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수필사랑마당

9. [수필]:<봄이 오는 길목에 서서>

solomong 2025. 2. 28. 11:16

9. [수필]:<봄이 오는 길목에 서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고 있다. 고뇌와 허무에 시달린 이 땅에도 봄은 오고 있다. 영국의 19세기 낭만파 시인이었던 셀리(P.B. Shelly)는 '서풍의 노래'에서 "만일 겨울이 온다면 어찌 봄이 멀었으리요"라고 했다. 우리 지역의 애국시인 이상화는 일제에 항거하면서, 독립을 염원하는 의미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좌절과 실의에도 소망과 독립에 목말라 애타게 절규하는 노래를 불렀다. 한국교회는 이땅에 고고(孤苦)의 산성(産聲)을 울린지도 120개 성상(星霜)을 지내 왔다.

이제는 하늘나라, 지상국가, 민족을 생각하는 성숙한 세월이 흘러왔다. 아! 가슴 떨리는 깨우침의 감격도 있었지만, 실망과 안타까움을 얼마나 주었던가. 주의 몸된 교회 품속에서 거짓과 진실, 절망과 소망이 점철된 것이 우리 교회의 뒤안길이었다. 허나, 이러한 것이 모두 쥐 죽은 듯이 고요한 침묵은 교회로 하여금 교회 되기를 포기했다. 무감각하고 무표정한 교회는 이 지상에서 더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곳일 수 없는 화석화된 교회라고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J.Moltmann)은 갈파한 적이 있다.

교회는 세상 역사의 뒤꽁무니나 따라가고 위선과 거짓, 오만과 교만함이 전횡자들의 손바닥 속에 있을 때, 강요된 침묵 속에 있을 때, 거룩한 지성소의 휘장은 찢어지고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나긴 겨울의 그 매서운 설한풍에 꽁꽁 언 땅일지라도 따스한 봄빛이 대지를 비추일 때, 분출하는 용암처럼 새 생명은 이 땅에 또 다시 탄생한다. 이것은 항거할 수 없는 대자연의 질서요 하나님의 섭리다.

 

교회의 사명

교회는 지상에 존재하는, 하늘나라의 생명이 움트는 지상의 소망으로 존재해 왔다. 밝아온 21세기는 낡은 이념을 청산하고, 지구촌은 하나의 공동운명체로 거대한 산업화 기지로 서서히 터잡아 가고 있다.보수 물결의 퇴조와 개혁세력의 성장, 계급과 계급의 대립, 지역과 지역의 문제, 민족통일의 문제, 핵 포기 문제 및 물질적 발전과 새로운 생산양식의 등장은 21세기로 진입하기 위한 위기와 도전이었다.

 

한편 민족 내부 문제만 하더라도 전 분야에 걸친 힘과 부의 평준화 문제가 이 시대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의 모든 분야에서 <선진화>를 이룩해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특히 세계에서 하나 뿐인 분단된 조국의 운명은 우리 민족의 총체적 과제인 "남북이 통일된 민족국가"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통일' 문제는 결국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들이 주역이 되어야 하고, 우리들 양 어깨에 매인 과제인 것이다.

분명 새천년에 진입한 이 땅의 거대한 물결은 '개혁의 시대정신'의 세기임을 다시 한번 천명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바로 이러한 세계사와 민족사에 모순의 지양과 극복이라는 과제의 해결사로서 사명과 책임을 지고 있다. 만약에 한국교회가 이런 시대적 개혁에 조응(照應)하여 정신문화 창조, 삶의 바탕에서 복음선교, 및 선명한 도덕성의 선도적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이 거대한 세기 초의 새로운 도전 앞에 한국교회의 고립은 피할 길이 없다. 결국 한국교회는 이런 맥락에서 크게는 세계사와 교회사, 적게는 한국민족사와 한국교회사에서 도태되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교회는 보편적 사명에 첨가하여 한국 민족의 여명을 밝혀준 선교사의 교회 건립, 신식 학교창립 및 서구병원의 설립 등 역사적 선구자적 공효를 송두리째 스스로 소멸시키느냐, 아니면 이 무거운 시대적 사명을 뿌듯한 감격으로 부담해야 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필자는 이런 면에서 특히 한국의 대형교회와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자기 변신을 촉구하는 바다. 이처럼 자기 변신과 개혁을 요청 받고 있는 전환기에 한국교회와 교인들이 처해 있는 실상은 어떠한가.

교계 행정과 정치는 음침한 고소(古巢)를 떠나지 못하고, 암울한 침묵에서 눈망울만 굴리고 있는 기득권 내의 부류들, 전형적 대형교회 지도자들의 삶의 귀족화 문제가 일반사회의 따가운 시선에서 교회를 교회답게 하지 못해 복음선교에 금이가게 하고, 이에 반해, 지방교회와 개척교회들의 고난의 참상들! 그것은 마치 체념적으로 하류(下流)를 표류하는 것 같이 보인다. 이런 것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마치 성서에서 말하는 '빈 집의 우환'처럼, 우리들로 하여금 가슴을 쥐어 뜯는 듯한 아픔과 배신감! 이것이 지금의 한국교회의 현주소다.

