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신학이론마당(75)

32. 게르하르트 에벨링(G. Ebeling-1912-2002)의 신학사상 탐구

solomong 2024. 12. 18. 10:29

 

32. 게르하르트 에벨링(G. Ebeling-1912-2002)의 신학사상 탐구

1). 생 애: 불트만의 신약 신학적 결론을 받아서 현대신학과 사상계의 대변자 역할을 했던 에벨링 교수는 1912년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그가 1938년 츄리히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획득하기까지, 성서 본문 비평학자이며 동시에 고대 교회 역사가인 소덴(H. F. Soden), 구약과 언어 문법학자인 켈러(L. H. Kohler), 그리고 신약학자 불트만 등 저명한 교수들에게서 수학하였다. 그는 철저한 신학연구를 한 후에 고백교회의 목회자로서 2차 대전 종전까지 신학의 실제적인 면에서 이해와 경험을 쌓았다.(1939-1945)

 

그리고 1946년에 교수자격 시험(Habilitation)을 통과한 후, 튀빙겐 대학에서 교회사 및 조직신학을 교수했다. 1956년부터 거의 10년간 츄리히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였고, 1962년에는 거기서 ‘해석학회’(inst fur Hermeneutik)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1966년에는 교대하면서 튀빙겐과 츄리히 대학 연구교수로 있었다. 그는 그 유명한 ‘신학과 교회 사상’지(정기 간행물)의 편집 책임자로 있으면서 많은 논문을 발표했고 1942년 이래 수많은 저서를 내놓기도 하였다.

 

그의 저서로서 영어로 번역된 것은 주로 1949-1860년까지 주요 논문 18개를 선택 편집한 ‘말씀과 신앙’(Wort und Glaube, 1960; 영역, J. W. Leith, Word and Faith, SCM, 1963), 또 ‘기독교 신앙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lichen Glaubens, 1959; 영역, R. G. Smith, The Nature of Faith, 1964)등 그 밖에 불트만과의 대화에서 논의한 ‘신학과 선포’의 영역이 있고, 또 ‘기도’에 관한 설교집 등 여러 논문들이 있다. 특히 이 중에서 ‘신앙의 본질’이란 제목으로 간행된 책은 허 혁 박사가 우리말로 잘 번역해 놓았다(기독교서회 발행, 1969년). 이 책에서 그는 그의 신학사상의 중심 주제들을 체계 있게 이야기하고 있다.

 

2).사 상: 에벨링의 사상은 마르틴 루터 연구를 위주로 하여 쉴라이에르마헤르, 빌헬름 헤르만 등 개신교의 전통에 뿌리박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17, 18세기의 산물인 역사적, 비판적 방법론에도 근거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런 사상 근거가 현대 실존주의 신학의 토양에서 자랐고, 또 그런 분위기에서 호흡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인정하는 것 이상으로 실존주의 철학에도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그는 고가르텐(Gogarten)보다도 불트만에게 더 예리한 비평을 가하고, 나아가 불트만과 바르트의 대립을 넘어가 보려는 노력을 한다(에른스트 훅스도 에벨링과 함께 같은 노력을 한다. H. 오트는 양자를 중재하려 함. 브라텐 저, 채위 역, ‘역사와 해석학’, pp. 178-참조). 이점은 다음의 신학 사상에서 뚜렷이 밝혀진다.

 

그는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곧 인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신앙의 질문은 ‘인간을 인간으로서 화제 삼기 때문에’ 이미 질문자 자신을 그 질문에 직접 관계되고, 또 그 문제에 동참하고 있다고 한다. “어떤 질문이든지 그 질문 자체에는 반드시 그 질문자 자신이 내포 된다” “질문자가 무엇인가 묻고 알려고 할 때, 그는 그 묻는 내용의 한 성분이 된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는 반드시 질문자 자신의 설명도 함께 들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 곧 나는 묻는 자이면서 동시에 물어서 알려고 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그 묻고 대답하는 데 대한 공동 책임자가 된다. 말하자면 이런 질문은 어느 정도 직접 자기 인식의 해답을 얻기 위한 개인적 관심이 없이는 해답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래서 질문자는 스스로 그 대답에 대한 보증인이다. 나는 그 대답에 동의함으로써 그 대답에 책임을 짐과 동시에 그 대답과 일체가 된다.” (‘신앙의 본질,’ 허 혁 옮김, pp. 8-10).

