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신학이론마당(75)

35. 기독교 사회윤리

solomong 2025. 1. 2. 11:19

35. 기독교 사회윤리

(敎會를 둘러싼 社會)

 

1). ‘사회’에 대한 序說-‘사회’란 것은 많은 사람이 모여 서로 도와가면서 함께 살아가는 한 떼(一群)의 국민을 말함이다. 좀 더 전문적 용어로 말하면, ‘사회라는 것은 이용과 처리의 체계인 동시에 권위와 상호협조와 각종 계급과 사람의 행동과 자유를 통제하는 체계를 말함이다.’ 사회라는 것은 한 사람으로서는 형성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적어도 한 가족이 사회를 형성한다. 군중이라 해도 대개가 향토민일 경우가 많다.

 

현대에 이르러 인간의 생활양식이 도시를 중심으로 하게 되어 사회는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회의 구성 요원이 한 공동체이나, 향토민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연 모르던 다른 부족과 다른 종족이 함께 모여 살게 되었다. 이렇게 됨에 따라서 사회는 더 복잡한 양식으로 다양해지며, 어려운 문제가 생기고 갈등과 대립이 심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회 구성 요인이 각양각색이 되면 사회의 양상은 더 복잡해진다.

 

또한 사회는 상호 이용하는 조직체이다. 본래 사회라는 말에 해당하는 라틴어 ‘소시에타스'(Societas)는 동맹 또는 협동이란 뜻이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처음부터 남녀가 같이 살게 되어 있으며, 남녀가 같이 살면 자녀가 생기게 마련이고, 자녀가 생기면 벌써 3인 이상이 한 지붕 밑에서 살아야 한다. 아무리 한 가족이라 해도 사람은 각자가 자기의 생명을 가지고 났으며, 자기의 이름을 가지고 있기에 서로 협조해서 살아야 한다,

 

사회라는 것은 가정생활의 원칙을 무한대로 확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생활의 원칙도 상호협조에 있을 것이다. 사회에는 權威의 체계가 있다. 권력의 강약과 高低가 있다. 이 권위는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최대한으로 사용해야 한다. 이기주의적인 동기에서 사용해서는 안 된다. 권위는 남을 지배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을 보호하고 남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사람의 행동과 자유는 사회라는 공동체의 발전과 유익을 위해서 제재를 받는다. 사회는 일종의 有機體이다. 즉, 사람의 몸과 같다. 각 부분이 정당하게 움직이고 주어진 처소에서 맡겨진 임무를 잘하면, 그 사회는 발전되고 살기 좋은 공동체가 된다. 그러나 만약 어는 한 부분이 썩거나 탈선하거나 질서(倫理)를 파괴하면, 그 사회는 전체적으로 고행을 당하게 되며, 발전은 기대할 수가 없다.

 

그런데 본래 자유를 최대한으로 구사하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인데, 이 사람이 사회생활에서 지나친 자유행동을 한다면, 그 사회는 무질서하게 되고 방종의 사회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자유는 어디까지나 사회의 유익한 사회 질서를 유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사용되어야만 한다.

 

이처럼 사회는 개인과 집단, 자유와 권위, 개인주의와 전체주의, 이기주의와 협동 정신이 엇갈려서 있는 거대한 유기체이다. 이 양극이 적당한 균형을 유지할 때, 사회는 질서가 잡힌 공동생활의 터전이 될 수 있으나, 그 균형이 파괴될 때, 그 사회는 저주와 비극의 곳이 되고 말 것이다.

 

2). 사회와 교회의 相關關係-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회생활의 원칙은 상호협조와 이용에 있다고 했다. 서로의 권익은 침범치 않고 개인적인 생활권을 최대한도로 보유하면서 사회는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단위의 공동체이다. 즉 平面的인 장소이다.

 

이와는 달리 교회는 二次元을 가지고 있다. 교리의 圓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 모인 우리가 신앙공동체이다. 따라서 교회는 이기적으로 남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한 자기의 생을 완전히 통제하는 생활 원칙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다. 따라서 교회 생활의 방향은 언제든지 위로 향한다. 즉, 수직적으로 하나님과 그 나라의 관계가 앞선다. 이런 면을 가지지 않는 모임은 절대로 교회라고 할 수 없다.

 

동시에 교회는 평면적인 횡적 상호관계를 유지하는 공동체이다. 교인도 사람이라, 사회를 떠날 수는 없다. 그들은 사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한다. 단지, 사회를 피치 못할 싸움의 장소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을 믿음의 실험장이요, 훈련장이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이 사회를 떠나서는 믿음의 훈련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회를 떠난 신앙생활이란 사실은 幻想과 白日夢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반드시 사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위하여 사회가 가지는 중요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사회와 교회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게 지내왔다. 歐美 社會와 같이 수십 세기 동안 교회의 영향을 받아 온 곳에서는 별스러운 대립이나, 갈등이 없이 공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양의 여러 나라처럼 교회가 소수자의 위치에 있을 때, 여러 가지 알력이 생겨왔다. 때로는 타 종교의 세력이 정치적 힘과 야합하여 교회를 압박하며 때로는 국가가 교회를 박해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악의와 오해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교회는 사회에 대하여 해독을 끼치는 단체는 결단코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사회를 돕고 사회 발전에 공헌을 해왔으나, 발전을 저해한다든지, 질서를 문란케 한다든지, 평화를 파괴한 일은 없었다. 그러므로 교회가 사회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사회를 떠나서 별개의 집단생활을 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교회와 사회는 存在 意義를 서로 잘 이해하고 협조만 하면, 양자가 서로 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3). 기독교 사회윤리-대다수 종교는 현세 도덕주의와 내세 지향 주의에 빠져있다. 인도교가 그랬고, 불교가 그러했다. 기독교 일부에서도 그러한 경향을 지니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처럼 현세 도피주의와 내세 지향 주의에 빠지게 됨에 따라 신자의 윤리 생활은 개인의 영적 구원을 위주로 하게 되었다. 대 가족이나 사회나 국가를 향한 관심보다, 自我의 영혼 구원을 위주로 결단하면서 살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 사회는 개인윤리에 의한 신앙생활만으로는 충분치 못한 사회가 되고 말았다. 사회를 통제하고 사회문제를 해결하며, 社會惡을 최대한으로 막으려면 개인의 힘으로써는 도저히 불가능하게 변모한 사회이다. 현대사회는 기계문명에 의해서 종래의 개인을 위주로 한 사회구조와는 전혀 다른 사회로 변모하게 되었다. (전통사회와 변동사회, 어떤 면엔 ‘뿌리’ 찾기가 필요하다.)

