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본문: 마 26:36-46)
1). 서론: “人間 最大의 勝利는 내가 나를 이기는 것이다.”라고 철인 Platon은 일직이 말한 바 있었습니다. 또한 Victor hugo에 의하면 인생에는 3가지 싸움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自然과 人間과의 싸움입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자연과 끊임없는 鬪爭의 흐름이었습니다. 자연은 우리들의 따스한 마음의 고향이지만, 때로는 잔인한 敵이기도 합니다. 자연을 선용하여 잘 살기 위해서 과학기술 문명의 무기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둘째는 인간끼리의 싸움입니다. 개인과 개인 간의 生存競爭에서부터 나라와 나라와의 전쟁, 민족과 민족과의 싸움, 독재 권력과 자유 세력과의 투쟁에 이르기까지, 人間 世界에는 많은 싸움이 있습니다. 인간은 生存을 위한 싸움과 自由와 正義를 위한 싸움의 역사이었지요.
마지막으로, 自己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가장 중요한 싸움입니다. 그것은 내가 나하고 싸우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빅톨, 위고’는 이 싸움을 그리기 위하여 유명한 ‘레미제라블’을 썼다고 합니다. ‘쟝발장’이라는 한 인간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善한 自我와 惡한 自我의 內的 영혼의 투쟁과 육신의 투쟁을 그렸습니다. 마침내 선한 쟝발장이 악한 쟝발장을 이기는 용감한 精神的 勝利를 생생하게 그린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善과 惡의 싸움터입니다. 나의 마음속에는 항상 두 自我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용감한 나와 비겁한 나”, “너그러운 나와 옹졸한 나” “正義의 나와 不義의 나”, “참된 나와 거짓된 나” 신령한 나와 퇴폐한 육체의 나, 이러한 두 가지의 自我가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늘 싸움을 합니다. 내가 나하고 싸워 영적 승리는 하나님의 축복이요 영광인 동시에, 육신의 승리는 고뇌와 비극의 源泉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정황은 3년간 제자훈련을 시켰지만, 한 제자는 스승을 배반하였고, 3. 제자들은 잠에 취해 있었고, 나머지 8. 제자들은 무관심 속에 있어서, 예수님의 최후는 이렇게 서서히 막이 오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본문 46절의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는 이 말씀을 지금 읽을 때도, 가슴이 찡하고 두 주먹이 불끈 쥐어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 이 말씀을 중심으로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는 주변의 말씀을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2). 본문의 이해(Text): ①.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그러나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겟세마네’의 뜻은 ‘기름 짜는 틀’이란 의미로서, 이곳 감람산에서 감람나무 기름을 짰으므로 생긴 이름이나, 예수님께서 이 겟세마네에서 몸의 진액을 짜시면서, 육신의 뜻과 영적 하나님 아버지 뜻 사이에서 투쟁하는 기도에서, 끝내는 하나님 아버지 뜻이 승리하여 십자가 고난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성과 그리스도 신성의 싸움에서 신성이 승리하셨던 것입니다.
②.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이 매서운 아픔 중에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을 위해서 걱정하시었습니다. 마음(πνευμα), 육신(σὰρξ)=靈肉이란 뜻으로 대조적인 낱말입니다. (롬 8:5, 갈 5:16-17) 육이란 문자적으로 육체를 가리키며, 이 육체가 인간의 나약한 모든 죄 된 성격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③. “이제는 자고 쉬라.”-가롯, 유다를 뺀 11. 제자를 대동하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첫 8. 제자의 기도자리(베드로, 야고보, 요한 3명의 핵심 제자들을 제외한 제자 群),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야고보와 요한) 3. 명의 기도자리, 그리고 주님의 기도 자리로 배열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 하시다가, 제자들의 기도 자리로 첫 번째는 오셔서 자는 것을 보시고는 책망을 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침묵하시고, 세 번째는 자고 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체념적인 심정으로 “이제는 자고 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정말 잘 때 자고, 쉴 때 쉬었다면, ‘말고’의 귀를 치는 실수도, 3번 주님을 부인하는 범죄도 없었을 것입니다. 저들은 깨어야 할 때 자고, 자야 할 때 깨어서 괴오를 범했던 것입니다.
④. “일어나라 함께 가자.”-드디어 배반자 가롯, 유다가 인솔한 무리가 다가와서 주님을 체포하는 급박한 경지에 당도하게 되었습니다. 이 경지에 이르렀는데, 아직도 제자들은 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는 제자들을 일깨워서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는 다시 명령을 발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제자들은 주님과 같이 가지 못했기에, 스승 되는 예수님은 고독히 고난의 길을 가셨던 것입니다.
