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메시아 탄생의 교차된 명암
(마2:1-23, 눅2:1-20)
1). 서론: 불교에서 내려오는 설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보살의 집안에 예쁜 여인 하나가 손님으로 찾아왔습니다. 하룻밤을 재워줄 것을 부탁하는 그 여인에게 집주인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대답하기를 “나는 집에 복을 갖다 주는 천신입니다. 재물과 부귀와 장수를 주는 천신입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집주인은 그 여인을 기꺼이 맞아들이며 말하기를 “어서 들어와 얼마든지 쉬십시오.”라고 반가이 맞았다고 합니다.
여인을 맞아들이자마자, 또 다른 여인 하나가 문을 두드리며 말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집에다 재앙을 가져다주는 악신입니다.” 그 주인은 추악하게 생긴 그 악신에게 “악신은 들어오지 마십시오.” 그러자, 그 여인은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쌍둥이 형제입니다. 천신 혼자만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천신이 있는 곳이면, 악신인 나도 함께 들여가야만 하는 것입니다.”(二身同體라는 뜻으로)라는 말을 하였답니다. 이는 호사다마(好事多魔)에 대한 뜻풀이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메시아 탄생의 찬란한 광채가 비쳐지니, 악마의 시샘과 모함으로 어둡고 비통한 면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2). 본론(Tex): 구약성서는 장차 메시아가 탄생하리라는 약속의 말씀들이었고, 그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제사 때마다 무수한 어린양들이 희생의 제물이 되어 왔습니다. 오늘 여기 본문 말씀 속에는 메시아 탄생과 더불어 이 세상에 광명과 새 생명을 주어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구세주로 인한 헤롯의 시기와 음모 때문에 천진난만한 어린 생명들이 사지로 몰리 엇으며, 아기 예수는 악의 세력을 피하여 애급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메시아 탄생의 명암(明暗)이 교차(交叉)되는 면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먼저 밝음 면에는 동방박사들의 경배와 예물드림은 인류를 대표한 구세주 탄생의 기쁨과 환영의 표시였습니다. 누가복음서에는 구세주성탄을 처음으로 뵙게 된 자들이 목자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을 상대한 마태복음서에는 이방인의 특정계급인 동방박사를 구주성탄 처음 경배자로 묘사했다면, 이방인을 상대로 한 누가복음서에는 유대인의 서민 목자들이란 것을 재미있게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동방박사들 보다, 목자들이 최초로 메시아 탄생에 대한 경배자라는 것은 함축성 있는 의미라고 보겠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는 특정계급에 속한 자들을 우선적으로 구원하기 보담도, 평범한 서민계급의 아픔과 고달픔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였든 유대 교권자나 지도자들을 제외하고 의외의 곳에서 환영을 받으신 메시아의 성탄은 불신으로 말미암은 유대인의 비극적인 서곡이었던 것입니다.
그다음 어두운 면으로는, 유대 헤롯 왕의 음해이었습니다. 특정 계급의 최정상의 상징은 왕이라고 하겠습니다. 헤롯대왕은(눅1:5) 에돔사람 안티파텔(Antipater)의 아들이며, 그는 탁월한 지략과 용기의 소유자로 유명한 폭군이었습니다. 헤롯은 주전 40년에 로마 ‘안토니오와 씨자’에 의해서 유대의 분봉 왕으로 임명되어 37년에 취임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헤롯성전을 건축한 자이며, 그와 그 자손의 가정생활은 불륜(不倫)으로 점철되었으며, 이를 규탄한 것으로 인하여 세례요한은 의로운 죽음을 죽게 되었습니다.
이런 자이니, 메시아 탄생을 가장 극렬하게 시기하여 그 모함의 결과는 죄 없는 어린 생명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인간사 상투적인 이치로 호의호식하면서 희희낙락한 힘 있는 세력들은 그 자리를 고수하기 위해서, 거슬리는 상대자나 도전자로 생각하면 여지없이 짓밟는 것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당연지사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사이니 더더욱 메시아 탄생은 절실히 요청되는 이유였던 것입니다. 간악한 헤롯분봉 왕은 남에게 준 손해는 생각지 않고, 남에게서 받은 손해만 생각한 나머지,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2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인 악행의 용의주도한 수법을 감행하였습니다.
이를 두고 구약성서의 예레미야 31장 15절에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 도다.”를 본문에 처참한 참상을 미리 예언한 것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라마’는 베냐민족의 고을이며(수18:25), 예루살렘 북쪽 5마일 지점으로서, 바벨론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이 이곳을 통과한 지역이었으며, 라헬은 야곱이 가장 사랑하던 아내로서 요셉과 베냐민의 어머니이었습니다.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산고(産苦)로 죽어서(창35:16~19), 야곱은 그를 베들레헴 길목에 장사하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서 정복당하고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베들레헴 그 길목에, 일직이 야곱이 사랑하던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운명한 그 땅에, 조국의 비극적인 사연과 더불어 한 여인의 애닮은 비애가 수많은 세월이 흐른 즈음에, 베들레헴 인근의 수많은 라헬들의 통곡 소리가 애간장을 녹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남의 가슴을 그렇게 찧어놓은 악마의 상징인 헤롯은 평안히 죽을 수가 없는 것이 당연지사가 아니겠습니까! 그의 수명 70세 즈음, 통치 38년 만에 ‘여리고’에서 극히 무섭고 더러운 병에 걸려 그 내장이 썩어져가면서 죽었다고 합니다.
