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우물가 여인의 新生
(본문: 요4:3-42)
1). 서론: 우물가의 이 사마리아 여인과 그리스도와의 대화는 요한복음의 11개 대화중에 하나로써, 單純하면서도, 신기로운 감 없이, 읽지 못할 대화입니다. 현대 실존주의 문학작품에 나타나는 대화에는 赤裸裸한 인간 모습을 그리려고 했습니다.(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허무와 절망ㆍ불안ㆍ초조 속에서 고립된 인간이 극한 상황을 극복하여 진정한 인간상을 확립하고, 잃었던 自我를 발견하고자 하는 문예사조를 말함.)본문의 우물가의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를 인간실존 모습을 그대로 露呈하고, 모든 것을 초월하면서도, 가장 단순하면서도 신비감을 주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이끌어 신앙으로 인도하는 신비인 것입니다.
창24:17에 아브라함의 종인 ‘엘리에셀’이 하란의 우물가에 앉아서 물 길러 나온 ‘리브가’에게 “물 좀 달라.”고한 고사를 방불케 합니다. 엘리에셀이 무명의 處女에게 ‘물 좀 달라.’고 함으로서, 아브라함의 집 가문을 이을 선민의 어머니로 삼았다면, 본문의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 좀 달라.”고 함으로 이 타락한 여성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막9: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자라고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말씀처럼, 예수님께 물 좀 바치는 사람은 복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주목할 만한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2). 본론(Tex): ①. “사마리아를 통행해야 하겠는지라.”- 지리적으로 사마리아는 유대와 갈릴리 중간 지점에 있으므로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시간적으로도 유대를 떠나서 빨리 가기 위해서는 이 접경지역인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된다는 뜻도 있습니다. ②. “수가라 하는 동네”- 일반적으로 구약의 야곱의 딸 ‘디나’가 욕을 본 하몰의 아들 ‘세겜’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창33:19, 창34:1-31, 행7:16 참조) 다른 견해로는 세겜 땅 동남쪽 2마일에 있는 현재의 아스갈(Askar)이라는 동네라고 합니다. ‘수가’라는 말 자체의 뜻은 <술 취한 성> 또는 <누운 성>이라는 뜻입니다.
③. “사마리아 여자”- 여인의 신분 자체가 천하여 멸시를 받았으며, 그녀는 사마리아 혈통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선 높은 지위의 부인들은 물 길으러 나오지 않으며, 당시 풍속으로는 저녁때에 부인들이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물 길으러 나오는 법인데, 대낮에 물 길으러 나온 것을 보면 그녀의 개인생활의 短點이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④.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가로되’(λέγει)-일반적으로 입으로 또는 글로 말한다, 표현한다, 이야기 한다, 특수한 의미로 묻는다, 대답한다, 이른다, 주장한다, 선포하다, 보고하다, 부른다. 의 여러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말한 것에 주목을 끌기 위할 때 쓰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4:9), 대답하고(4:9), 그리고 순종하여 따른다(4:16, 28)는 함축된 對話의 뜻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좀 달라.”고 하심에 여인의 반응의 말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⑴.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길가에서 자기 아내에게도 말하는 것을 주저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물 좀 달라’고 말을 한 것에 이 여인은 자신과는 큰 간격이 있다는 感情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⑵. BC. 722년 ‘앗시리아’에게 포로 되었을 때, 남아 있었던 유대인들이 그 땅에 이주해 온 이방인과 더불어 混血됨으로써, 그들의 혈통과 신앙이 물란 해졌으므로, 유대인들은 그들을 미워하여 교제하지 않았고, 통행할 때, 北갈릴리에서 南 유대지방으로, 남에서 북으로 갈 때, 요단강 건너편 베리야지방을 迂回하여 다녔습니다.(왕하17:24, 스4:2 참조)
⑤. “하나님의 선물”- 生水를 의미한다는 뜻입니다. ⑴. “선물”(δωρεά) -풍족한 恩賜, 자유롭고 귀중한 은사를 말합니다. 신약성서에서는 성령의 은사(행2:28, 8:20), 속죄의 은사(롬5:15, 고후9:15), 각종의 은사(엡3:7, 4:7, 히6:4) 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⑵. ‘生水’는 고여 있는 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水源에서 솟아나는 물과 마르지 않는 물을 가리키며(창26:19), 언제나 새로운 물로서(레14:5),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뜻합니다.(슥14:8, 렘2:13) 이는 聖靈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3). 본론(Context): 예수님께서는 行路에 피곤도 하셨지만, 길 잃은 어린양을 찾아서 우물가 이 여인과 對話를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反語法(소크라테스의 産婆術처럼)으로, ①.‘물 좀 달라’고 상대를 복음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먼저 말을 걸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意圖的인 接近이었습니다. ②.