 

그는 이와 똑같은 논리로 인간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불가피하게 하나님에게 대하여 말하는 것이라고 하며, 이와 반대의 표현도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주객(主客)의 대립을 강하게 부인한다. “인간을 말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말할 수밖에 없고, 반대로 하나님을 화제(話題)에 올려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인간을 화제로 삼아야 한다. 이것은 신앙의 본질에 상응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인간이 제멋대로 대상화시켜서 이야기할 것도 아니고, 더욱 유별나게 인간을 비인간화해서 격하시키려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인간’은 두 주제가 아니고 ‘하나의 주제’이기 때문이다.(Word and Faith, p. 200) "신앙에서 방향을 정한 신학이라면 인간을 주제로 하지 않고, 하나님만 말한다는 것도, 반대로 하나님을 주제로 삼지 않고, 인간만 말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하나님과 인간’-이것은 두 개의 독립된 신학의 대상이 아니라, 동일한 하나의 주제이다. 서로 분리되면 둘 다 잘못된다. 오로지 동시에 서로 관계를 가질 때에만 하나님과 인간은 바로 인식된다.(‘신앙의 본질’, p. 125 이하).

 

하나님과 인간은 거추장스런 인간 생활의 부속품이나 장식품이 아니고, 바로 인간 생명의 구성 요인이기에, 신과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야기나 신앙은 단 하나의 유기적 실재라고 보는 것이다. 에벨링은 신 인식(神 認識)이 인간 인식이고, 그 반대도 사실이라고 하면서 “참 신 인식은 하나님 자체와의 어떤 관계가 아니라......우리를 위해, 우리와 함께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참 신 인식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실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의 결정적 차이는 초월과 내재, 혹은 초자연과 자연 사이에 있는 인식의 실재나 또는 그런 형이상학적 실제(reality)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신앙 안에 있는 실제에 대한 관계와 비 신앙 안에 있는 어떤 실재에 대한 관계 사이의 차이에 있는 것이다.

 

3). ‘말씀’의 해석학: 에벨링의 신학은 얼핏 보기에 바르트의 신학과 같은 표현인 ‘말씀의 신학’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모든 신학은 그것이 ‘계시’이든, ‘말씀선포’(kerygma)이든, ‘신앙’이든 간에 ‘언어의 표현’을 통하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일반적으로 말의 뜻을 규명하는 동시에 특히 신의 말씀을 규명하는 일에 노력을 경주하면서 말하기를, 신학의 주제 내용(subject-matter)은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신언(神言) 및 거기서 일어나는 ‘말 사건’이라고 한다. 그래서 각 낱말에 대한 이해 및 상관된 어귀의 뜻을 이해해야한다는 것은 물론, 말 그 자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말’ 이라는 것은 하나의 ‘음향 효과를 내는 사건‘(acoustical event)으로서 구두(口頭)를 통하여 자기표현을 하는 것, 그 내용을 드러내는 일 또는 인격의 커뮤니케이션이고, 나아가서 인간 개체의 실존 및 그 인간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이가 타인과 심각하게 약속을 했다고 했을 때, 그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미래를 타인의 미래에 맹세한 것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말을 타인에게 주었다면, 그것은 자신의 일부를 타인과 분담(a share)한 셈이다.(’신앙의 본질‘, pp. 102-참조).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의 자기 전달이다. 신언(神言)은 혼자서 발언하는 것일 수가 없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화제에 올리면, 그 이야기는 신과 동시에 우리에게 관계된 모든 현실을 문제시 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우리에게 관계된 전체 문제는 말씀에 의해서 새로운 빛을 받게 된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을 밝히는 빛이 아니라, 인간 실존을 비추는 빛이라고 하고, 하나님이 그의 얼굴을 빛내면, 세계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잘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우리의 현실 세계는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또 우리에게 물어 오는 하나님의 질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깊은 의미에서 인간의 말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질문에의 대답이라고 본다. “인간이 말을 한다는 것은 이미 그가 질문을 받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언어는 하나님의 질문에 대한 각종 반응(manifoldecho)이다. 그래서 신언(神言)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언어생활 전반에 관련된 사건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만일 하나님 말씀이 우리의 전체 생활 현실을 새로운 언어로 표현하였다면, 그 때 이미 언어로 표현된 현실은 새로이 말씀된 실재이다”(‘신앙의 본질’, p. 230).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하나의 현실(a present reality)이어야 한다. 신언이 새로이 표현되어 새롭게 들릴 때, 그것은 듣는 자의 생활 현실에서 새롭게 이해되며, 이로써 모든 청취자에게는 새로운 언어 사건이 되고, 또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역사에서 말씀되었다는 그 말씀은 어떻게 그것이 신언인지 확인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그 말씀의 가치가 어떻게 현재적 실재로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일까? 여기서 해석학적 문제가 대두된다.

