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신학이론마당(75)

38. 어떻게 설교를 논리적으로 작성할까

solomong 2025. 1. 20. 11:10

38. 어떻게 설교를 논리적으로 작성할까

-사고의 순리를 정리한 말씀의 고백-

 

‘논리학’이란 ‘말의 법칙을 다루는 학문’ 또는 ‘사고의 법칙을 다루는 학문’이라고 개념을 정의할 수 있다. 강의자가 “어떻게 설교를 논리적으로 작성할까.”라는 이 강의에서 설교문을 읽을 때, 또는 설교를 들을 때, “설교가 뒤죽박죽이라서 무슨 말을 하는지, 도대체 분간할 수 없다.”란 소리는 듣지 않고 “아! 그 설교 논리정연하구만”, “설교자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그 논조가 명확 하구만” 정도라도 들을 수 있는 설교문과 설교라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만 되었으면 하는 목적 하에서 이 강의를 하고자 한다.

 

복잡한 논리학의 내용 중에서 개념(槪念), 판단(判斷), 추리(推理) 이 세 가지에 대해서만 말하기로 한다. 이 세 가지만 알고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면 “논리적 견지에서 설교가 엉망이다.”라는 소리는 듣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이번 강의에서도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목회자나 설교자들이 일차로 통과할 문이 있다. 먼저 이 과정을 밟아 주십사 하는 의미에서 ‘무화과나무 밑의 사색’이란 것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1). 무화과나무 밑의 사색(요 1:48): 성서가 소개하는 식물 가운데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성서 말씀을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쓰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생살이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하늘에 있는 일월성진이 사라질 때의 광경을 ‘무화과나무 잎이 말라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상징적으로 기록을 했다(사 34:4, 렘 8:13).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하고 그 잎사귀를 내는 것을 보아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아나니”(마 24:32)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시절(때)을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무화과나무에 달리기 시작한 푸른 열매를 보아(아 2:13), 젊은 청춘남녀의 낭만을 즐길 봄철이 온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이스라엘의 인생살이와 연관된 무화과나무는 삶의 안전성을 보여 주는 상징적인 설명이 나타나 있다(왕상 4:25, 왕하 18:31) 이것은 솔로몬 왕의 정치가 백성들의 안정을 주는 삶을 표시하는 것이었고, 앗수르 적군의 대장이 이스라엘의 안정된 삶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그들을 위협하고 유혹한 것이라고 하겠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 아래 있던 나다나엘을 보았다는 말씀을 하시고, 그의 인간 됨됨이와 진실성을 격찬하였다는 말씀이 나온다.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친구들과 정담을 나눌 친교의 마당, 대신에 자기 영혼과 앞으로 살아갈 인생살이를 사색(명상과 기도)하는 장소로 택했다고 주석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강의자가 여러 번 말한 적이 있었지만, 사실 기도는 “하나님께 무엇을 배달해 주십사.” 라고 요청하는 것이라고 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지. 정. 의’를 변화시키는 작업이라고 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알아서 주신다. 그렇다면 나다나엘은 무화나무 밑에서 인생의 문제와 가치의 문제를 진지하게 사고(思考)를 했다고 생각한다. 이 사색의 마당인 무화과나무 아래는 나다나엘의 진지한 사색과 참을 찾기 위한 고민의 터전이었고,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아셨고, 거기서 훈련된 나다나엘의 인간됨이 참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문제는 반드시 무화과나무 아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홀로움 속에서 목회자 자신의 회상으로서의 과거, 현존, 전망 및 삶의 가치를 반성적으로 자기를 성찰하는 것이 중요하단 말입니다.