여인이 대답하기를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 좀 달라고 하나이까.”라고 對應했습니다. 이 여인은 요구하는 물보다, 사마리아 女人인 자기에게 말을 건네는 그 자체를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 유대사회에도 남녀 7세 不同席이었다고 합니다. 하물며 길거리에서 자기 아내와 말하는 것도 주저했다고 합니다. 또한 이미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BC. 722년 ‘앗시리아’에게 포로 되었을 때, 남아 있었던 유대인들이 그 땅에 이주해 온 이방인과 더불어 混血됨으로써, 그들의 혈통과 신앙이 물란 해졌으므로, 유대인들은 그들을 미워하여 相從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여인은 예수님을 유대인으로 보았고, 자신은 사마리아 여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③.주님께서‘여인아! 그대가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선물=생수=성령의 은사=행2:28, 8:20, 10:45, 11:17 등), 말하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았다면, 그런 말 보다, 내게 생수를 구하였을 것이고, 그러면 내가 주었을 것이다.’라는 의미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타락하여 고뇌 속에 살아 온 여인을 영적 세계로 인도하시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④. “어디서 이런 생수를 얻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영적 의미로 말씀하심에, 여인은 육적 의미로 대답했습니다. 마치 요3장에 니고데모의 대화처럼 靈肉의 交叉線을 보게 됩니다.(交叉線은 福音書 전편에 흐름)
여인은 이상한 이 나그네에게 존경심이 생겨, ⑤. “주여” 라고 불렀으나, “물길을 그릇도 없이 어찌 그 깊은 우물물을 얻겠으며, 나아가서 이 우물을 준 조상 야곱보다 크냐.”고 물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이 여인은 육적인 사람이요, 조상을 자랑하는 단순한 사람이지만, 주님은 이런 자를 버리거나, 無視하지 않으셨습니다. ⑥.예수님께서 “이 우물물을 먹는 자 마다 다시 목마르지만,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여인의 比較級으로 ‘야곱 보다 크냐.’에 대한 예수님의 比較級으로 답변을 하신 것입니다.
갈증을 느낀 사람에겐 물을 좀 주면 , 그 갈증이 점점 심해지는 것처럼, 세상의 재물, 명예, 권력, 지식 등이 인간에게 만족을 주지못 할 뿐더러, 더 큰 불만으로 전개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가 주시는 물은 기독자의 뱃속에서 언제나 솟고, 그 결과는 영생에 이른다는 말씀입니다. ⑦.여자가 가로되, “이런 물을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물 좀 달라.’고 한 것에서 이젠 여인이 예수님께, 要求를 하게 되어서, 대화의 큰 변화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여기까지도 물질적인 요구였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영적 근원적인 것보다, 지엽적인 물질적 요구를 먼저 구하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성 ‘베르나드’가 말한바와 같이,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단계”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⑧.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셨습니다. 영원한 生水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해결할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돌연한 말씀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엄습해 들어갔습니다. 여인은 등골이 서늘했을 것입니다. 양심에 놀람이 없이 중생은 시작되지 못하고, 회심 전에는 참 신앙 길에 들어서지 못하는 기독교의 특색이 있다는 것입니다.⑨.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이는 그녀의 중심이 動搖되는 始初였습니다. ⑩. 예수님은 “네 말이 옳다!, 그러나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도 아니다.” 여인의 黑幕과 密語가 낱낱이 폭로되는 순간이었습니다.(그러니 남편이 전부 6명이 되는 셈임.)
⑪. “주여! 내가 보니 先知者로소이다.” 여인의 경탄과 ‘내가 보니’는 주님에 대한 통찰력을, ‘선지자’라는 것은 미래를 예언하는 자라는 고백입니다. 이 여인은 자기의 아픈 곳을 속속들이 후벼 파서 끄집어내는 주님 앞에 그간 가슴 속에 응어리진 것이 눈처럼 녹아내리는 순간에,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⑫.그래서 물동이를 던져버리고 동네로 뛰어가서, 어떤 수모도, 비난도 다 송두리 채 받겠다는 심정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자기 신앙의 간증과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 야화에, ‘우물가의 여인’에 대한 재미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선조 태조 이성계의 계비(繼妃=2번째 부인)이었던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의 이야기입니다. 고려 말 권문세가인 판삼사를 지낸 상산 부원군 강윤성(康允成)의 딸이었다고 합니다. 이성계가 호랑이 사냥에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는데, 마침 우물가의 한 여인이 물을 긷던 중이어서, 이성계는 여인에게 “낭자! 물 한 바가지만 주시오.” 하니까, 놀란 처녀는 고개를 숙이고 바가지에 물을 뜨고서는 버들잎 한 줌을 띄웠습니다.
