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神學과 철학(哲學)의 관계
먼저 철학이란 말 자체의 뜻은 “지혜(지식)를 사랑한다.” 뜻으로, 눈에 보이는 現象에 머물지 않고, 이 현상 배후의 絶對者 내지 存在自體를 추구하는 학문이라고 하겠다. 철학이 추구하는 이 절대자는 바로 神學의 대상인 절대자 하나님인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신학과 철학은 공통점을 가졌다고 하겠다. 그러나 우리가 공부하는 절대자 하나님은 이 세계에 대하여 초월해 계시는 분이며,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함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철학은 인간 머리로(理性) 절대자(하나님)는 현상계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이 세계의 근원을 형성하는 존재로, 이 세계의 一部가 되어 버리는 그런 존재로 , 우주의 원리로 본다. 또한 철학은 인간의 삶과 세계역사의 의미 문제를 理性의 기초 위에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철학은 주어진 삶과 역사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인생이란 무엇인가.’ “村夫는 생겨진, 던져진 實存이니 그냥 사는 것이지 뭐!”한다. 그러나 철학은 좀 생각을 하는 사람에겐, 내가 사는 존재의 의미, 목적을 질문한다. “왜 사느냐.” 그래서 철학은 “自我實現(Self-Actualization)키 위해서 산다.”고 말한다면, 신학은 “자기 초월적 삶(Self-Transcendental life)을 산다.”-미국의 O. Henry의 <마지막 잎 새> 죤시 처녀와 화가 이야기.)
위와 같은 철학적 물음에 대해서, 神學은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질문에 인간 자신이 답변하는 것이 아니라, 三位一體 되신 하나님께로부터 인생과 세계의 역사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얻기 위해서 여기 신학교에 와서 공부하는 것이다.
1). 학문하는 방법에 있어서 신학과 철학은 현저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철학은 무슨 전제조건을 인정한 후에 어떤 대상에 대해서나, 진리에 대해서 이렇게 또는 저렇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철학자들은 만약 어떤 것을 전제한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학문하는 自由를 상실하게 됨으로 용인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철학은 처음부터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어떤 대상을 추구하는 동시에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철학은 일종의 무전제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학은 반드시 전제조건(前提條件)이 있다. 이 전제조건이라는 것은 ‘믿음’ 이다. 믿음이 없이는 신학을 공부할 수 없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교 교회가 가르치는데 대한 나 자신의 동의(同意)나 합의가 없이는 할 수가 없다. 신앙을 가진 후에라야 교회가 가르치는 여러 가지 敎理 중에 사람에게 맞지 않는 것이라도 이해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신학은 전제조건을 가진 학문이다.
2). 철학의 대상과 신학의 대상은 다르다. -철학은 존재의 근원인 실재(實在)를 추구하는 동시에 존재의 근본 구조와 그의 가치를 추구한다. 따라서 철학은 반드시 神(하나님)을 추구한다든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철학은 사람의 의식작용(意識作用)에 의한 진리 탐구의 노력이며, 모든 존재의 근원을 탐구한다. 따라서 때로는 삶이 경험 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것에도 언급한다. 그래서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것을 實在라고도 부르고, 神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신학은 그 대상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상대한다. 철학에서와 같이 사람에게서 출발해서 진리를 탐구하다가 神에게 도달하는 그러한 신이 아니라, 모든 존재를 가능케 해 주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그 확신에서 출발해서 하나님의 본성과 그가 하시는 일에 관하여 여러 가지로 이해하려고 한다. 이것이 神學이다.
3). 철학은 철학하는 사람이 자기가 하는 학문의 내용에 대하여 자신의 人格과 존재전체를 관련시키지 않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시계공이 시계를 만들 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술로서 시계를 만들면 된다. 시계에다 자기의 인격이나 생명을 결부시킬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철학을 하는 사람은 철학하는 내용에 대하여 주관성을 반드시 개입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신학은 그 대상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에 대하여는 人格적으로 그리고 자기의 전 존재를 걸고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것을 주관성(主觀性)이라고 한다. 주관성이 없는 신학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양자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철학적인 방법을 쓰지 않으면,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바로 가질 수 없으며, 체계적인 설명을 할 수 없다. 또한 신학의 도움 없는 哲學은 너무나도 존재에 대한 피상적이고 일방적인 이해 밖에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신학과 철학은 서로 도움이 필요하다.
2. 神學과 文學의 관계.
사람의 삶을 아름답게, 흥미롭게 그리고 실존적으로 적나라(赤裸裸)하게 묘사한 것을 文學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삶이란 반드시 아름다운 것만 아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비극적인 것만도 아니다. 사실 인생이란 천태만상(千態萬象)의 양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실존상태를 글로서 묘사하여 거기서 모든 진리를 찾아보려고 하는 것이 문학이다. 그러므로 문학은 문학 고유의 묘사방법이 있고, 목적을 가지고 있다.
때로는 倫理道德에 배치되는 사건을 기록할 수밖에 없으며(신학적으로 죄 된 인간이기에), 때로는 환상적인 공상의 이야기도 그려보게 된다. 그러면서도 거기에 어떤 인생문제의 공통점과 공감을 주어 독자로 하여금 ‘시원케 함’[아리스토텔레스의 詩學에서 ‘배설’(카타리시스, 淨化작용)의 개념]에 있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같이 울게도 한다.(共鳴共感)
그러면 신학과 문학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신학이나 문학은 사람의 본질을 실존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점에서 유사점도 있다. 문학이 사람을 중심해서 일어나는 사건을 취급할 때, 인간존재의 모습 그대로 묘사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가를 알려고 한다.
그러나 신학은 사람의 여러 가지 문제성의 밑바닥에 罪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 죄가 인간의 모든 희비애락(喜悲哀樂)을 가져 온다고 본다. 그리하여 이 점에 있어서 즉, 인간 삶의 문제를 발견하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구약의 시편, 욥기=지혜문학)
그러나 신학과 문학이 結論에 가서는 현저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문학은 삶의 현실을 예리하게 분석 비판하나 어떤 희망이나 근본적 해결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신학은 예컨대 <욥의 고난>의 해결은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길’로 그 해결점을 가르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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