3). 본론(Context): 아기 예수 그리스도 탄생 그 당시 때, 동방박사와 들의 목자들은 거룩함과 선의(善意)의 밝은 표상이었다면, 헤롯의 증오와 적의에 찬 반동과 제사장과 서기관들의 무관심이 바로 어두움의 표상이었습니다. 오늘날도메시아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교회와 우리 삶속에 성령을 통해서 임재(성탄) 해 오실 때, 위의 두 가지 명암이 교차하는 것을 우리는 자주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감격케 하여, 감사할 때, 거기엔 반드시 사탄의 시험이 동반하기 마련입니다.
신약성서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그 일예는 거룩함과 의로운 길에서 사탄의 길로 가버린 ‘가롯 유다’라면, 밤에 예수님을 찾아 온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대한 경원(敬遠)과 자기 신분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비겁함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고서, 그 어떤 고난과 위험을 감수하겠다고 의연하게 나선 그의 모습 속에서 그 명암의 대조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다메섹’ 도상의 사울에서 이방인의 복음 전도자 바울에게서, 그 명암의 실례(實例)를 들 수 있겠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의 롬7:15~8:2까지의 그의 절규에서, 기독자인 우리자신들의 명암을 보게 될 뿐만 아니라, 솔직히 우리들의 생이 성속(聖俗)과 선악(善惡)의 쌍곡선(雙曲線)을 그으면서 사는 인간실존을 그대로 고백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이것을 무엇이라 정의해야 좋을지 모르지만, 우리 안에는 두 개의 본능이 있어서 갈등하는 것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중인격적인 선악의 기로에 선 내적투쟁이라고 흔히 말하고 있습니다.
페르시아의 귀족 아라스퍼스(Araspes)는 "오오 키루스여! (우리가 잘 아는 ‘고레스’왕으로페르시아 언어로는 키루스(Cyrus)이며,히브리어 음역의 그 뜻은 '태양처럼 빛나는 자'란 의미인데, 페스시아 대제국을 건설한 인물) 나는 두 개의 혼을 가진 것으로 확신한다. 만일 내가 한 개의 혼을 가졌다면 어찌하여 미덕과 악덕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으며, 염원과 혐오하는 바가 같은 일일 수 있느냐.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개의 혼을 가졌음이 분명하다. 좋은 혼이 지배할 때 나는 고귀하고, 나쁜 혼이 지배할 때는 악을 행하게 된다." 라고 한탄했다고 합니다. ‘아라스퍼스’는 바울과 함께 도덕적 각성에 선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이를 그리스 철학적 관점에서 해석하려고 했고, 바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근본적인 뜻을 밝히려고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개가(凱歌)를 불렀으나, 그러나 그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칭의’(稱義)를 의미합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매순간마다 성령을 근심시키게 하는 사탄의 유혹은 끊임없이 도전해 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장~11장까지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한 원죄는 속량 받은 교리를 설명하면서(Justification), 12장~16장까지는 우리 삶의 평생을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노력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부단히 ‘거룩함’에로 성장하는 우리들의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헨델의 그 유명한 <오라토리오 메시아>가 탄생하기까지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의 명암(明暗)이 교차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1741년 겨울 어느 날 밤, 어두운 런던 거리 한 모퉁이에 지친 다리를 끌며 흐느적거리면서, 걸어갈 수밖에 없는 병들고 늙은이가 되었습니다. 지난 40여 년 동안 그는 영국과 유럽 일대에 걸쳐 하늘 꼭대기를 찌르는 명성을 누려온 대 작곡가였습니다. 새로운 곡이 발표될 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갈채를 아끼지 않았고, 명문 귀족들은 서로 시샘하듯 그를 총애했으며, 왕실(王室)에서도 그에게 온갖 명예를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보잘것없는 길거리의 돌멩이처럼 그들 모두에게서 내팽개쳐진 신세가 되고 만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날그날의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의 빈궁 속에 빠져 버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뇌출혈을 일으켜 오른쪽 반신이 마비상태가 되었고, 걷기는커녕 영감이 떠오를 때도 손을 움직여 음표(音標) 하나 그릴 수 없게 되고, 병세는 절망적인 상태이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독일의 <악스 라 샤펠>이라는 온천장에 가서 목욕을 하는 중에, 신기하게도 병세가 갑자기 차도를 보이기 시작하여, 무기력한 근육에 생기가 들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손과 발을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끔 되었다고 합니다.