 

에벨링은 말하기를, 해석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연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전통적으로 ‘주석’(exegesis)과 ‘강해’(exposition)를 구별해 놓고, 강해해 가는 과정을 해석학이라고 하는 입장과 다른 견해를 표명한다. 대개 해석학은 말 그 자체가 해석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해의 영역에 있어서의 기본적 현상은 언어의 이해가 아니라, 언어를 ‘통한’ 이해이다. 말이라는 것은 ‘이해’를 위한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이해의 길을 열어주고 중재하는 역할을 한다. 신언(神言)도 이해에 길은 열어주는 것이지, 모호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성서의 본문은 그것이 기록되었을 때에 발생한 ‘언어사건’(Wortgeschehen)으로서 면밀히 연구되어야 한다.

 

성서의 텍스트는 본문 그 자체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언어사건’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이것이 텍스트가 기원한 이유임과 동시에 본문의 장래 운명인 것이다. 그래서 조직신학의 주요 기능은 언어 사건을 실제 생활 속에 구현하도록 하는 데 있다. 말씀을 선포하게 하고, 언어 사건을 야기 시킨다. 말씀이 새로운 표현으로 화제에 올라 새로운 해후를 하게 한다.(에벨링은 같은 어근을 가진 독일 말을 이용하여 신학의 관심사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말 한다’[sagen, say]를 구사 하고, 그 말하는 것의 주제 내용을 ‘사건’[Sache]이라고 한다). 그래서 해석학의 핵심은 말을 다루는 것이고, 신학적 해석학은 신언을 다루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정말로 신언이 무엇이냐 하는 개념 규명이 문제시 된다. 에벨링에게 있어서 신언은 정통파처럼 단순히 성서가 아니다. 그는 “신언(神言)은 성성(聖性)에 선행 한다.”는 것이다. 신언이 텍스트나 설교와의 관계밖에 있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신언이 곧 성서라고 양자를 구별 없이 동일시하는 것이 정통파의 성서관이다. 그런데 에벨링은 ‘성서가 신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성서가 신언을 ‘포함하고 있다’ 혹은 ‘증거한다’”(Scripture 'contains' or 'witnesses' to the Word of God)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서에는 또는 성서 배후에는 비성서적 요소도 없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그가 보는 신언(神言)은 어떤 특별한 초자연적 언어가 아니고 오히려 하나의 참 말, 본래적인 말, 궁극적으로 가치 있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또한 신언은 모든 실재의 언어 성격(language-character)의 근거가 된다고 하며, 그러므로 신언은 ‘이해의 궁극적 근거’이기도 하다는 것이다.(Wort Gottes und Tradition, 1964, pp. 158-;Word and Faith, pp. 314-). 신학은 실재(reality)의 의미를 규명해야 하고, 존재론적 의미를 추궁해야만 한다고 에벨링은 주장한다. 그래서 인격적, 존재론적 시사(示唆)의 반대 면을 생각하는 대신, 신학은 근본적 존재론(ontology)에 근거한 인격주의를 지향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학은 실재를 객관화하기보다는 ‘역사적 만남’을 지향하도록 해야 하며, 임의 처분(disposability)보다는 실재의 언어 성격을 지향해야 하고 또 현재의 사실성보다는 개방성(openness)과 미래성을 지향하는 그런 실재 개념을 추궁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 존재론적 전망 가운데 있는 언어의 성격이 이해를 중재하고, 그리고 인격적으로 만난 신언은 기본적 해석학의 원리가 된다고 한다. 그래서 에벨링은 하나님을 다른 실재에서 분리시킬 수 없다고 보며, 신언도 인간이 말한 말에서 구별 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건으로 표현될 수 있는 세계 없이 하나님을 언급할 수 있는 신학이 없고, 반대로 사건으로 표현될 수 있는 하나님 없이 세계를 언급할 수 있는 신학이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은 생각에서 성서에 있는 신언은 아무런 수식이 가해지지 않는 말, 그대로의 말, 곧 사람들 간에 주고받는 정상적이고도 자연스러운 구두어(口頭語,oral word)이며, 또한 순수한 본래적인 말이다. 여기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선언은 말하는 존재와 인간 존재가 완전히 하나가 된 ‘말’을 뜻하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과 그의 말씀 사이에 또 인간과 말 사이에 아무런 모순이 있을 수 없고, 다만 그 말씀이 하나님과 인간을 함께 묶어 일치시켜 놓는다는 뜻이다.