 

고독의 맛은 쓰지만, 나 홀로 있는 것이 아니요, 주님이 나와 같이 있는 시간이요, 생각이 맑아질 수 있고, 좀 더 정직하게 되고, 참(진실)을 찾아가는 사고의 시간이란 것이다. 현대 복잡한 삶을 떠나서 고요히 자기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자는 말이다. 기도하잔 말이 아니다. 요사이 흔히 하는 ‘요가’를 하잔 말도 아니다. 성전에 홀로 들어가서, 가까운 공원에 홀로움 속에서, 가까운 산을 등산하는 중에 홀로 사색하는 그런 시간을 갖자는 말이다.

 

그런 중에서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정직히, 솔직히 끄집어내 보자는 것이다. 처참한 자신의 모습을 버선 짝 뒤집어서 보듯이 보자는 것이다. 파스칼이 말하기를 “인간에게 위대한 점이 있다면, 자기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아는 점에서 위대하다.”고 했다. 대중(교인)속에 묻혀 진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고무풍선처럼 부풀어진 것이 아니라, 포장되어 가장된 것도 아닌 벌거벗은 나신(裸身)과 진심(眞心)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목회자에게 가끔씩 무화과나무 아래 삶의 그 제일 중요한 장면을 스스로 보는 것이 급선무라는 말이다. 그리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한 사색, 진실을 찾아 고민해 보는 그런 장소와 시간을 갖자는 것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자기 출세의 길, 큰 교회로 성장시켜 그것으로 자기의 목회 성공을 증명키 위한 길에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에 무화과나무 밑에서 찬 이슬에 몸을 적시며 고민하는 밤잠 못 이루는 진실의 밤을 보내지 못함이 참으로 지금의 목회자들에 대한 유감스런 일이라고 생각해 본다.

 

목회(牧會)가 나다나엘과 같이 진실의 삶이 예수님에게 인정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학문, 목회, 및 선교를 함부로 말하지 말자! 자신에게 밤하늘의 별과 더불어 진실(참)을 구하려고 노력한 나다나엘의 무화과나무 밑과 같은 시공(時空)이 있었는가를 먼저 물어보잔 말이다. 그럴 때 자신의 설교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란 것이다. 논리적(論理的) 설교란 무엇인가. “자기 말과 자기 생각의 순리를 잘 정리한 말씀의 고백”이라고 함이 어떤가. 이런 것이 있기 위해서 이 무화과나무 밑의 관문을 먼저 통과하자는 말이다.

 

2). ‘개념’이란 무엇인가: 국어사전에는 개념이란 낱말을 풀이하기를 “여러 관념에서 공통 요소를 추상하여 종합한 하나의 관념”이라고 했다. 논리학에서는 개념이란 의미는 “직관(直觀)에 대립하는 것”이라고 했고, “직관은 개별적 표상(表象-상징, 지각을 표현하는 직관적인 의식 내용)이라면 개념은 보편적인 표상이다.”하겠고 죤 듀이(J. Dewey)는 ‘명확한 의미’라고 파악했다.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보자. ‘기독교인들은 멋이 있어야 한다.’라는 문장에서(제목설교의 ‘제목’이라고 해도 무방함.), ‘기독교인들’이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반드시, 꼭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말하는 의미이다.

 

그럼 ‘멋’이란 무엇인가를 서론에서 반드시 설명을 해야 한다. 이 문장이나 설교제목이 이렇다면 ‘멋’이 무엇이란 개념을 설명해야만 ‘그런 기독교인들이 되자.’ 라고하든지, 그런 목표를 가지고 노력하자고 할 수 있다. 막연히 멋있는 기독교인들이 되자고 하면 설교가 추상화된다. 교인들은 설교를 듣고도 그 언저리 뜻은 알겠는데 꼭 집어서 목사님이 어떤 사람이 되라고 하시는지 그저 막연히 저런 말씀을 하니 모르겠다고 한다. 멋에 대한 개념 정의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멋’이란 개념은 무엇인가. 국문학자 이희승 선생은 ‘흥청거림’과 ‘필요 이상(비실용적)’이라고 설명했다. 국어사전에는 “차림새, 행동, 생김새 등이 세련되고 아름다움”, 또는 “온갖 사물의 진미”라고 풀이했다. 김하태 박사는 “인생의 높이와 깊이”라고 하면서, “인격적인 생활로부터 예술적 생활로 옮겨가는 것, 또는 습관적인 생활에서 문화적인 생활로 들어가는 것, 타산적인 생활에서 비타산적이면서 창조적인 생활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의 ‘멋’이란 특히 비타산적인 인격적 삶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성서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5리를 가고자 하거든 10리를 동행하라고 했다. 5리를 가는 것은 의무의 생활이고, 나머지 5리를 더 가는 것은 사랑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여리고 도상의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해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바로 전형적인 기독교인들의 멋있는 삶이 아닐까.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고 말한 것은 진정 멋의 삶이었다. 예수님께서도 멋있는 삶을 사셨다.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잃은 한 마리 양을 찾는다는 것(눅 15:4)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면서 골고다 석벽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속량하신 것, 어찌 멋에 비길 수 있을까.