재생(再生)의 환희! 그는 피어오르는 창작열에 도취되어 연달아 네 편의 오페라를 작곡하여서, 사람들은 다시 그에게 갈채를 보내 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마치 장마철의 햇볕처럼 잠시 반짝이다 구름 속에 가리어진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열렬한 후원자 캐롤라인 여왕이 작고한 뒤로부터 수입이 점차 줄어들게 되어, 빗만 쌓이게 되었고, 창의력도 의욕도 감퇴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산책에서 돌아와 보니, 책상 위에 소포 한 덩어리가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조금 이상스럽게 생각하면서 그 소포를 풀었습니다.
내용물은 시인 찰스 ‘제넨스’로부터' 보내온 성담곡(聖潭曲-Oratorio)의 가사이었다고 합니다. 헨델은 그 가사뭉치를 훑어보면서 투덜거리기를 “방자스런 녀석! 이류시인인 주제에”하면서, 그를 멸시하고 자신은 모멸감에 사로잡혔다고 합니다. 가사 뭉치 속엔, “이 가사에 붙여 작곡을 착수해 주기 바란다고 덧붙여 쓰여 있었으며, 이 가사는 주께로부터 말씀이 있었다.”고 씌어 있었다고 합니다. 헨델은 다시 한 번 분통을 터뜨리며, “아니, 그래 뻔뻔스럽게도 제까짓 놈에게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셨다,”고 그를 여지없이 경멸하면서, 자신은 오만방자한 교만에 사로잡혔다고 합니다.
심히 불쾌한 마음으로 그 오라토리오의 가사 원고를 뒤적거리다가 헨델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이상하게도 가슴에 찔러 오는 대목에 얼핏 눈을 파고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버림을 받았다. 그는 자기를 불쌍히 여겨 줄 사람을 찾았건만 그럴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를 위로해 줄 사람은 아무데도 없었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만 같은 그 구절에 갑자기 친근감을 느끼면서 헨델은 원고를 계속하여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믿었도다. 하느님은 그의 영혼을 지옥에 버려두지 않으셨도다. 그가 너에게 안식을 주리라."
그로부터 헨델은 그 글자 한마디마다 마치 영혼이 있어, 구구절절이 살아 움직이는 뜻한 감동으로 그 원고를 다시 찬찬히 읽어 내려가니, 말 한마디 글자 하나가 새로운 의미를 지니고 빛나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현명한 지도자, 나의 구주가 살아 계심을 나는 알도다. 기뻐하라, 할렐루야!” 그 순간 헨델은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전율에 몸을 부르르 떨었으며, 옛날의 정열이 다시 불붙어 오름을 느끼면서, 마음속에서는 놀랄 만큼 아름다운 멜로디들이 잇달아 샘솟아나는 듯하여, 헨델은 황급히 펜을 찾아 들고, 그 자리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악상이 떠오르는 대로 마구 휘갈겨 채보(採譜)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놀랄 만한 속도로 음표가 오선지(五緯紙)를 메워나가게 되었고, 다음날 아침 남자 하인이 조반상을 들여올 때까지도 그는 책상 위에 엎드려 일을 하고 있었으며, 그는 날이 밝아 아침이 된 것도 조반상이 들어와 있는 것도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아 보였다고 합니다. 충성스런 하인의 권고에 따라 빵을 집어 들긴 했으나, 일에 정신이 팔려 있는 그는 그 빵을 입으로 가져가기 전에 연상 손으로 부스러뜨려 마룻바닥에 떨어뜨리곤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정신없이 악보를 그리다가는 미친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방안을 큰 걸음으로 왔다갔다 서성거리기도 했답니다.
때로는 팔을 쳐들어 허공을 후려치기도 하고, 큰 목소리로 우렁차게 “할렐루야 ! 할렐루야!”를 부를 때,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나는 일직이 그분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본 일이 없어요." 헨델의 하인은 나중에 이렇게 술회하면서, "나를 빤히 바라보시는 것 같은데, 그 눈에는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어요. 하늘나라의 문이 열린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바로 거기 계신다고 소리치기도 했지요. 그분이 정신을 잃은 것이 아닌가. 더럭 겁이 날 정도였다니까요." 무려 24일 간이나 그의 그러한 광란적 망아(忘我) 상태가 계속된 후에, 위대하고 성스런 <Messiah>가 탄생되었다고 합니다.
헨델이 자신의 오만방자한 교만에 계속 집착하였다면, 성령의 감동감화를 받고 쓴 ‘제넨스’ 시인의 Oratorio 가사를 무시했다면, 위대한 <메시아>는 작곡될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지금도 우리들 마음속에 성령의 인도하심의 밝음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사탄의 어두운 흑암이 세력이 엄습하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두운 악의 세력을 용허하시는 것은 찬연(燦然)한 광명과 능력의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4). 결론: 지금도 부단히 매 순간마다 우리 앞에 신앙의 명암(明暗)이 가로 놓여서, 우리 자신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현실도피나 체념이 아닙니다. 믿음은 현실 속에서 살려는 의지의 결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쉽게 단적으로 말해서 <결단>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에 대한 신앙적 결단의 삶이라고 이름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말도 됩니다. 오늘도 주님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들 가슴에 성탄 해 옵니다. 첫 성탄 밤의 목자들과 동방박사들처럼, 밝은 면의 삶을 그리스도께 보여드리는 우리들의 생애가 되기를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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