 

해석학의 임무는 테스트를 생동적인 참 말로 해석하는 것이다. 정말로 철저하게 참 말이 말해지는 곳에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성서의 말뜻도 ‘역사적으로’ 이해해야지 ‘무시간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성서의 말은 어떤 견해를 표명하는 사건이 되고, 그 사건의 내용은 결과를 나타내어 작용하게 된다. 행동은 말이 분명히 이해되었을 때 요청 된다. 그리고 그 행동은 그 사람의 자기표현이며 동시에 운명의 성취인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운명은 응답으로서 존재한다. 질문을 받았으니 응답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 실존은 신언(神言)에서 기원한 ‘언어사건’이라고 이해되며, 또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보게 된다.

 

인간은 자기 운명을 성취시켜 가는 데 있어서, 구원의 말씀이 요청된다. 참된 말, 옳은 말, 치유하는 말을 필요로 하는 것이 인간 실존이다. 여기서 선포의 언어 사건이 있어야 되고 말씀 사건을 일으키는 설교가 사건화 되어야 한다. “이리하여 텍스트는 설교의 방편에 의해 현재의 경험을 이해하게 하는 해석학적 도움(a hermeneutical aid)이 된다.”고 한다. 이런 방법으로 신학과 설교 사이에 있는 거리, 본문과 청중의 신앙 사이에 있는 간격을 다리 놓으려고 그는 힘썼다. 그는 “설교 없는 신학은 공허한 것이요, 신학 없는 설교는 맹목적인 것이다.” 고 하며 “신학은 하나의 학문과 선포로 구성되어 교회를 이룬다.”고 한다. 신학과 설교의 분리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Theology and Proclamation, pp. 18-21).

 

4). 신앙의 내용: 에벨링은 ‘신앙’ 과 ‘종교’를 엄밀히 구별한다. 그리고 기독교의 본질은 신앙인데, 그렇다고 굉장히 특이한 종류의 신앙이 아니고, 그저 ‘단순한 신앙’이라고 주장한다. 신앙이란 말은 일반 종교에 나타난 용어는 아니고 다만 구약에서 기원하여 신약에서 그 충분한 의미를 이룬 것이다. 그는 종교’를 ‘자신에 관한 염려’와 신 앞에서 ‘자기를 주장하는 것’, 또 하나님에게 무엇인가 ‘요구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앙의 본질은 이런 종교와는 정반대의 것으로 진정한 의미에서는 ‘기독교 신앙’이지만 구태여 ‘기독교적’이라는 형용사를 덧붙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Word and Faith, pp. 207-214).

 

여기서 편의상 폴 쉴링(Paul Schilling)교수가 요약해 놓은 에벨링의 신앙관 네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➀. 믿음으로만 의롭게 할 수 있다는 신앙, 이것은 결코 여러 교리 중의 하나가 아니고, ‘크리스천 신앙의 전부’라고 이해한다. 신앙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인간은 참 자유를 얻을 수 없다. 인간은 결코 스스로의 창조자는 아닌 까닭에 인간 스스로가 자신을 자유롭게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이고, 그러기에 인간의 순수한 자아는 저 편에서(from beyond)받아야 한다. 좀 신기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자기 자신이 되고 응답적인 존재가 된다.

 

그래서 인간의 참 근거는 자기 자신 밖에 있다고 하는 인간 개체의 신비성을 말하게 된다. 이런 관련성이 신앙을 통해서 실현된다는 것이다. 또한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 고 할 때, 그것이 부분적인 강조가 아니고 전체적인 신앙 강조라고 하나, 그렇다고 착한 행위를 도외시한 말은 아니다. 다만 아무리 착하다고 해도 인간적인 선함이 하나님 앞에서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화론(聖化論)도 신앙 그 자체에 의존한 것이다.