 

①. R. Niebuhr의 개인윤리-Niebuhr는 개인은 도덕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가 본 개인윤리는 ‘사랑’을 중심으로 한 인간관계가 가능하다고 했다. 개인은 형제를 위해서 희생할 수도 있고(‘도덕적인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양심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양심의 소리에 괴로워서 뉘우치기도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個人 對 個人의 관계는 사랑과 도덕이 지배하는 인간관계라는 것이다.

\그러니 개인의 최고의 理想은 당연히 非 利己的인 마음이다. 이런 ‘사랑’의 原型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나타내신 완전한 ‘아가페’(αγάπη)가 인간성의 궁극적인 본보기로 보여 주셨다. 그러나 “이런 실천가들이 점점 많아지면 우리 사회가 정화되며, 惡이 없어지리라는 倫理는 하나의 기독교 낭만주의(Romanticism)”라고 Niebuhr는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理性을 무시하고, 상상력과 의지로서의 개인적 인간 존재를 강조하여, 개인을 집단이나 국가에다가 歸屬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Niebuhr는 이런 경지를 고차적 이상적 個體라고 했다. 실존 철학자 K. Jaspers가 말한 바대로, 이런 것은 마치 기계 부속품의 일부분처럼, 자기 생을 스스로 결단하고 선택할 수 없는, 독자적인 人格이란 찾아볼 수 없는 사회 전체 구성원의 단지, 成員인 個體일 뿐이라고 했다. 여기에 개인윤리의 무력함과 잘못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요, 정치적 동물’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Niebuhr의 사회윤리에서 권력의 힘을 부르짖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게 된다.

 

②. R. Niebuhr의 사회윤리- 그리스도의 agape(사랑)는 이 역사적 현실 앞에서는 현실의 도덕적 성취 하는 데는 미급함을 Niebuhr는 역설하였다. 그 이유는 개인 對 개인의 관계에서는 사랑의 법이 비교적 높은 단계까지 실현될 수 있지만, 集團과 集團의 관계에서는 ‘집단이기주의’가 강력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사랑과 도덕의 힘이 현저하게 저하된다는 것이다.

 

자본가와 노동자, 백인과 흑인(甲 乙 文化), 국가 간의 관계는 이기주의(힘의 관계=집단의 교만)라는 것이 사회 현실에 대한 진단이었다. 그래서 “正義를 실현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때문에 民主主義가 가능하며, 불의를 향하려는 인간의 경향성 때문에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집단이기주의는 계층 간에도 심각한 간격이 있어 갈등과 반목을 초래하고 있는 현실이지만, 우선 집단 간의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세력의 균형’(The Balance of Power)이 필요하다고 했다.

 

“인간의 기본적인 삶의 형태는 ‘자기중심’(Self-Seeking)과 ‘자기 양도’(Self-Giving)의 충동이며, 이 2가지 충동이 반영되어 나타나는 것이 주로, 자기 양도는 개인윤리에서, 자기 확장은 사회윤리에서 나타난다.”라고 했다. 개인윤리는 그 목표가 사랑이지만, 사회윤리에서는 正義가 그 목표라고 했다. 또한 개인윤리는 動機로서 그 行爲를 평가하지만, 사회윤리는 동기를 보지 않고, 그 나타나는 結果를 보고서 평가한다고 했다.

 

개체인 개인이 도덕적으로 선행을 하면, 점차 그것이 확대되어 자동으로 사회집단도 변화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낙관적인 환상을 품게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하기에 결과적으로 집단과 집단과의 관계는 대립과 갈등을 초래하는 것이 불가피한 것이기에, “힘은 힘으로 도전해야만 한다.”(Power must be challenged by power.)라고 했다.

 

<힘의 균형> 속에서 평화, 안정이 있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현실주의적 윤리관이요, 인간관이라고 했다. 그렇지 않을 때는 한 집단이 그 본성에 의해서(집단이기주의) 힘을 독점하게 되면 자기 집단 및 계급의 이익을 위해서 ‘힘의 남용’을 하기 마련이란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막는 길은 힘을 분산하고, 그 분산된 힘이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상호 견제하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사랑의 사회적 차원>에 있어서의 실행은 힘에 의한 강제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이런 문제가 다름 아닌 ‘사랑과 정의’의 문제이다. 사랑의 사회적 실현은 정의로운 사회제도와 사회정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소홀히 할 때, 기독교 신자들이 말하는 소위 <개인이 중생하면 정의로운 사회가 자동으로 온다는 것>은 하나의 기독교 낭만주의요, 감상주의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힘의 윤리>가 타당한 논리일지라도, 집단이기주의나 어떤 강력한 정치적 힘도 그것이 <罪로 오염> 되었다. (근사적 접근=‘약간 더한 것’과 ‘약간 덜한 것’ 사이에 상대적 차이가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끝.

2022. 11. 9. 재 수정

장: 양 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