 

3). ‘판단’이란 무엇인가: “판단이란 사고의 대상에 대하여 그 무엇이라고 단정하는 사고의 형식이다. 환언하면 사고의 대상 즉 사물, 현상, 사상, 언어 등의 성격, 관계, 상태 등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긍정 또는 부정을 표시하는 사고형식”이 바로 판단이다. 판단은 객관적 사태에 대한 반영이며 설명이므로 거기에는 객관적 사태의 실상에 일치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만일 그 판단이 객관적 사태의 실상과 일치하는 것이면 옳은 판단이고, 객관적 사태의 실상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면 그릇된 판단이다.

 

언어에서나, 문장에서 주어 개념과 술어 개념의 일치를 표시하거나 불일치를 표시한다. 언어를 빌려서 표현된 판단을 명제(命題, Proposition)라고 한다. 설교에서 ‘Nazi에 의해서 유대인 6백만 명이 죽은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다.’라고 한다면 긍정적 판단으로써 이는 역사적으로나 사실적으로 잘못된 판단이다. 광기 어린 히틀러의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인종순결)에서 나온 소위 ‘뉘른베르그 법’(반 유대법, 1935. 9.에 통과)에 의한 유대인의 희생이었지, 역사적으로나 성서적 근거에 의한 것이 아닌 그릇된 판단이다.

 

그런고로 설교자는 자기 설교 원고를 쓸 때, 이런 잘못된 명제를 만들어서 자기 주관적 의지로 판단하는 것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타당한 판단을 내리려면 첫째,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 판단 내용이 진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논리에 맞아야 한다. 판단의 형식이 정확해야 한다. 판단을 타당하게 내리려면 우선 그 판단을 구성하는 개념이 명확하고 정확해야 하는 동시에 또 그 판단을 구성하는 개념과 개념간의 연결이 타당해야 한다. 셋째, 실천의 필요에 부응해야 한다. 판단이 빈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넷째, 판단은 언어, 특히 문법을 잘 공부하고 숙달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점에 대해서는 강의자도 사실 자신이 없다.

 

4). 연역추리와 귀납추리(연역법과 귀납법): (1). 연역추리(연역법) 먼저 ‘추리’란 개념부터 설명하자. “주어진 전제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내는 특수한 종류의 사고”를 추리라고 한다. 논리에 맞게 추리하려면 첫째, 추리의 전제로 되는 판단이 진실해야 한다. 추리의 전제로 되는 판단이 옳지 않으면 도출된 결론도 황당한 것으로 된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물속에 사는 동물은 모두 어류이다.(전제) 고래는 물속에 산다. 그러므로 고래는 어류이다.(결론) 이것은 삼단논법의 추리 형식인데 추리 형식은 정확하지만 추리의 전제가 옳지 않다. 둘째로, 추리의 형식이 추리의 규칙에 맞아야 한다. 전제가 되는 판단이 옳다 하더라도 추리가 추리 규칙에 맞지 않는 형식을 취하게 되면 역시 정확한 결론을 도출할 수 없다.