 

➁. 신앙은 전 인격을 내포한다. 부분적인 것이나 인간 인격의 2차적인 수준의 것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 존재의 심층 곧 인간의 실존을 실재로 결정 지어 주는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바로 그것에 관여한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에 대한 진정한 답은 ‘내가 나 자신에게 머물러있습니다.’라는 것이 아니고,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약에 있어서 신앙은 인간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어디에서 살아야 하는지를, 그리고 어디가 정말 자기 집(home)인지에 대해서 관심하는 기본적 결단이다.

 

인간에게 이 결단은 모든 행동에 선행(先行)하는 것이고, 또 그 것이 자기를 이루고 있는 결정적 요인이라고 한다. 결국 신앙은 전인격을 경주하여 관여하는 궁극적 관심사(틸리히의 신앙관과 비슷한 표현임)곧 구원을 향한 궁극의 관심사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만이 본래적 실존에 이르는 길을 열게 한다. 신앙만이 인간 실존의 근거요, 실존을 존속 시킨다고 한다.

 

➂. 신앙은 하나의 사건이다. 신앙은 생각하는 것이라기보다 살아 행동하는 무엇이고, 어떤 이념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사건(an event)이다. 신앙은 운동이요, 해프닝(happening)이요, 생명이요, 생의 완성을 향해 가는 생명운동이다. ‘믿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명사가 아니고 동사이다. 이것이 바로 신앙은 인격적이라는 것, 신앙의 주제는 ‘그것’이 아니라 ‘나’(自我, Ich)라는 것, 그래서 ‘나는 믿는다.’(credo)고 하는 것이다. 참 신앙은 언제나 신앙의 전달(communication of faith)에 대한 인격적 응답이다. 사람을 의롭게 하는 신앙은 ‘전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지, 결코 화석화(化石化)한 무엇이 아니다. 그래서 “신앙은 어떤 소유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다.” 언제나 새로운 회개의 행동과 새로운 결단의 삶을 가지게 하는 그런 신앙은 복잡한 것이 아니고 단순한 것,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구체적인 것, 무시간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것이다.

 

➃. 신앙은 역사적인 것이다. 기독교는 계시라고 하는 특이한 역사적 사건 때문에 기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역사에서 나와서 역사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Word and Faith, p. 215). 신앙의 기원은 시간과 공간에 굳게 매여 있다. 신앙은 신자의 구체적인 공동체 안에서 믿는 자들이 다 함께 살아오고 행동해 오고 고난과 즐거움을 당해 오면서 증거, 선포해 온 무엇이다. 그래서 ‘신앙과 역사’는 서로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앙은 (아브라함의 신앙 또는 예수의 신앙처럼)역사성에 관련되어 있다.

 

그러기에 신앙인에게는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기대에서 분리된 ‘오늘’이 있을 수 없다. 어제로부터 내일에 이르는 한, 과정으로서의 오늘이다. 인간 실존은 근본적으로 미래를 지향해 가는 운동이다. 그 여정(旅程)이 불안한 것이든 권태롭든 또는 희망적인 것이든 간에 인간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가는 순례자의 실존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향해 가는 신앙은 인간을 희망을 향해 개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미래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여기서 신앙인의 안에 있는 신앙이 미래성(未來性), 그 자체 곧 바로 미래를 향한 신앙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리고 이 역사와 신앙의 관련성 한복판에 신앙의 증인과 근거로서의 예수가 현존한다고 본다. 에벨링은 신앙은 ‘어떤 의식의 대상’(certain object of consciousness)이 요구되기 보다는 그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하고,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는 ‘신앙의 대상’이란 표현 보다는, 오히려 예수는 신앙의 증인이요, 신앙의 근거(the basis of faith)로서, 인간을 하나님의 실재와 대면케 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인간이 죽든 살든 간에 신과 만나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입증한 분이라고 한다.

 

5). 맺는 말: 신앙은 경험하는 것 이상의 것을 믿는 것, 또한 모든 경험에 대면해서 신앙에의 역설적 요인을 발견함에도 ‘불구하고’(nevertheless)믿는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이 말은 결코 신앙은 가혹한 현실 앞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는 것이라는 말이 아니고, 오히려 가혹한 현실을 이기는 힘을 신앙이라고 한다는 뜻이다. 신앙의 확신은 외적으로 실의와 절망적인 상황에 놓일지라도, 또는 밑 없는 무저갱으로 빠져 들어갈지라도 당당한 발걸음을 내디디는 것이다(cf. Word and Faith, pp. 240-43).

