롭힌 것은 고린도교회 설립 당시부터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총독 ‘갈리오’에게 모세 율법을 어긴다고 고소했지만, 종교적 문제이기에 총독은 관여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행18:12-17)
또한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바울을 체포하고 사형에 처하려고 했으나, 로마 군인들이 바울을 구출해 주었고(행21:27-40), 유대인에 대한 바울의 변명으로서, 유대교 정통신앙에서 그리스도교의 이방 사도가 된 것을 밝혀서, 복음을 입증하기도 했으며(행22:1-21), 한번은 산헤드린공회 앞에서 바울은 변명도 하였습니다.(행23:1-11) 그리고 유대인들이 음모를 꾸며서 바울을 암살하려고 했을 때, 바울의 생질이 이를 고발하여 음모가 탄로되어 모면하기도 했습니다.(행23:12-22)
이처럼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앙심을 품은 것은, 고린도후서와 유사점을 갖고 있는 갈라디아서에서 그 원인을 類推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었으나”(갈1:13-14), 라는 사유이었습니다.
반대자들은 유대교권자들로부터 그 권력의 힘을 등에 업고, 열성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괴수가 變節하여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니, 可笑롭기 그지없다는 것이 바울 반대자들의 비난과 조소의 원인이었다고 필자는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반대자들에게 사도직에 대한 변명과 영광스러움을 자랑도 하고, 또한 화해를 호소도 해보고, 격한 감정의 공격도 해 보다가, 마지막 본문의 말씀처럼 ‘눈물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내의 반대자들에게 최후로 <눈물로 호소>한 것은 바울의 사랑의 발로이었습니다. 실로 바울은 눈물의 사람이었습니다.(행20:19, 31, 빌3:18) 당시 희랍의 스토아 철학에서는 눈물을 약자의 상징으로 보고 賤視하였지만, J. Calvin은 “그러나 마음의 부드러움을 보여주는 바울의 눈물은 스토아인들의 강철 같은 마음의 강도보다 더 영웅적인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사랑의 눈물 때문에 좋은 결과와 피차간의 기쁨을 기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고후1:11, 14, 3:3, 4:14, 6:11, 7:2-14, 16 등)
시성 괴테가 “눈물에 젖은 빵조각을 씹어 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유명한 말을 했지요. 이는 곧 고난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인생의 참 의미를 알지 못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바울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기록했기 때문에 이 서신을 소위 중간서신인 <눈물의 편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편지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본문이 그런 편지가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눈물의 사람>! 바울은 오늘의 성도들과 우리 목회자들에게 귀감이 되는 말씀과 삶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자녀들과 친구들, 조국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밤마다 새벽마다 울며 기도하는 눈물의 사람이 되십시다. 바울처럼 눈물로 악을 죽이는 우리들이 되도록 합시다. 눈물 때문에 세계 도처에 양심이 다시 태어나게 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에게는 고귀한 액체가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땀과 눈물과 피 입니다. 땀을 흘리는 것보다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 어렵고, 눈물보다는 피를 흘리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땀은 노력의 상징이요, 눈물은 감정의 상징이요, 피는 생명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땀 흘리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고, 눈물 없이는 바로 살아갈 수 없으며, 피를 흘리지 않고서는 위대한 일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눈물에는 여러 종류의 눈물이 있습니다. 멀리 헤어졌다가 다시 만날 때 기쁨의 눈물이 있고, 지난날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참회의 눈물이 있는가하면, 분투노력 끝에 영광을 차지한 승리의 눈물이 있으며, 억울한 일을 당하고 괴로워하는 恨의 눈물이 있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때때로 ‘눈물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연약한 사람, 허물과 회오에 찬 사람은 엎드려서 기도하며 울게 됩니다. 다윗이 그랬고, 예레미야가 그랬고, 사도 바울이 그랬잖습니까.
어쩌면 교회는 눈물을 흘리는 장소입니다. 감격의 눈물이 있는 곳, 회개의 눈물이 있는 곳, 사랑의 눈물이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눈물을 배우는 곳입니다. 눈물은 희망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은혜가 찾아오면 가장 먼저 눈가가 촉촉해집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찾아오면 사랑의 샘이 넘치게 됩니다. 사랑의 샘이 넘치면 눈물이 흐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비극이 있다면 우리에게 눈물도 기쁨도 감사도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눈물은 삶에 대한 감동의 언어입니다. 기쁨은 기쁨대로 슬픔은 슬픔대로 흘러나오는 감동의 언어인 눈물은 삶의 뿌리를 적시는 고은 단비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보시고 흘리셨던 예수님의 눈물, 예루살렘 도성을 바라보시면서 흘리신 주님의 눈물, 겟세마네 동산에서 속죄의 대업을 이루기 위한 주님의 눈물을 잊지 맙시다. <눈물의 사람>! 바울은 오늘의 성도들과 우리 목회자들에게 귀감이 되는 말씀과 삶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 모두 ‘눈물의 사람’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4. 결론: 사도 바울은 반대자들에게 사도직에 대한 변명과 영광스러움을 자랑도 하고, 또한 화해를 호소도 해보고, 격한 감정의 공격도 해 보다가, 마지막 본문의 말씀처럼 ‘눈물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실로 바울은 눈물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희랍의 스토아 철학에서는 눈물을 약자의 상징으로 보고 賤視하였지만, J. Calvin은 “그러나 마음의 부드러움을 보여주는 바울의 눈물은 스토아인들의 강철 같은 마음의 강도보다 더 영웅적인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사랑의 눈물 때문에 좋은 결과와 피차간의 기쁨을 기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 가슴의 벽을 허물고 쏟아지는 것이 눈물입니다. 눈물은 연약함의 표현이 아닙니다. 눈물은 삶에 대한 감동의 언어입니다. 기쁨은 기쁨대로 슬픔은 슬픔대로 흘러나오는 감동의 언어인 눈물은 삶의 뿌리를 적시는 고은 단비인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보시고 흘리셨던 예수님의 눈물, 예루살렘 도성을 바라보시면서 흘리신 주님의 눈물, 겟세마네 동산에서 속죄의 대업을 이루기 위한 주님의 눈물을 잊지 맙시다. 때로는 우리 모두 ‘눈물의 사람’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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