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박물관열람실(72)

31. [스승의 날에 즈음하여]: “恩師 李相根 목사님의 사랑”

solomong 2025. 5. 14. 10:27

 

31. ​“恩師 李相根 목사님의 사랑”

-스승의 날에 즈음하여-

목사님! 제가 스승님을 처음 멀리서 뵌 적은 아마 1950년대에 대구 대봉교회 목회하실 때 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 때 저는 경대사대부고 학생이었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서 모 교회인 대구 제일교회 주최 양도천 목사님의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고, 매일 대봉교회(거리 관계로)에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여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들었으며, 목사님의 명성이 높아지는 것을 알고, 비로소 목사님에 대한 흠모의 정이 더욱 간절하여 수요, 주일 밤 예배 목사님의 설교를 듣기 위해 대봉교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기억하건데, 그 때가 미국 뉴욕 비브리칼 신학교 석사학위를 마치시고 귀국한 때라고 생각이 됩니다.

때는 6. 25 사변 이후라, 저의 집이 가난하여 대학에 갈 수 없어서, 공군사관학교에 특차로 시험을 쳐서 필기시험에 합격하였지만, 신체 정밀검사에 불합격하여, 대학 일차시험도 지나고, 제이차시험만 남은 때였습니다. 그래서 서울 신흥대학교(지금 경희대학교)에 합격하자, 모교 선생님들이 입학금을 마련하여 법과대학 법학과에 1년을 다닐 수가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장래 진로 문제에 회의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자유당 정권이라, 권력과 부의 힘이 아니고는 사나이의 꿈을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 재정문제로 대구신학교(영남신학교 전신, 대구 제일교회에서 야간신학교로 출발)옮기고 말았습니다.

스승님과의 첫 해후상봉(邂逅相逢)은 영남신학교 졸업반 때라고 기억합니다. 졸업논문관계로 스승님을 첫 대면했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그 때, 군문에 있으면서 야간신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그간 대봉교회에서 목회하시다가, 다시 도미하여 달라스 신학교에서 <기독교와 불교에 대한 비교연구>로 신학박사 학위(전공은 신약학)를 받으시고 귀국하여 대봉교회 얼마 목회하시다가 제일교회로 이목(移牧)하여 얼마 되지 않은 때, 제일교회에서 저의 결혼 주례를 해 주신 이후로 저의 대한 관심과 배려가 깊어 가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군에서 제대 하자마자, 대구제일교회 남 전도회 전도사로 1962년 2월 1일자로 봉직하게 되었지요.

제가 계명대학교 철학과에 편입시험에 합격하자, 목사님께서 적극적으로 전도회 임원들에게 설득하여 낮으로 학교 공부한 이후에 전도부 회원 심방과 전도하라고 배려 해 주신 분도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렇게 철학과를 졸업할 수 있었던 것도 목사님의 은덕이었습니다. 그 후 부목사(副牧師)님이었던 김보생 목사님께서 안강교회로 단독 목회자로 가시자, 얼마든지 부목사를 다른 젊고 목사님을 보필해 줄 목사들이 즐비해 있었지만, 저는 27세에 불과하고, 목사도 아닌 저를 ‘픽업’하셔서, 교회전도사로 부목사 일을 맡게 해 주셨습니다. 그 때 제게 말씀하신 것은 “나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당장 모교에서 신학교 교수로 일했다.”라고 하시면서, 26세에 목사 안수를 받은 젊은 목사로 사역출발을 하게 되었다는 말씀으로 저를 격려 해 주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그 당시까지도 몸이 연약하여 자주 편치 않으셨고, 그래서 자주 제가 주일새벽기도회까지 설교(보통 새벽기도회 인도는 월-토까지는 제가, 주일 새벽은 목사님께서 맡으셔서 (제직들이 많이 참석하여 근 100여명이 넘었음)하게 되었지요. 저는 그 때 너무 목사님의 배려에 황감해서, 새벽기도회 10분정도 설교준비를 위해 밤12시 이전엔 자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는 제자 훈련을 철저히 해 주신 덕분인 줄 압니다. 어떨 때는 공식 새벽기도회 30분 후, 어쩌다 개인 기도도 같은 시간에 마치고 집으로 갈 때, “ 양 전도사! 오늘 새벽 설교는 착상과 구성, 통찰과 깊이가 있는 내용이니 조금 살을 붙이면 좋은 설교감”이라고 등을 두드리시면서 칭찬해 주시곤 했을 때가 지금 생각하니 정말 행복하고 기쁜 순간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대구에서 서울 장신대(광나루) 신약학 강의 때문에 교회를 격주인가 비우게 되며, 또 피곤하셔서, 자주 수요 기도회와 주일 밤 예배 설교를 애송이인 저에게 맡긴 것도 그만큼 저를 믿었다고 봅니다. 아니! 특별히 배려하신 제자 훈련이었습니다. 보통 매월 첫 주일 밤 각부 헌신예배로 오시는 강사목사께서도, 제일교회 강단에 서면 "떨린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 만큼 스승님은 한국교회의 설교에 있어서 제일인자, 설교가 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연대, 이화여대의 수양회 인도, 서울 영락교회를 비롯한 새문안교회 등지에서만 부흥회를 인도하셔도 건강유지와 바쁜 시간을 스승님은 <세월을 아끼면서> 사셨던 목사님이었지요.