 

이 어린이의 아버지는 수영을 잘한다.(전제) 이 어린이는 그 아버지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이 어린이는 수영할 줄 안다.(결론) 이것도 역시 삼단논법의 추리형식인데 전제는 옳으나, 전제와 결론에 논리적 연관이 없으며 추리의 형식이 틀렸다. 그러므로 도출된 결론이 황당한 것으로 될 수밖에 없다. 연역추리(연역법)란 “전제와 결론에 필연적인 관계가 있는 것”을 말한다. 한국인은 독도를 지킨다.(전제) 나는 한국인이다.

 

그러므로 나는 독도를 지킨다.(결론) 연역법(추리)을 좀 다르게 설명한다면, 결론(전제, 가설)부터 내린 후 본론의 논증에서 이를 증명하여 결론에서 그러므로 전제나 가설이 입증되었다고 하는 말과 같다. 이런 형식은 주로 논문에서 많이 쓰이나, 설교에서도 연역추리와 귀납적인 추리가 많이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2). 귀납추리(귀납법) 귀납추리는 “개별적 사물 혹은 현상으로부터 그 유(類)의 사물 혹은 현상의 일반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추리 방법”을 말한다. 귀납법은 개별적인 지식에 근거하여 좀 더 일반적인 지식을 이끌어 내는 논리형식이고, 또한 연역법은 일반적인 것으로부터 개별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논리 형식이다. 어떤 사람(니고데모)의 삶에 있어서,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이 바뀌는 것을 묵상해 보자는 것이다.

 

니고데모의 어두운 면: ①.바리새인의 율법적인 이중생활 ②.산헤드린 공회원의 권리에 탐닉 된 자 ③.비겁한 성격 ④.예수님을 기적이나 행하는 한 종교가로 인식 ⑤.중생의 도리를 각(覺)하지 못함 ⑥.신앙보다 의식주를 먼저 귀한 것으로 생각함 ⑦.주체와 객체가 도착된 삶을 사는 자였다. 그러므로 니고데모는 어두움에서 살았다. 이렇게 되면 ‘연역법’이 되고, ①.에서 ⑦.까지 이런 니고데모의 삶이 보이기에, 그러므로 그는 어두운 인생을 살았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을 ‘귀납법’이라고 한다.

 

니고데모의 밝은 면: ①. 십자가 하에서 예수님의 장엄한 죽음을 통해 뭉클한 감격과 빛을 받았다. ②.예수님의 장례를 위해서 값 비싼 몰약과 침향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③. 희생을 각오한 공개된 제자였다. ④.율법주의에서 복음주의자로 전향했다. ⑤.세상의 명예, 권세, 물질에 대한 가치관이 신앙에로 전도되었다. ⑥. 결단적인 단계에서 신앙의 용기를 발휘했다. ⑦.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는 제자가 되었다. 이에 대한 분석은 어두운 면과 같다.

 

현대인에게 적용문제: ①. 니고데모의 어두운 면을 통해서 볼 때, 비겁하고 정체성(주체성)이 결여되었고, 물질 위주의 잘못된 가치관이 정립되었고, 현실사회에 물들어 현실사회의 가치관에 타협하면서 사는 이런 유의 한국교회와 특히 이런 유의 목회자를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겠다. ②.니고데모의 밝은 면을 볼 때, 용기 있고 확신적인 주체의식에 살아야 한다.

 

신앙 우선주의적인 삶을 살자, 일단 유사시에 당당히 “나는 기독교인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현재의 부활신앙에서(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소망 속에서 기다림의 삶을 살자고 하겠다. 홀로움에서 부단히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사색하는 시간을 가져야 자기 말과 사고(思考)의 순리를 잘 정리한 말씀에 대한 고백적인 설교를 할 수 있다. 그리고 개념, 판단, 추리를 논리법칙대로 설교에서 점검하면서 논리가 서는 설교자가 되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