3). 본론(Context): 본문의 말씀과는 조금씩 다르지만, 4. 복음서에 다 같은 감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가롯. 유다는 민족해방의 목적하에 주님을 따랐으나, 자기의 길과 다르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배반했고, 나머지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는 그 길의 목적을 이해치 못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곤하게 잠자는 세 제자를 일깨워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함축된 주변의 의미를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이 고난의 잔을 마시지 않을 수 없느냐고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했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구약에 예언하고, 약속하신 대로, 인류 구속을 위한 어린양으로서의 희생의 제물이 되는 십자가의 길을 무응답의 응답으로 지시하셔서, 주님은 그 길을 가기로 결단하셨지만, 아직 철 부지한 제자들이지만, 곧 알게 될 것이란 주님의 바람 속에서 자신의 길을 뒤따라서, 잘 오란 의미로 함께 가자고 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에 “일어나라”라는 말은 그 반대 상황인 제자들이 “주저앉았다.”라는 것을 전제합니다. 좌절과 실의에 빠져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일어나라”라는 말씀은 그 절망의 늪에서 일어나면 희망의 놀을 보게 될 것이란 보장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함께”라는 말씀은 “너희 (제자들)끼리만 가게 되면 무력하고 아무런 방도가 없을 것이니, 내가 같이 가니 그저 너희는 따라만 오면 된다.”라는 담보의 말씀입니다. 임마누엘 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부활 후, 갈릴리 바다에서 스승과 제자들이 재회하였고, 스승에 대한 지조(志操)를 저버린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에겐 ‘어린양을 먹이라.’라는 부탁을 하셨던 것입니다. (요 21:15~23) 그리고 오순절의 성령강림으로 그들은 새로운 능력을 받아서 주님의 뒤를 묵묵히 따라갔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 외에는 다 장엄한 순교의 길로 주님의 길을 시간적 시차(時差)는 있었지만, 주님과 함께 간 길이었습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에게,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간곡히 부르시고 호소하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가 주님과 함께 가야 할 그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우선 우리는 아직 육을 벗어나지 못한 자들이기에, 인간의 도리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가장 우리의 기본이 되는 길은, 가정에 있어서 부모가 되는 <어버이의 길>을 착실히 걸어서 우리에게 딸린 자녀들을 영적으로, 사람 되는 길로, 육체적 건강을 돌보는 길로, 잘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공동체의 일원으로 손색이 없게, 튼튼한 몸으로 홀로 서서 자기 갈 길을 가도록 키우는 어버이의 길입니다.
동시에 성숙한 자녀들은 살아생전에 부모님에게 효도하여 돌아가신 이후에 다시 후회 없는 자식의 길과 사회에서는 부모를 욕 먹이지 않고, 기쁘시게 하며, 국가에 봉사하는 길을 가는 자녀의 길을 말합니다. 스승 된 자는 제자들을 하나라도 잘 가르쳐서, 제 갈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도록 지성을 다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우리나라가 해방 후, 세계에서 유일하게 급성장하여, 그야말로 ‘타골’의 시(詩)처럼, <동방의 빛>의 나라가 된 것도 사도(師道)의 힘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조국의 땅에 태어나 잔뼈가 자라서 이만큼 된 것도, 조국의 강산과 역사와 사회에 무한한 혜택을 입었기에 조국을 사랑하는 길로 매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사는 우리의 지상명령은 반세기 이상 동족이 타의에 의해서 생이별하여 갈라진 이 슬픈 현실을 이제 우리 힘으로 민족의 숙원인 남북통일의 터전을 마련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아야 하겠습니다. 남북통일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래서 7,000만 조국 통일의 힘으로 세계로 줄기차게 복음 선교의 길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는 말씀의 목소리는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도 외쳐지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내 뜻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항상 묵상하면서 일반 사회생활을 하면서, “예수 믿는 사람이 다르다!”라고 하는 말을 들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그 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들의 언행 때문에 말할 수 없이 탄식하는 그런 우리 자신이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기’ 위해서는 다음 몇 가지 방법을 제안합니다. ⑴. <나의 뜻과 하나님 아버지 뜻의 싸움>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승리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겟세마네’란 ‘기름 짜는 틀’이란 의미로서, 이곳 감람산에서 감람나무 기름을 짰으므로 생긴 이름이나, 예수님께서 이 겟세마네에서 몸의 진액을 짜시면서, 육신의 뜻과 영적인 하나님 아버지 뜻 사이에서 투쟁하는 기도에서, 끝내는 하나님 아버지 뜻이 승리하여 십자가 고난의 길을 걷게 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인성과 그리스도 신성의 싸움에서 신성이 승리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나의 뜻과 하나님 아버지의 뜻 사이에서, 육신의 욕심을 압도하여 영적 하나님의 뜻이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계략에 빠져들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제자들처럼 잠에 빠져들게 하는 유혹에 속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본문 26:41~43 참조)
⑵. 졸지 말고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깨어있음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명심합시다. (마 24:40~41, 마 25:5 참조) 그래서 본문에서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0~41)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육신의 무게에 짓눌려 깨어있어야 할 영적인 영롱함이 깊은 잠에 취해 있다는 예수님의 꾸중이었던 것입니다.
