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약설교마당(135)

41. 사랑의 頌歌

solomong 2025. 1. 30. 12:10

41. 사랑의 頌歌

(본문: 요일 4:7-10)

 

1). 서론: 사랑의 頌歌를 노래한 자는 사랑의 사도 요한입니다. 그는 갈릴리 벳새다(마4:18-22, 요1:44. 참조) 출신으로 아버지는 갈릴리 해변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어부 세베대이며, 어머니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동생인 살로메이었습니다. 요한의 형인 야고보와 요한 자신을 예수님께서 “보아너게”(우레의 아들)란 별명을 지어주신 것을 보아서(막3:17), 성품이 급하고 다혈질적인 성격의 소유자라고 보겠습니다. 심리학적으로 해석해 볼 때, 바다에서 억센 풍랑과 싸우면서 고기잡이 생업을 영위해 온 아버지 성품이 거칠고 과격한 인성 밑에서 자라면서, 또 아버지를 따라서 어업을 했기에 우락부락한 성품이 형성 되었다고 보겠습니다. 이런 인성의 모습으로 처음 예수님을 만나 뵈었으니, 예수님의 안목은 정확한 판단을 하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런 인격의 소유자인 요한이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중생의 체험을 통하여 변화를 받아서 ‘사랑의 사도 요한’이 되었습니다. 거칠고 억센 성품이 부드럽고 유순한 사랑의 인품으로 변화되었으나, 요한에게는 지고지순한 의지의 모습은 그로 하여금 예수님을 위한 고생과 위험을 무릅쓰고 끝까지 사랑의 송가를 노래 할 수 있게 했다고 보겠습니다. 그 일예로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잡히시자 다 도망쳤으나, 요한만이 십자가 밑에서 애달픈 심정으로 사랑의 哀歌를 불렀던 것입니다.(요 19: 26-27) 이런 인품과 신앙을 본문을 통해서 노래한 사랑의 송가를 음미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2). 본론(Text): ①. 요한1서는 “사랑의 편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의 요한복음서, 요한2서 요한3서, 및 계시록처럼 요한1서는 사랑의 말과 사상이 풍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이여”(ἀγαπητοί)라는 애칭어가 6회, “사랑”(̕α̕γάπη)란 명사가 18회, 사랑의 동사형(άγαπάω)은 무려 29회나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대하는 사랑을 강조하고 그 사랑을 받아 형제를 사랑할 것을 서신 전편에 흐르고 있습니다.

 

② 사랑의 근원-본서 4:7-21.까지 사랑의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만, 본문에서는 사랑의 근원(4:7-10)을, 사랑하는 자만이 하나님과 영교를 가질 수 있다는 사랑의 공효(4:11-16)를,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는 것을(4:17-18), 사랑의 실천을 강조(4:19-21)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은 육정적인 사랑(ἔρως), 인정적인 사랑(φίλος)도 아닌 거룩한 사랑(α̕γάπη)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거룩한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사랑의 근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이며,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4:7-8)

 

③.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새롭고 놀라운 신관(神觀)의 선언입니다. 屬性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만이 아니라, 本性的으로 하나님은 그 자신이 사랑이란 것입니다. 속성과 본성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선언하고, 그 증거로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 인생들을 구속하여 살리신 그런 사랑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4:10)라는 것은 하나님의 선수적인 사랑(Initiative Love)만이 진정한 사랑인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4:9-10)

 