 

이와 같은 신앙의 승리적인 능력을 깨달을 때, 거기서 구원의 본질과 그 근원을 보게 된다. 비신자가 믿을 때, 무력한 자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참여할 때, 그리고 죄인이 자기 스스로에게서 자유하게 될 때, 구원이 현존하게 된다. 이것이 재생이요, 용서요, 화해이다. 또한 이것이 미래 지향의 자유이고 또 과거에의 종노릇에서 끝없이 해방된 미래에의 기대와 희망이요, 삶의 갱신인 것이다. 이런 사건은 우리의 이성으로 확인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또 비판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없는 것, 이른바 신의 은총의 기적을 통해서 발생하고 지속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받은 것 이외의 다른 것일 수가 없다.

 

이런 신앙의 기적이 발생할 때, 신과 세상과 인간 자신에 대한 모든 관계는 새로운 것이 된다. 이때에 비로소 인간은 이제야 자신이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며, 그래서 자기만을 사랑하는(self-love)일에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는 그 이상 더 자기 자신만을 사랑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자이다. 그래서 그는 이웃 사랑의 자유를 향유하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자유는 신앙의 결과이지 결코 원인은 아니라고 하면서, 그는 “신앙은 행동하는 것, 신앙의 행위를 사랑하라”는 ‘루터’의 말을 강조한다.

 

이처럼 그는 ‘말씀과 신앙’의 범주에서 생생하고도 독창성 있게 기독교 신학을 해석하고 있다. 여기서 에벨링의 특이한 공헌을 몇 가지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➀. 에벨링은 신인(神人)간의 관계를 아주 생동적인 성격의 것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의 존재에 대한 ‘언어성격’개념은 궁극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실재를 웅변적으로 말해 준다. 거기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스스로를 전달하려고 부단히 말씀하려고 한다. 성서 본문은 마치 과거의 양피지처럼 보이지만, 비록 그럴지라도 현대인에게 무엇인가 말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성서가 본래 인간의 마음(a human mind)속에 있는 하나님의 행동으로부터 기원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또 살아 계신 하나님이 성서를 자신의 계시로서 현대인의 이해에 조명하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➁. 성서 해석은 언어 사건을 새로이 재 발생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에벨링이 ‘신앙’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가장 강조하는 요점이다. 여기서는 무엇보다도 ‘인격적 만남’(personal encounter)이 강조되고 있다. 그는 신언이 모든 자에게 개인적으로 보내어진 하나의 편지라고 보고, 이 편지를 받은 자에게 있어서는 그 신언이 하나의 현재적 실재가 되며, 동시에 그이만이 행할 수 있는 하나의 응답을 유발시킨다고 한다.

 

➂ 신앙에서 사는 인간 생활은 모든 면에 전체적이고 통일성이 있다는 것을 그는 강조한다.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세계는 다 하나의 상관된 실재를 이루고 있다. 이 실재의 언어성격이 일반적 또는 신학적 이해를 가능케 한다. 그래서 신언과 인간의 말 사이에는 분리시킬 수 있는 요소가 있는데, 그것이 곧 인간의 진실 된 말은 인간 경험의 한 사건으로서 하나님의 활동에 뿌리박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인간이 이용하는 사고 형식과 언어는 전적으로 인간적인 것이고 결코 신언일 수 없다고 한 바르트의 실패를 만회하고 나선 것이다.

 

➃ 그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역사적 예수의 중요성을 효과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물론 예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신앙의 결정에서 이룩된 전승(傳承)을 통한 것이긴 하나, 그렇다고 우리 자신의 생에서 역사적 자료에 대한 지식을 개인의 신앙과 대치시켜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케리그마가 반드시 1세기의 처음 크리스천들의 신앙에서만 생겨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은 순수하게 실제로 생존했고 가르쳤던 그 예수에 의해서 이룩되었다고 한 것이 에벨링의 건전한 판단이요 공헌이라고 하겠다. (* 전통적 신학의 시각에서 볼 때, 三位一體의 하나님, 즉 보혜사 ‘성령’이란 표현이 없는 것이 그의 신학을 이해하는데 난점이 있다고 느껴진다.) 끝.

2016년 12월 15일

山下연구원장: 양 견 박사