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약설교마당(135)

25. 좌우편 강도의 마지막 眞面目

solomong 2024. 12. 26. 10:22
 
 

25. 좌우편 강도의 마지막 眞面目

(본문: 눅23:39-43)

 

1). 서론: 가을 철이 조금 지났습니다만, 가을 단풍이 붉게 물드는 것을 보고, 식물인 단풍나무로서는 최후를 가장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이라고 느껴 보았습니다. 최후를 아름답게, 有終의 美로 끝내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를 느껴봅니다. 그래서 석양의 황혼이 더 붉게 더 진하게 물들고 일락서산하는 것을 보고, 부럽기도 했었습니다. 우리 인생도 장년기에 이름도 날리고, 명예롭게 사는 것을 볼 때, 그 사람 자기 실현화 했다고, 의미 있는 삶을 산다고 평가 했었습니다.

 

그런데 인생 후반기에 더럽게, 무슨 비리에 연루되고, 그래서 옥중에 가고, 추하게 그 생을 종말 짓는 것을 보고, 그간 명예롭게 산 것을 다 먹칠하고 가는 생이라고 세인의 입에 회자 되곤 했었습니다. 하여! 우리 모두 단풍처럼 마지막을 아름답게 불태우는 삶을 살다가 갔으면 합니다. 인생 65세는 우리 사회의 공직이나 각 직장으로부터 이미 정년퇴직을 하는 나이라고 하겠습니다. 만 65세가 되는 해에 ‘동사무소’로부터 “귀하는 지하철을 무료로 승차 할 수 있다.” 라는 통지를 받게 됩니다. 반가운 통지가 아니라, 서글픈 통지라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다른 말로하면 “당신은 死線에 들어선 자로서 출발 신호만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라는 말로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사회학적으로는 “당신은 이젠 사회로부터 脫社會化하시오.”라는 말도 되고, 일종의 ‘이탈상태’ 현상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오늘 본문의 말씀 중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하여 좌우편 강도의 경우를 중심으로 <좌우편 강도의 마지막 眞面目>을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2). 본론(Text): ①. 공관복음서의 부조화 문제-마태, 마가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편의 사형수는 다 같이 예수님을 비방했다고 되어있으나, 본문 말씀에는 그 중 하나는 비방했지만, 다른 하나는 회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부조화 문제에 대해서는 비방소리가 너무 커서 두 강도가 같이 비방한 것처럼 들렸다는 학설이 있고, 또는 마태와 마가는 회개한 강도의 이야기는 알지 못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하여간, 외경에 의하면 회개한 강도의 이름은 디스마(Disma), 비방자는 게스타(Gesta)이었다고 합니다.

 

②. 그리스도를 비방한 사형수-23:39-한편의 강도는 유대인이었다는 추측설도 있습니다만, 십자가 주변엔 유대 군중, 대제사장을 비롯한 교권자들 및 로마 병정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조롱하는 분위기에 영합해서 한편 사형수도 덩달아 비방을 하였습니다. 그 고통의 십자가 형틀에 메어 달린 참담한 정황 속에 자신의 잘못 살아 온 인생길을 끝까지 아랑 곳 하지 않는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③. 刑場에서 회개한 사형수- ⑴. 23:40-다른 한편의 마지막 십자가 형틀에 달린 사형수는 그리스도를 비방하는 친구에게 책망하는 언행으로 그의 회개의 말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이는 평안한 침상이었다면 허망 된 꿈으로 점철되었겠지만, 그 고통스런 십자가 형틀이 그로 하여금 적나라한 자신의 험상궂은 모습을 보게 했으며, 드디어 진솔한 회개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일평생 지은 죄도 많은데, 생을 마감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을 비방함으로 가장 큰 죄를 첨가하여 종내 그 무서운 심판을 어찌 감당하겠느냐는 뉘우침의 생각이었습니다.

 

⑵. 23:41-하나님을 향한 근원적인 회개는 자신에게로 선회하여 자아의 죄상을 인정하고, 지금 십자가의 극형도 지난날 자신의 죄악에 대한 당연한 보응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그의 眞面目에서 참된 회개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진실된 회개자의 그리스도관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릴 죄는 고사하고, 어떤 과오도 없는 의인인 것을 증언하게 되는 법입니다. 그는 끝없이 자신을 겸비하게 낮추고, 그리스도를 높이었던 것입니다.