3). 본론(Context): 신약 성서에서 ‘사랑’이란 용어는 필로스(φίλος)와 아가페(α̕γάπη)가 성서적 용어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에로스(ἔρως)는 성서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낱말이며, 그 사상은 그리스 철학에서 논의 되는 낱말입니다. 철학자 플라톤은 관념(Idea)의 세계와 현상의 물질계(Matter)로 2원론적으로 분류하여 변화무쌍한 물질계에서 관념의 영원한 Idea세계로 복고하며 상승하는 정신적적 사랑(Platonic Love)을 ‘에로스’라고 하였습니다. 에로스의 개념은 욕망적인 자기중심적 사랑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생애를 통해서 처음엔 <에로스의 사랑>, 그 다음은 <필로스의 사랑>의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종내는 <사랑(α̕γάπη)의 頌歌>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갈릴리 벳새다 해변에서 거친 풍랑과 싸우면서 고기잡이로 호구지책을 해온 그의 아버지 세베데의 인간됨됨은 한 마리의 고기를 더 잡으려고 자연과 싸우는 과정 속에서 세베데의 성품은 과격한 인품의 사나이가 되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이런 아버지를 보면서 성장했고, 20여세까지 아버지를 따라서 갈릴리 해변을 누비며 어업에 종사하면서 형성된 인성이 예수님이 말씀한 “보아너게”(우레의 아들)로서,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적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고기잡이 생업으로는 희망성이 없다고 해서인지, 세례요한의 두 제자(안드레, 사도요한-요1:40)) 중에 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성서학자 간에 일치된 견해이었습니다. 당시 세례 요한의 인기는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흠모의 대상이었기에, 사도 요한도 현혹되어 출세가두를 달리고 싶은 욕망에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된 이유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하기를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 36)라는 말을 듣고, 그는 예수님을 따르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점차 예수님의 사랑 받는 제자가 되어, 12제자 반열의 핵심 멤버(베드로, 야고보, 요한)로 등장 되어 중요한 사건엔 예수님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일예가 변화산에서 변모되는 신비한 예수님의 모습도 체험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장한 각오로 예루살렘에서의 수난을 예고하셨는데,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왕위에 등극한다고 생각하여, 그 어머니 살로메와 더불어 좌우정승의 자리를 요구하였습니다.(마2020) 이와 같은 요한의 정신 상태는 에로스 <사랑의 노래>를 부른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다음 요한의 필로스 <사랑의 讚歌>를 들어 봅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필로스(φίλος)는 人情的인 사랑, 부드러운 애정이며, 직관적이며 정서적인 것이고 감정적인 사랑을 뜻하고 있습니다. 필자의 생각엔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한 새 사람의 은혜를 받기 전까지(비록 예수님의 부활 후의 사건을 포함해서)‘필로스’ <사랑의 讚歌>를 불렀던 것입니다. 주님과 베드로 간에 3번이나 반복된 사랑의 문답에서 베드로의 답변의 낱말은 ‘필로스’이었습니다.(요21:15. 이하) 베드로의 답변이지만, AD. 85년경에 쓴 요한복음서의 저자인 사도요한이 ‘필로스’에 대한 대화의 사건은 AD. 30년경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있었던 대화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뿐만 아니라, 사도 요한도 같은 생각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인정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더 집어 보십시다. 요한은 베드로와는 달리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그 자리는 피하였으나, 끝까지 쫓아가 제사장 가야바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던 베드로를 들어가도록 도와주었습니다.(요18:15-16) 여기에 “다른 제자”는 바로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는 성모 마리아와 자매간이고, 그들은 제사장 계통인 엘리사벹의 친족이었으니(눅1:5, 36) 요한은 대제사장과는 아는 사람일 수 있었을 터이니, 베드로를 위한 인정적인 사랑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그 자리에 어머니와 언니인 마리아와 함께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를 보시고 자신의 동생들도 아닌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였습니다. 그 때부터 사도 요한은 자기 집에서 성모 마리아를 오래도록 봉양하였던 것입니다.(요19:25-27) 비록 인정과 애정이 서린 ‘필로스’ <사랑의 讚歌>이었지만, 눈물겹도록 지극정성의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이상에서 ‘에로스’와 ‘필로스’의 사랑의 단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에로스’는 자기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생의 방향(Direction)이 상향적으로 욕심을 부리는 것이었다면, 본성(Nature)에 있어서는 ‘필로스’는 인간적이었습니다. 삶의 방법(Way)에 있어서는 ‘에로스’나 ‘필로스’는 자아만족 내지 자기 보존적이었습니다.

 

자! 이제 3번째 사랑(α̕γάπη)의 단계인 <사랑의 頌歌>를 들어 봅시다. ‘에로스’ 단계엔 ‘사랑의 노래’, 필로스 단계는 ‘사랑의 讚歌’, 마지막 단계에서는 ‘사랑의 頌歌’를 불렀던 것입니다. 그는 오순절 성령강림 때, 새 사람으로 거듭 나서(행1:13, 2:1-4) 베드로와 함께 예루살렘(행 3:1)과 사마리아(행8:14)에서 선교 활동을 벌였습니다. 그러한 요한을 바울은 야고보, 베드로와 함께 ‘교회의 기둥’이라고 불렀습니다.(갈2:9)

 