은사 목사님 기억하십니까! 교역자 아침 기도회 후, 저 혼자 좀 남으라고 하시면서, 목사님의 서재(書齋)에서 사모님을 제하고서는 제일 먼저 일급비밀인, 새문안 교회에서 목사님을 새문안 교회로 오시라는 청빙이 왔다고 하시면서, 제에게 말씀해 주시던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만큼 제자를 사랑하셨고, 믿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은 “양 전도사가 목사 안수만 받았다면, 맡기고 훌쩍 새문안교회로 갈 것인데.......”라고 하신 말씀 이 제자는 지금도 목사님의 따스한 사랑의 체온을, 인자하신 목서님의 음성이 귀에 쟁쟁합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서재는 바로 저의 개인 목회학과 설교학을 가르쳐 주시던 강의실이었던 것도 잊지 못할 목사님의 자애(慈愛)이었습니다.

은사 목사님! 제가 은사님 슬하를 떠나서 농촌목회 3년을 시킨 것도 목사님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농촌교회 단독목회로 때날 때의 제게 하신 말씀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7, 8활이 농촌이고, 한국을 이해하자면 농촌을 알아야 하고, 농촌을 알기 위해서는 농촌교회 목회 경험도 해야 하다.”라고 하시면서, 목사님께서는 해방 후, 경북 옥계(玉溪) 농촌교회를 목회하신 경험을 말씀해 주시던 것도 생생합니다. “목사는 조용한 농촌 교회에서 그들의 아픔을 이해해야 하며, 비교적 농촌교회 목회는 한가한 시간이 많으니 공부도 하면서, 목사 자신은 고독한 중에 자연을 벗 삼아 묵상(기도)하는 중에서 깊은 말씀의 도리를 깨닫게 되고, 또 그 외로움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같이 하는 시공(時空)이라”라고 하신 말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 경중노회(의성, 탑리제일교회)에서 목사 안수식의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고, 섭섭해 하시면서 꾸중하시던 목사님의 사랑에 감읍했으며, 탑리제일교회 담임목사 취임예배엔 그 바쁜 목사님의 시간을 할애하시어서 애정 어린 설교를 해 주시던 것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시골목회 3년이 지나자, 다시 대구 신명여고 교목으로 불러 주신 것도 목사님이었습니다. 그 때 전화를 받고서 그 밤을 우리 내외는 지새웠던 것도 은사님의 깊으신 헤아림과 이 제자를 키우시는 방법에 말 할 수 없는 목사님의 뜻이 있었던 것을 지나고서야 깨달은 부족한 제자이었습니다.

신명여고 교목 5년 말미에 목사님을 뵈옵고, “평안히 잡힌 자리에서 생을 구가 예찬하는 것보다, 원대한 꿈을 가지겠다.”라고 말씀 드리면서, 도미유학의 뜻을 말씀 드렸을 때, 스승님은 미국의 각 신학교 주소를 적어 주시면서 입학신청서를 여러 곳으로 보내라고 격려해 주시던 은혜도, 그리고 제일교회에서 도미유학 여행비, 생활비 일부까지 대구역 구내까지 교인들과 같이 오셔서 주셨던 그 사랑과 은혜를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귀국 후는 영남신학교 교수로, 교무과장으로 직무를 맡기시면서, 전교 학생들에게, “나는신학교 교장이지만, 목회와 성서주해 집필에 바쁜 몸이라, 교무과장 양 교수를 날 대하듯이 하라.”라고 경건회 시간에 말씀하시던 것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더 크기 위해 계명대학교 교수로 옮기게 하신 것도, 목사님의 크신 계획이 있었지만, 영남신학대학 학장을 생각하시면서, 언질을 3번이나 말씀하시던 것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계명대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으로 인한 의(義)의 투쟁때문에, 병원에 입원하신 병 문안도, 발인예배도, 그 어떤 은사 목사님이었는데, 배은망덕하게도 참여하지 못했던 이 불초한 제자의 죄를 두고 두고 자책하고 있습니다. 그 토록 이 종을 위해 배려하고, 키워 주신 스승님의 은혜를 황혼 길에 접어든 이 종이 저 황혼이 더 붉게 더 진하게 물드는 것처럼, 목사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을 우리 주님께 분골쇄신하겠습니다. 끝.

2008. 스승의 날에 즈음하여,

제자: 양 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