 

⑶. 23:42-그는 그리스도를 비방하는 강도처럼 현세에서 더 살기 위해서 십자가 형틀에서 내려 갈 생각을 하지 않고, 멀리 내세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감히 낙원에 데려가 달라고도, 구원하여 달라고도 하지 못하고, 단지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지극히 겸허한 자세로 기도했습니다. 그는 멀리서 기도한 세리를 연상케 하고 있습니다.(눅18:13)

 

⑷. 23:43-두 사형수에 대한 그리스도의 시각-주님은 강도들 사이에 끼이도록 하여 십자가 형틀에 달리게 한 것은 강도와 같은 저질스런 죄수라는 모욕을 주기위한 것이었고, 당신 자신을 비방하는 사형수에게는 온유한 심정과 침묵으로 일관하였으며, 회개한 사형수에겐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으로 튼튼한 구원의 보장을 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간구하는 것처럼 장래가 아니라, <오늘>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낙원>에 ‘함께’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진실로 놀라운 구원의 보장이었습니다. 이 보장은 그 때, 그 강도에게 限定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원칙인 것입니다.

 

3). 본론(Context): 본문의 말씀은 신약성서에서 누가복음에만 있습니다. 한편 강도는 십자가에서 죽을 때까지 회개하지 않는 완고한 죄인의 반항적 심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 죄를 회개하지 않는 자는 남을 비난하는데 있어서 집요하며, 하나님의 아들까지도 비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강도는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을 보고 예수의 義와 자기의 不義를 알고 이에 마음으로 늦었지만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그의 옆에 강도를 질책하며, 그가 죄를 짓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자기들의 죄를 받게 되는 것은 마땅하다는 것을 고백하고, 자기 죄에 대한 회개의 마음을 표시하고, 예수님은 義人임을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이 강도는 外經에 의하면, 그의 이름이 디스마(Disma)라고 하였습니다.

 

이 ‘디스마’에 대한 전설에 의하면, 그가 富者의 재물을 도둑질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홍길동’이나, ‘로빈훗’과 같은 義賊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의 삶의 목적은 선했으나, 방법이 불의했습니다. 외경 <니고데모의 복음>에 의하면, 이 강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애급으로 도피하는 聖母 마리아를 동료 강도의 손에서 구해 드렸다는 전설이 있습니다만, 세월이 흘러, 그는 과거의 우연한 인연의 연줄이라고 할 수 없는 그 만남의 사건이 지금 이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님을 해후상봉한 것이라고 보겠습니다.

 

적어도 이 ‘Disma’란 도적의 삶을 본문의 말씀과 외경과 그에 대한 전설을 쭉 살펴볼 때에, 이런 분석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산도적질을 한 일생이었지만, 그의 양심의 한가운데는 전부 악으로 물들여진 것은 아니고, 선한 것이 있어서 가난한 사람도 생각 해 줄 수 있는 여유가 있었고, 어린 아기 예수를 뵈옵고, 아름다움의 성스러운 감정도 가졌으며, 아기 예수를 놓아주면서 자비를 베풀 때가 오거든 아기 예수님을 놓아 준 이 시간을 기억해 달라고 한 叡智를 가진 선한 느낌의 소유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말 한대로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7:21) 이 ‘Disma’는 도적들의 소굴이란 組織에서 벗어 날 용기는 없었던 사람으로 보이며, 선한 일도 하면서도 악한 방법에서 탈출을 하지 못하고 그의 일생을 살아 온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이런 짓을 하면 안 되는데”.......하면서(良心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런 나쁜 짓을 하는 버릇과 組織에서 손을 씻을 만한 決斷力이 부족한 사람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비방한 강도는 改悛의 정이 없는 싹수가 노란 사람으로, 최후 마지막 자기 일생의 과오를 씻을 수 있는 기회마저 저버린 자로서의 그의 인간됨의 진면목을 보여 주었으니, 더 이상 말할 필요성이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 기독자들이 타락하여 이런 類의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하는 말입니다. 다만 세상 모든 인생을 향하여, 비록 인생의 종착지가 死線에 서게 되는 경우가 혹여 있을 지라도, 사선의 경계선을 넘지 말고 일말의 선한 마음으로 최후가 <유종의 미>가 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다른 한편의 강도 Disma처럼 육의 생환은 못했지만, 영혼구원의 대상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을 통하여 가슴 깊이 묵상해할 초점은 인생황혼기는 死線에 선 심정으로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하자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인생 석양 길은 반드시 노년기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20대, 30대에도 死線 같은 병마에 시달릴 수도 있고, 40, 50대에 모함에 걸리거나, 판단 착오로 잘못을 범하여 他者에 의해서 死地로 몰릴 수 도 있기에 하는 말입니다. 파란 많은 인생길을 누가 평탄한 길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내 인생이 이것으로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경지에서 그 최후를 아름다운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는 斷然한 각오를 가지고 살자는 것입니다.