전승에 의하면 AD. 44년 헤로데스 아그리파 1세의 박해를 피해 소아시아로 피신했으며, 그 곳의 일곱 교회(에베소와 필라델피아 및 라오디게아 등등)를 지도했다고 합니다. AD. 85년경에 <요한복음서>와 AD.90경에 <요한1. 2. 3.서>를 성령의 감동 하에 저술하였습니다. AD. 95년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 때, 요한은 군병들에게 붙잡혀 ‘밧모’(Patmos)섬으로 유배되었는데, 그 곳에서 요한계시록을 저술하였으며, 96년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되자 사면 받아 에베소로 귀환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너무 노쇠하여 제대로 설교를 할 수 없어 항상 신도들에게 부축을 받았다고 합니다. 요한은 항상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쳤는데, 매일 같은 말만 반복하는 것에 대해 신도들이 불평을 하자 요한은 “사랑은 그리스도 교회의 기초요, 사랑만 있으면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AD. 100년경에 90살의 나이에 사도들 중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고 편안하게 임종을 맞았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그의 변화된 삶에서 <사랑의 頌歌>를 부르면서, 성령의 감동 하에서 그가 쓴 본문에서 <사랑의 頌歌>의 구체적 내용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사랑의 근원-본서 4:7-21.까지 사랑의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만, 본문에서는 사랑의 근원(4:7-10)을, 사랑하는 자만이 하나님과 영교를 가질 수 있다는 사랑의 공효(4:11-16)를,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는 것을(4:17-18), 사랑의 실천을 강조(4:19-21)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은 육정적인 사랑(ἔρως), 인정적인 사랑(φίλος)도 아닌 거룩한 사랑(α̕γάπη)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거룩한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사랑의 근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이며,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하였습니다.(4:7-8) 그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새롭고 놀라운 신관(神觀)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屬性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만이 아니라, 本性的으로 하나님은 그 자신이 사랑이란 것입니다.

 

屬性과 本性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선언하고, 그 증거로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 인생들을 구속하여 살리신 그런 사랑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4:10)라는 것은 하나님의 선수적인 사랑(Initiative Love)만이 진정한 사랑인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4:9-10) 또한 이 사랑의 방향(Direction)은 하나님께로부터 인생을 향하여 내려오는 下向的이며, 본성(Nature)적으로는 神的이며, 삶의 방법(Way)에 있어서는 자아희생과 자기 분여(Self-Imparting)의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의 송가>는 하나님으로부터 하향하여 그대로 인생들에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기독자의 가슴에서 생성하고 발전하여 새로운 방향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기독자의 가슴에 피동적이고 유발된 사랑은 원칙적으로 하나님께 향긋하게 먼저 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신자의 의무요 요약입니다. 그리고 신자의 또 하나의 사랑의 방향은 사람입니다.(요13:34) 기독신자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출발하여(요한1서 4:11) 사람에 이르고, 다시 이웃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頌歌>의 신비로운 순환인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사랑은 ‘에로스’ <사랑의 노래>에서 ’필로스‘ <사랑의 讚歌>를 거쳐서 ’아가페‘ <사랑의 頌歌>로 종결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저마다 가슴에 속에서 울어나는 사랑의 진실한 정체를 더듬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에로스’ 단계인지, ‘필로스’단계에서 머뭇거리는지를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사도 요한처럼, <사랑의 頌歌>를 부르는 기독자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4). 결론: 이제 우리는 육정적인 사랑(ἔρως), 인정적인 사랑(φίλος)도 아닌 거룩한 사랑(α̕γάπη)의 <사랑의 頌歌>를 불러 봅시다. 하나님께 향기로운 사랑을 드려서, 구속 은총과 매일 매시 연민에 찬 은혜의 돌보심에 만강에 넘치는 감사의 頌歌를 드리도록 합시다. 그 선수적인 사랑(Initiative Love)과 자기 분여적인 사랑(Self-Imparting)에 감격하여, 이웃으로 사랑의 순환작용이 제대로 돌고 흐르는 삶의 주인공이 모두 되도록 합시다. 끝.

'04. 신약설교마당(135)' 카테고리의 다른 글

43. 역설의 복음  (0) 2025.02.03
42. "바울 삶의 마지막 정리"  (0) 2025.01.31
40. ​믿음이 곧 삶이다.  (0) 2025.01.27
39. 눈물의 사람  (0) 2025.01.26
38.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1) 2025.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