⑶. 시험에 드는 것 그 자체가 악에 빠지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영이 잠들어 버리는 것 그것 자체가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바로 악에 빠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의 교훈은 큰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라기보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뜻을 행하는 것이 바로 악에 빠지는 것이란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뜻을 행하는 줄만 알았는데, 나도 모르게 악한 마귀의 뜻에 따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⑷.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 기도의 의미를 항상 새겨야 합니다. 잠이 든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처절하게 苦鬪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역시 인간의 연약함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히브리서가 말하고 있듯(히5:7), 혈과 육을 가지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아버지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통을 앞에 두고, 그것을 피하기를 원하는 당신의 뜻을 아버지께 고합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님도 자기의 뜻과 아버지의 뜻이 충돌함을 통해 오는 고민과 시험을 경험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아래로 끌어당기는 육신의 무거움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눈꺼풀을 당겨 내리는 잠의 무게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우리는 씨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처절한 투쟁의 모습은 3가지 점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ㄱ). 본문 38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마음이 죽을 것 같다고 표현하십니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있으라 하시고”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ㄴ).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라는 말씀이 시원하게 아버지의 뜻이 이루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이라는 但書의 말씀은 예수님이 겪으신 그 처절한 싸움의 모습을 엿보게 합니다.
(ㄷ). 또한 예수님은 이러한 기도를 세 번 반복하여 드리십니다. 한 번의 간절한 기도로 육신의 뜻을 극복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몸부림치며 기도하셔야 육신의 무게를 이겨내겠다고, 쏟아지는 육적 잠을 이겨내시었던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어찌 몸부림치며 기도하지 않고 이 잠을 이겨 낼 수가 있겠습니까!
내 삶에 문제들이 해결되어, 안락하게 행복해지고,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자녀들이 잘되는 것만이 나의 육신의 속셈이 아닌지 물어보아야 하겠습니다. 너무나 깊은 잠에 아주 오랫동안 빠져 있어서 잠든 것인지도 모르는 상태는 아닌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세상은 영적으로 잠이 든 사람들이 만든 세계관과 가치관 속에서 돌아갑니다. 그들이 외치는 가장 소중한 가치가 언론매체를 통해, 문화를 통해 우리에게 주입되어 집니다.
모두 평안히 잠들어 있는데, 왜 너만 별나게 구느냐고 핀잔을 줄지도 모릅니다. 또한 나 자신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요. 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다시 잠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는 오늘 본문의 예수님처럼 몸부림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모양이 나빠지고, 실패하곤 해도 이 싸움을 계속해야 합니다.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겟세마네 기도의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십자가를 지기 위함이었습니다. 겟세마네의 투쟁과 일어나 십자가로 나아가는 과정은 날마다 순간마다 반복되어야 합니다. 본문 45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잠에 빠지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고 기도하는 것을 이제 그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게 언제이었습니까. 바로 십자가를 지러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내가 사형수처럼 넘겨져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까지 내 뜻을 관철하려는 육신의 잠을 이겨내어야 합니다.
몸부림치며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구하고 따르려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이렇게 몸부림치며 깨어 기도할 때, <일어나라 함께 가자>며 내미시는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십자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늘 본문 속에서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함께”하자고 초대하십니다. 멀찍이 앉아있는 제자들처럼 되지 말고, 예수님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 깊이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기도하시는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 함께 몸부림치시며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때로는 깜빡 졸게 될 때, 한시 동안도 깨어있을 수 없더냐고 깨우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잠에서 깨어나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손 내미실 때, 담대히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는, 나를 죽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과감한 선택을 하는 우리들의 날마다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4). 결론: 옛날 야곱이 실패를 거듭한 후에,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라고 했듯이, 우리도 예수님께서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철없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십자가의 길로 묵묵히 걸어가신 주님의 모습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어쩌면 당시 제자들의 안목에는 여지없이 실패자의 길로 가시는 길인 듯했지만, 주님께서는 끝내 죽음을 정복하시고, 부활의 아침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사명인 <牧羊>을 제자들에게 맡기셨던 것이 아닙니까! (요 21:15~23) 그러므로 부단히 <나의 뜻과 하나님 아버지 뜻의 싸움>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승리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졸지 말고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 <시험에 드는 것 그 자체가 악에 빠지는 것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투쟁의 기도를 항상 마음속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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