 

인간 삶의 깊이를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통찰한 19C. 러시아의 작가 도스토에프스키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28세 때, 제정 러시아 황제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고서, 시베리아 벌판 영하 50도 선상의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서 총살로 사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형장에 사형기둥에 매여서 5분후면 그는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최후의 5분을 어떻게 쓸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2분을 지금까지 살아서 교분하고 사랑한 사람들에게 인사하는데 쓰기로 마음을 먹었고, 또한 2분은 39년이란 짧은 생이지만 생을 정리해 보는데 쓰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1분은 자기가 지금까지 뼈를 자라게 해주고 아름다운 환경을 만들어 준 '자연'을 둘러보는데 쓰기로 했습니다. 이런 생각들을 하는데, 벌써 2분이 지났습니다. 이제 나머지 3분 후엔 죽는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아찔하면서 전신의 경련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사형집행자의 장탄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흰 손수건을 흔들며, 말을 따고 달려오는 황제의 특사가 황제의 사면령을 가지고 와서 사형수 도스토에프스키를 사형에서 시베리아 유형 4년으로 감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살아났습니다.

 

그 후 도스토에프스키는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아무리 괴로움에 찬 생활이라 할지라도 영하 50도 형장에서 사형기둥에 매여 있던 때를 생각하면, 살아 있다는 이 한 가지 사실만이라도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어찌 그만이겠습니까! 극한 상황을 맛본 자는 다 산다는 것에 감격을 느낄 것입니다. 이런 극한적인 조건이 아니더라도 무미건조한 일상적인 생 속에서 삶의 깊이, 의미를 긍정하면서 감사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현하 대한민국의 정국은 혼란에 빠져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제대로 민주주의를 마음먹으면서 시작한 이래, 줄곧 與小野大 정국이거나, 여야 쟁투의 정국이었습니다. <권력의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Balance of Power), 언제나 거기에 비리와 부패가 서식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지금 촛불 집회와 태극기 집회간의 과도한 세력과 욕심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온통 나라를 흔들고 있습니다. ‘힘의 균형’이 없고는 결코 正義가 실현될 수 없다는 R. Niebuhr는 그의 저서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1932년)에 강조 한 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도 힘의 균형이 깨어져서 전형적인 부도덕한 사회이었습니다. 세계를 힘으로 쟁취한 막강한 Roma의 식민지 치하에서 재판을 받고, 강도들 사이에 끼이도록 하여 십자가 형틀에 달리게 한 것도 강도와 같은 저질스런 죄수라는 모욕을 주기위한 것이었고, 갈보리 산상 골고다 석벽 십자가 주변엔 유대 군중, 대제사장을 비롯한 교권자들 및 로마 병정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조롱하는 분위기에 영합해서 한편 사형수도 덩달아 예수님을 비방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Disma 강도는 그러한 불의한 사회구조를 조소하면서 범법행위로 일관했는지는 모르지만, 문제는 그의 삶의 종착역이 아름다웠기에 주님께로부터 구원의 보장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의 주된 관심사는 바로 이 사람에게 있습니다. 우리 역시 死線에 들어선 자라고 생각하면서, 100m 경주자가 출발선에 서서 출발 신호를 기다리는 것처럼, 사선을 떠나라는 신호가 나기 전에 몸단장, 마음 단장을 잘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Disma처럼 주님께로부터 든든한 구원의 보장을 받을 수 있는 회오에 찬 회심의 마음을 가지고 남은 인생을 잘 살자는 것입니다.

 

4). 결론: 거두절미하고, 위의 Disma의 마지막 유종의 미의 생을 거울삼아서, 인생 後半期에 든 분들은 특히(죽음은 어디 마음대로 耳順 이후에 꼭 오리라는 약속이 없기에) 이젠 “천국 갈 준비나 하시지요.”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위의 ‘Disma’처럼 기회를 놓치지 말고, 지난 인생의 삶을 회고하면서 <인생 후반기를 좀 선한 삶을, 좀 남을 배려하는 자기초월적 삶, 讀經과 祈禱생활을 하면서, 悔悟에 찬 인생을 보내는 습관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죽을 준비가 되었습니다.”하는 진지한 삶을, <석양에 지는 해는 더 진하게, 더 붉게 물드는 것>처럼, 좀 그렇게 보람과 의미 있는 삶을 행동으로 이행하면서 살다가 갔으면 하는 의미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인도의 詩聖 타골(Tagore)이 최후의 숨을 거두는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린 詩를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감하고자 합니다.

 

“나는 석별의 정을 나누렵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머리 숙여 인사를 드립니다./ ‘나의 친구들이여! 안녕히 계십시오.’/ 여기, 나의 방문 열쇠를 되돌려 줍니다./ 그리고 나의 집에 대한 모든 소유권을 포기하렵니다./ 다만, 나는 당신들로부터 마지막 친절한 인사말을 바랄 뿐입니다./ 우리들은 오래 동안 절친한 이웃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들에게 준 것 보다 당신들로부터 더 많이 받았습니다./ 이제, 이별을 고할 날이 밝았고, 그래서 나의 어두운 방구석엔 등잔불은 그 빛을 잃었습니다./ 소환장은 이미 도달했고, 나는 나의 먼 여정을 떠날 준비가 되었습니다.” -인도의 시인 타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