화가 난 이성계는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게 무슨 짓이요.”, 이에 낭자가 다소곳이 말하기를, “물을 급히 드시면 목이 막힐 것이오니, 버들잎을 불어가며 천천히 드시라.”는 말에, 이성계는 그녀의 지혜와 미모에 감탄해 한동안 넋을 잃었다고 합니다. 이 신덕왕후 슬하에 방번, 방석 2남과 경순공주를 두었는데, 태조의 총애를 받아 조선 건국 후, 현비(顯妃)로 책봉되어 조선 최초의 國母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물가의 여인들은 이렇게 지혜가 돋보여서 복을 받은 모양입니다.
지금까지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의 말씀을 묵상하기 위해서 부연(敷衍)해왔습니다. 인생의 갈증엔 두 가지가 있는데, 外的渴症과 內的渴症입니다. 외적갈증은 임시방편으로 치유가 되나, 내적 갈증을 치유치 못하고서는 영원한 기갈 속에 헤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한 예수님은 현대적인 의미로 말한다면 전문적인 Counsellor였습니다. 重生의 경지까지 가는 데는 먼저 심리적으로 內面世界의 억압된 정서감정을 치유가 되어야한다는 말입니다.
이 우물가의 여인은 “남편을 불러 오라!”는 예수님의 정곡에 찔리어 그간 억압되었던 불유쾌한 감정과 수모를 받아 오던 부정한 여인이란 悲哀가 일시에 복받쳐 끓어올랐고, 그 불유쾌한 감정을 스스로 수용(Acceptance)하는데서 새사람이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간 한 번도 자신의 누추한 인생 행적을 받아 들리지 않고, 反抗만 해 왔던 여인이었습니다. 부모와 남편 5명이나 갈아치우면서 살아온 자기 인생 탓을 전부 他者에게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던 여인이었습니다.
相談者이신 예수님과 來談者인 여인간의 진솔하고 진지한 만남 속에 정서감정의 묵은 찌꺼기가 맑게 처리되었습니다. 위에서 제가 예수님께서 ‘물 좀 달라.’고 한 것은 이 여인을 구원하기 위한 의도적인 접근이라고 했습니다만, 이 여인은 예수님과의 대화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잘못을 냉철하게 비판할 수 없었고, 자신의 과오를 몰랐던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안에 있는 상한 감정이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적치유(內的治癒)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기 안에 있는 문제를 먼저 끄집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대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이란 것으로 덮고 있기에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문제는 예수님께 나아갈 중요한 道具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어릴 때, 상처받은 묵은 찌꺼기, 살아오는 과정 속의 대인관계속의 쓴잔들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얻어야만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것보다 먼저 先行되어야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 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우리가 주님께 드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 출발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톨릭교회의 신부에게 告解聖事를 하는 것은 교리적인 문제보다, 속속 깊이 자기 응어리의 감정을 토해 낼 수 있다는 相談的인 次元에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신교 교인이 더 二重人格者가 많다는, 그것도 신앙의 根本主義者들에게 더 많다는 것은 외면적으로는 신앙의 빌미로 덮어버리고, 내면적으로는 숨은 가식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는 이유에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주님께 솔직히 기도를 해서, Augustine처럼, “내 마음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얻을 때가지, 평안이 없었나이다.”라는 고백이 있기를 바라며, 모쪼록 마음의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每事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4). 결론: 예수님께서 이 사마리아 여인을 구원키 위해서 그 녀가 가지고 있는 내적 갈등과 고민을 치유키 위해서, “물 좀 달라.”고 하셨고, 그녀의 내면에 응어리를 풀기 위해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셨습니다. 이 돌연한 말씀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엄습해 들어가서, 여인의 등골을 서늘케 하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양심에 놀람이 없이 중생은 시작되지 못하고, 회심 전에는 참 신앙 길에 들어서지 못하는 기독교의 특색인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新生을 위해서, 중요한 것은 이 여인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문제를 먼저 끄집어내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오늘날 대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이란 것으로 덮고 맙니다. 우리가 가진 문제꺼리를 예수님께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릴 때, 상처받은 묵은 찌꺼기, 살아오는 과정 속의 대인관계 속의 쓴잔들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얻어야만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먼저 先行되어야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 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우리가 주님께 드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 출발인 것입니다. 기독자들 중에는 二重人格者가 많다고들 합니다. 그것도 신앙의 根本主義者들에게 더 많다는 것은 외면적으로는 신앙의 빌미로 덮어버리고, 내면적으로는 숨은 가식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는 이유에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주님께 솔직히 기도를 해서, Augustine처럼, “내 마음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얻을 때가지, 평안이 없었나이다.”라는 고백이 있기를 바라며, 모쪼록 마음의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年末年時가 되기를 바랍니다. 끝
'04. 신약설교마당(135)'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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