한국교회의 정체성

지나온 그간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역사는 동시대에 대한 관심'임을 주목하면서도 우리는 지난 거의 한 세기 반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역사철학자 크로체(B. Croce)가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며"이며, "현재의 관심이 우리로 하여금 과거로 인도케 한다"고 말했던 까닭과 마찬가지다. 또한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한 카(E. H. Carr)의 말처럼 우리 한국교회의 한 세기 반의 세월을 이어온 과거 역사의 교훈을 읽어내지 못하면 오늘의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기독자들은 이 시대적 시련을 넘어 내일의 길을 찾아 갈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과 이 땅은, 나라의 국운이 어려울 때나 기쁠 때나 한결같이 고고한 기개(氣槪)를 지니고, 주님을 사랑하는 심정에서 애국애족의 정신을 갖고 행동하며 기도하던, 역사의 자욱마다 선조들의 자국이 서려 있는 한민족의 강산이다. 선조들의 이런 숨결이 지금도 호흡하고 있는 이 땅이며, 맥박이 박동하는 역사의 터전이요, 우리들의 후세들에게 가르쳐 전승해야 할 이 땅이기도 하다. 평양장대현교회, 산정현교회, 서울새문안교회, 대구남성정교회, 마산문창교회, 여수애양원교회, 숭실, 이화, 배재, 연희학교!,

서울세브란스병원, 대구동산병원, 전주예수병원 등은 우리가 개화되지 못했던 그때의 신앙, 교육, 사회 문화의 새벽을 열었던 유서 깊은 신앙의 메카였다. 3·1운동과 민족의 골육상쟁이 치열했던 그때도 일편단심었으며, 신앙의 지조와 조국을 사랑한 선조의 얼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진리와 진실'을 지키기 위한, '비진리와 거짓'에 대한<마르틴 루터> 이래의 항거정신(protestant spirit)이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중세의 암흑시대를 깨우고, 종교개혁의 기치를 든 종교개혁자들의 '거짓됨'에 대한 '반골성'(反骨性)과 일맥 상통한다.

계(戒)할 바를 가리고 본(本)할 바를 택해야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기독자들이여, 역사 창조와 도약의 역사를 쓰려는 곳에는 각고의 아픔이 없고서는 불가하다. 우리 한국교회의 역사가 지속되어 오는 동안 누적된 문제를 풀고, 장래의 소망을 설계하려면 거기에는 지나온 날을 올바로 해석하고 시(是)와 비(非)를 분명히 가리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한국교회의 약 한 세기 반의 역사의 이정표를 세우고자 한다면, 기독교 2000년 역사에서 성속(聖俗)을 구별치 않고, 언제나 선명한 천의(天意)를 세상역사에 천명하면서 우리 한국교회가 이 지경에 이른 것과 같은 과오는 반복하지 않도록 분명히 계(戒)할 바를 가리고, 본(本)할 바를 택해야 할 것이다.

죽는 삶과 죽어서 사는 삶

한국교회여, 단지 생존을 위해서 우리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무사안일주의와 회의주의에 젖어 자조의 빈 웃음을 날리고 허허로운 가슴을 쓸어 내어야 한단 말인가! 주림을 피하기 위하여 수모와 치욕을 삼키며 채미(埰薇)라도 먹지 않을 수 없었던 이, 제(夷, 齊. 중국의 백의 숙제). 한국교회의 선생은 선생(牧師)다운 것은 정(正)과 의(義)의 기강을 바로잡아 교학(敎學)의 대강(大綱)으로 삼는 것이요, 양들은 대목자장 되신 주님의 가신 길을 근본으로 삼아 따라가야 할 것이다.

이제는 교(敎)를 팔아 진리를 사서 먹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엇으로 우리들의 싸늘한 가슴이 미어지도록 전율케 하는 그런 격률(格律)이 목메도록 그립기만 하다. 양(羊)답지 못하게 가르친 선생과 선생답게 대하지 못한 양들이 참회의 눈물을 주고 받기에는 정녕 너무 늦어버린 것인가. 살아서 죽는 삶과 죽어서 사는 삶을 생각해 본다.

폭군의 피 묻은 칼날이 무서워 신앙의 지조와 양심을 초개와 같이 버렸던 박해시대의 변절한 신앙자들, 그들은 살았으나 죽은 삶이었고, 살아서 참수형, 죽어서 부관참시(副棺斬屍)를 당할지라도 서슴 없이 그 지조를 지킨 신앙의 열사들. 묵묵히 순교의 길!-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 중세 종교개혁자들 및 대원군 시대의 순교자들과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들이 유독 오늘날에야 왜 이다지도 그리운 지 모를 일이다.

 

이 글을 맺으면서, 지는 꽃잎은 물결에 정표를 던지고자 하고, 흐르는 물은 날리는 꽃잎을 그리나니 세상 만사의 상관하고 원하는 바가 이와 같음에랴. 세월은 나는 살과 같고 유수(流水)와 같아 사람을 바꾸어 내고 인생은 덧없이 흘러만 간다. "올바르게 존재하고 싶다는 소망과 행복하게 존재하고 싶다는 소망은 똑 같은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설파한 칸트(I. Kant)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간교한 거짓으로 삶을 포장한 존재 양식으로는 스스로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을 가슴 아리도록 터득한 자들만이 '사욕'(邪慾)이라는 벌레를 스스로 짓밟을 수 있다는 마지막 가냘픈 기대를 연민의 정으로 지켜 보고 싶다.

진실로 우리들 중 그 어떠한 희생을 지불하고서라도 가야할 길이요, 바라야 할 길이다. 그러기에 이 길은 승리하는 길이지, 지는 길은 아니다. 서로 마음의 벽을 허물면서 역사의 저류(低流)를 거슬러 오늘날 우리가 걸어가는 발자취는 뒷사람들의 하나의 이정표가 될 것임을 확신한다. "봄은 기다리는 자의 것, 기다림은 인고(忍苦)의 길, 봄이 올 것인가를 묻지말라, 봄은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봄이 오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봄은 찾아 오지 않는다. 봄은 우리가 만들어야 찾아 오는 법" 임을 환기시키면서, 그만 필을 놓는다. 끝.

 

2010. 4.11.

山下연구원장: 양 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